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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소시올로지쿠스(Homo sociologicus)

사회적 인간

by 교양이



지금으로부터 약 200만 년 전, 아프리카 대륙의 기후가 급격히 건조해지고 온도가 크게 낮아졌다. 울창했던 숲은 점차 수풀로 바뀌어갔다. 나무 위에서 열매를 따먹으며 한가롭게 살아가던 큰 원숭이는 작은 원숭이와의 먹이 경쟁에서 밀렸다. 그들은 선택을 해야 했다. 그들 다수는 나무 위의 익숙한 삶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오직 한 원숭이만이 완전히 나무에서 내려오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두 발로 우뚝 선 채, 거친 흙먼지가 풍기는 지상에서의 삶에 용감하게 맞서기로 한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삶은 쉽지 않았다. 나무에 오르는 법을 잊어버린 그들은 더 뛰어난 사냥 능력을 가진 육식동물이 되거나, 맹수를 따돌릴 수 있는 재빠른 초식동물이 되어야 했다. 팔만 뻗으면 달콤한 즙이 줄줄 흐르는 무화과를 먹을 수 있던 시절은 지나갔다. 살아남기 위해선 닥치는 대로 먹어야 했다. 그러나 고양잇과 맹수와의 사냥 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들의 근력과 발톱, 이빨과 신체 구조는 오랜 시간 나무를 잡고 매달리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진화의 시간이 그들을 사냥하는 원숭이로 만들기 전에, 너무 빨리 나무에서 내려온 것이다. 결국 그들은 다른 맹수가 먹고 남긴 시체를 뜯어먹거나, 낮은 초목에 달려있는 산딸기와 견과를 따먹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것도 없을 경우엔 손톱으로 땅을 파 맛없는 나무뿌리라도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운이 좋으면 즙이 많고 꿈틀거리는 벌레, 작은 파충류와 개구리, 어미새가 꽁꽁 숨겨둔 새알, 병든 짐승, 갓 태어나 비틀거리는 새끼도 먹을 수 있었다. 사바나 초원의 동물들은 그들을 시체 청소부라 불렀다. 가끔씩 지나가던 하이에나마저 그들을 불쌍하게 쳐다보며 먹다 남은 뼈를 던져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던 만큼 그들의 인내심과 집요함, 창의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다행히 원숭이들은 몇 가지 기가 막힌 전략을 찾아냈다. 우선 그들은 거추장스러운 털을 벗어버렸다. 털은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게 해 주지만,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에 사냥을 하기에는 거추장스러운 짐이었다. 그들은 털을 벗고 그 자리에 땀구멍을 내서, 땀이 자연스럽게 흐르며 증발하게 했다. 열을 더 효과적으로 낮출 수 있게 되자, 맹수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던 그들은 사냥감이 지칠 때까지 여럿이서 쫓아가 잡거나, 남은 두 발로 돌도끼나 투창 도구를 만들어 사냥감을 향해 던졌다. 다행히 그들의 던지기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일단 사냥 기술이 익숙해지고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자, 대폭발이라 할 수 있는 혁신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들은 고기를 불에 익혀먹는 법을 발견했고, 사나운 짐승들이 불을 무서워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이제 철분과 비타민, 영양분이 풍부한 고기를 안전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얻은 칼로리는 유연하고 복잡한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뇌에 전부 투자했다. 올인(All-in)을 한 것이다. 물론 부작용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아이들은 지나치게 큰 머리를 가진 채 태어났다. 그 과정에서 여성이 출산할 때 고통과 위험이 높아지고, 새끼 키우기가 더 힘들어졌다. 그 점은 암수 한 쌍의 결합과 혈연 집단의 확대로 해결했다. 아기를 돌보기 위해 무리를 이뤄 함께 사는 과정에서 생존율은 더 높아졌고, 더더욱 서로 의지하며 살게 되었다.


의복과 거주지, 사냥 도구와 식량 창고를 발전시키는 기술 역시 나날이 발전했다. 동물과 식물까지 자신의 뜻대로 길들이는 법을 찾아내자, 인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만 년이라는, 진화의 시간에서 눈 깜빡할만한 시간만에 자연의 제약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도시를 건설해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스스로를 문명인이라 부를 만한 수준을 갖추게 되자, 데카르트라는 생각하는 원숭이는 "자연은 이용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거만하게 내뱉으며 동물을 멍청한 자동기계로 간주했다. 눈 깜짝할 사이 자연의 밑바닥에서 최상층으로 껑충 뛰어올라, 다른 동물을 업신여기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나무에서 내려와 첫걸음을 내디뎠던 털 없는 원숭이, 호모 사피엔스인 바로 우리가 말이다.


