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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모랄리스(Homo Moralis)

도덕적 인간

by 교양이



1985년 9월 19일, 멕시코시티의 라사토 카르데나스 해안가에 규모 8.0의 지진이 강타했다. 이 지진으로 9,500명이 사망했고, 3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건물 대부분이 무너졌다. 미국의 구조견 전문가 케롤라인 헤바드도 구조견 앨리와 함께 급파되었다. 그러나 잔해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시체뿐이었다. 독일 셰퍼드 앨리의 귀는 실망으로 축 늘어졌고, 침대 밑에 숨어 나오려 하지 않았다. 생존자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다른 구조견들도 의욕을 잃었다. 밥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수의사는 구조견들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잔해 속에 숨어 생존자 역할을 해야 했다. 오랜만에 생존자를 찾은 개들의 기분은 좋아졌고, 다시 구조를 시작할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을 느끼고, 우리의 친구인 개들의 사랑에 기분이 훈훈해진다. 하지만 스키너라면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스키너 상자(Skinner Box)로 유명한 그는 자극-보상 메커니즘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겼다. 스키너는 사람과 동물의 감정을 의미 없는 부산물로 보았고,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안기는 것은 모유라는 보상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실험쥐들에게 하듯이 아이가 만져선 안 되는 물건에 전기충격 장치를 설치하자고 제안했고, 어머니들이 아이를 너무 안아주면서 응석받이로 키운다고 생각했다. 자기 딸을 유아용 공기침대에 따로 격리시킨 건 그래서였다.


다른 행동주의자들 역시 사랑과 동정심, 슬픔과 공감 같이 인간성의 필수적인 요소를 모두 이기적 욕망의 한 갈래로 취급했다. 결국 그들의 냉정한 이론은 한 대학원생의 실험 하나로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해리 할로라는 심리학자가 먹이를 주는 철사어미와 아무것도 주지 않는 천 어미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어린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한 것이다. 행동주의자의 생각대로라면 붉은털원숭이 새끼는 우유를 주는 철사 어미인형에 붙어있어야 했다. 하지만 새끼 원숭이는 우유를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천 어미 인형에 매달려 있었다. 어미의 따듯한 접촉과 사랑이 그리웠던 것이다. 사랑과 유대감이 그 자체로 보상이라는 생각은 그제야 똬리를 틀 수 있었다.

그러나 스키너의 망령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을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적 존재로만 본다. 보수주의자들은 욕망을 쫓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해결할 거라 믿으며,『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를 신으로 추앙한다. 하지만 스미스가『국부론』이후에『도덕감정론』을 쓰고, 타인의 행복을 보는 것 자체가 기쁨이라고 말하며 줄곧 동정심과 연대를 강조한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프로이트 역시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고 악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실현되지 못한 파괴적 욕망은 억압되어 무의식 속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내면의 악마가 동굴 속에 숨어 뛰쳐나올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린이의 성욕이 신경증적인 문제를 일으킨다는 괴랄한 생각에 평생 신경증적으로 집착했다. 칸트 역시 인간이라는 굽은 나무에서 곧은 것이 나온 적이 없다고 말했고, 도덕을 순수한 의지와 이성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칸트는 평생 외톨이로 살았다.


다윈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이기적 유전자』에서 “개인들이 공동선을 위해 이기심을 버리고 협력하기를 바란다면, 생물학적 본성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라고 암울한 결론을 내렸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역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국가와 문화의 발명이 야만적 본성에 문명의 옷을 입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선 곧바로 "그럼 누드비치에선 피가 튀는 비치발리볼 경기가 일어나는 건가"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생물학자들이 이런 비관주의를 굳게 믿게 된 데에는 다윈의 불독이라 알려진 토마스 헉슬리의 공이 크다. 다윈은 자기 이론을 설파하기에는 너무 수줍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진화론이 아내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힘들어해서 강연이나 토론회 같은 데는 일절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해서 싸워줄 투사를 선택했는데, 그게 바로 헉슬리였다. 하지만 헉슬리는 다윈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93년 옥스퍼드 대학 강연에서, 인간을 잡초 퇴치에 애쓰는 정원사로 비유했다. 도덕과 윤리야말로 인간이 진화에 맞서 승리한 결과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악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교육과 처벌을 통해 행동을 교정해야만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홉스의 생물학적 버전이다. 여전히 헉슬리파들은 도덕이란 사악한 인간 본성을 처벌로 억누른 결과라고 본다. 그 생각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성악설이라는 형태로 퍼져 있다.


결국 도덕성의 뿌리를 어디서 찾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출발점을 야만으로 시작하면 사회는 처벌과 통제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해야 한다. 아이들은 순수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악마가 된다. 그럼 교육은 아이들을 처벌하고 고통을 주어 훈육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 복지와 재분배 정책 역시 쓸모없는 것이 된다. 학자들은 정책 입안자에게 귓속말로 말할 것이다.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어찌 됐든 생물학은 여전히 중요하다.


집단을 이루어 사는 동물들에게 도덕성이 발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집단 속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타인에 대한 배려, 옳고 그름에 대한 직관이 기본 모드(Default Mode)로 작동하는 것이 유리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도덕을 고귀한 이상 또는 희생으로 이해하거나, 헉슬리처럼 충동과 욕망을 절제한 결과로 보아왔다. 하지만 도덕성의 뿌리는 공동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감정이라는 형태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비록 빙하 수면 위에는 다양한 문화적 규범이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아래에는 영장류의 도덕성이 정치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계는 이제 도덕적 감정에 주목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죄책감이다. 동물행동학의 선구자 콘라트 로렌츠의 개 불리가 싸움을 말리는 주인의 손을 실수로 물었던 적이 있다. 로렌츠는 개를 탓하지 않았지만, 불리는 몇 주 동안 우울해져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사람처럼 소파 구석에 파묻혀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쉴 뿐이었다. 불리는 그전에는 한 번도 사람을 물지 않았다. 따라서 학습된 행동이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차라리 개에게도 내면화된 양심이 있으며, 그 양심을 저버렸기에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탓하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결론이 더 합리적이다. 개를 키우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데, 소파나 신발을 물어뜯고 난 후 혼날 때 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충분히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위계도 죄책감을 덜어내진 못한다. 한 번은 서열이 높은 보노보가 지위가 낮은 녀석의 손가락을 깨문 적이 있었다. 말했듯이 보노보는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평화로운 종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이 일어나면 더 큰 문제가 된다. 지위가 높은 보노보는 먼저 다가가 화해를 시도하면서 자기가 물었던 손가락의 상처를 30분이나 핥아주고 지켜보았다. 사람처럼 후회하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영장류도 마찬가지다. 알파 수컷 몰래 짝짓기를 한 필리핀원숭이는 들키지 않았는데도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우리가 보기엔 "내가 네 여자를 뺏었다"는 조롱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용서를 구하는 표정에 가깝다. 원숭이도 사회적 역할에 따른 행동 규칙을 이해하고 있으며, 이를 어기면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도덕적 감정은 수치심과 죄책감이다. 죄책감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처럼 행동을 후회하는 것을 말한다. 수치심은 "쳐다보지 마. 난 쓰레기니까"라는 느낌에 가깝다. 따라서 공동체의 규칙을 어긴 것과 관련이 있는 수치심은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흔하고, 개인의 양심과 관련이 있는 죄책감은 개인주의 문화권에서 자주 나타난다.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사회적 위계와 규범을 어기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줬을 때 내면의 목소리가 외치는 양심의 비명이다. 불안의 궁극적인 출처는 집단에서 버림을 받거나 처벌을 받는 것이다. 집단이 가하는 처벌은 사회적 동물에게 생존이 달린 문제기 때문에, 도덕성이 진화해야 할 만한 이유는 차고 넘친다. 다윈은 이미 모든 사회적 동물에겐 양심 비슷한 것이 발달할 거라 예측했다. 이번에도 다윈이 옳았다.


도덕적 감정이 침팬지나 보노보가 보이는 모습과 비슷하다면, 행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침팬지가 하는 것처럼 잘못을 저질렀을 때 눈을 내리깔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거나 몸을 웅크린다. 혼내는 사람은 대개 자신보다 높은 서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소보다 자신의 몸을 낮추어 복종적 행동을 드러내는 것이다. 타인의 기대에 걸맞은 성과를 내지 못했을 때에는 부족함을 탓하며 자신의 머리를 때리거나, 혼자 집에 틀어박힌다. 자신이 반성하고 있으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달라질 것이라는, 관용을 호소하는 의미다.


물론 죄책감은 조작이 가능하다. 진심을 더 확실하게 아는 법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거나, 고개를 푹 숙이거나, 반성문을 쓰는 것은 진심 없이도 충분히 가능하다. 물의를 일으킨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악어의 눈물 역시 쉽게 볼 수 있다. 반면 얼굴의 홍조는 조작하기 어렵다. 빨개지는 얼굴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데, 그만큼 가짜 죄책감이 흔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어떤 동물보다 협력이 중요했던 인류는 거짓말쟁이와 무임승차자에 맞서 부끄러움으로 터질 듯한 얼굴을 선호하게 되었다. 우리는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시선도 꽤 신뢰할만한 표시가 된다. 동물의 눈은 검은자위와 흰자위의 경계가 흐릿하다. 인간은 흰자위가 훨씬 크고 하얗기에 시선을 잘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불안하거나 두려움을 느꼈을 때 일어나는 동공 지진을 통제하기가 어렵다. 혼내는 사람은 상대의 눈빛과 시선을 보고도 진심을 알아챌 수 있다.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건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신뢰성은 남을 속이는 능력보다 더 도움이 된다. 그렇게 이기심은 설 자리를 잃었고, 우리는 도덕적인 존재가 되었다.


도덕성은 우리의 존재 자체에 닻을 내리고 있으며, 희생이나 이기주의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에게 선한 본성이 없다면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완전히 도덕적인 존재라면 초등학교 때부터 도덕을 가르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도덕성은 환경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는다. 그래서 정치가 중요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정치를 통해 도덕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뿐이다. 이때 우정과 공감, 두려움과 불안, 분노와 혐오 같은 다양한 영장류적 감정들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준다. 우리가 침팬지와 보노보에게 한수 배워야 하는 이유다.


존 로크의 형이상학보다 개코원숭이가 더 많은 걸 말해줄 때가 있는 것처럼, 사진 한 장이 많은 것을 해낼 때도 있다. 2015년 터키의 물라주 보드룸 해안가에서 세 살 어린아이의 시체가 떠올랐다. 시리아 난민들이 지중해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한 사건이었다. 세계는 충격에 빠졌고, 난민 문제에 침묵하던 EU 국가들에게 행동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종교와 국가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슬픔과 분노가 사람들의 마음을 강타했다. 영장류적인 공감의 힘이었다.


난민 문제와 관련해 보수와 진보가 손을 잡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얼마나 많은 고성과 논리, 정치적 수사가 토론장에서 오가고,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인가. 하지만 사진 한 장 덕분에 일단 생명부터 구조하자는 데 있어서는 보수와 진보가 합의할 수 있었다. 이후 최소 6만 명 이상의 난민이 구조되었다.


강제 수용소에서 1,098명의 유대인들을 구한 것도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오스카 쉰들러는 나치 당원으로 활동하면서 서류를 조작해 수많은 유대인들을 살렸다. 그때 그의 동기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윤리적 성찰의 결과였을까? 원래 쉰들러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술과 도박을 좋아하던 난봉꾼이었다.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유대인을 구한 건 칸트의 순수이성 때문이 아니었다. 고난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영장류부터 사피엔스까지 이어진 본능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보수나 진보이기 이전에, 도덕적 존재인 호모 모랄리스(Homo Morali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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