현생 인류가 양자 컴퓨터를 만들어 내고, 원숭이와 개들을 묶어 우주로 보내고, 1만 5천 개의 핵무기를 만들어 내고, 갈수록 뜨거워지는 지구를 만들어 낸 결과를 보면 감동스럽지 않을 수 없다. 어느 것 하나 뚜렷한 장점이 없던 털 없는 원숭이가, 나무에서 내려와 두려움에 떨며, 부서질 듯 연약했던 우리가 단지 큰 머리와 두 손을 활용해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같은 종의 일원으로서 축복받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Mark Dion, Scala Naturae, 1993

그러나 지능과 감정, 사회성과 문화가 우리에게만 가능하다는 오만은 동물에게는 저주일 뿐이다. 동물이 밑바닥에 있는 열등한 존재라면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가 생긴다. 이천 년 전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동물을 수직 방향의 스칼라 나투라이(scala naturae, 자연의 사닥다리)에 배치하며 인간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심리학자들이 그 일을 이어받고 있다. 그들은 오직 인간만이 현재와 미래와 과거를 인식하고 자아가 있으며, 죽음을 두려워할 만큼 복잡하고 우월한 존재라는 점을 확신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대리인들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쥐들을 굶기거나 물에 빠뜨린다. 살기 위해 발 디딜 곳을 기억하는지 실험하기 위해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나올 때까지 반복한다.




놀랍게도 이 실험법은 모리스 수중 미로 테스트라는 이름으로 동물의 기억력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표준 측정법이다. 콜롬비아 장애물 테스트도 있는데, 동물을 고립시키거나 굶긴 뒤 전기가 흐르는 장애물을 지나가게 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먹이나 짝을 위해 전기 충격을 감내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고, 매력적인 짝을 만나면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는지 알기 위해 고통을 주는 것이다. 침팬지, 개, 원숭이, 비둘기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모든 동물에게 적용시킨다. 자, 봐라! 동물의 지능과 사회성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본능에 따라 정해진 행동만을 반복하는 생존기계나 다름없는 존재다. 동물이 공감하고 협력하며 경쟁하는, 복잡하고 민감한 사회적ㆍ정치적 존재라는 다윈의 생각은 틀렸다!


오직 인간만이 생각하고 성찰하고 공감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럴 때면 현기증이 난다.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렸다. 생명의 나무에 매달려 있는 가지들은 수평으로 누워 있다. 진화의 기준에 우월함이란 없다. 게다가 사피엔스라는 가지는 진화의 시간에 비추어 보면 겨우 어제 뻗어 나왔을 뿐이다. 털 없는 원숭이의 도약은 우리가 우월하거나 고귀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다. 진실은 반대편에 가깝다. 우리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너무 연약하고, 무능력하고, 겁이 많은 존재기 때문이다.






동물학자들은 공격받기 쉬운 종일수록 집단의 크기가 커진다고 보고 있다. 높은 지능과 사회성, 뛰어난 공감능력은 취약성의 결과다. 우리는 자연의 무자비함에 혼자 맞설 수 없을 만큼 무력한 존재였다. 개코원숭이처럼 땅에 사는 원숭이는 나무에 사는 원숭이에 비해 도망칠 곳이 적기 때문에 더 큰 무리를 이룬다. 반면 사자나 코요테는 인간만큼 겁에 떨면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지 않는다. 인간의 신체구조와 생활방식은 여전히 나무 위에서 열매를 따먹으며 지내던 시절에 적합하게 세팅되어 있다. 초식동물이라는 낡은 옷을 벗어던질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어중간한 신체 구조와 성향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런 우유부단함이 우리를 새로운 변화로 이끌었다. 다른 어떤 포유류보다 서로 뭉치고 협력하는 성향, 학자들이 자랑스럽게 초사회성이라 부르는 것의 이면에는 누구보다 무력했던 조상들의 역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 취약성과 관련 있는 게 바로 먹이다. 쥐나 인간 같은 잡식동물에겐 특별한 장점이 없다. 가젤처럼 빨리 달릴 수 없고, 호저의 가시나 스컹크의 독가스처럼 자신을 지킬 특별한 무기도 없다. 닥치는 대로 먹기 위해선 적절한 먹이를 찾아내고 학습하는 데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에너지 지갑은 늘 쪼들려 있는데, 이때 유일한 해결책은 함께 사는 것이다. 이를 제너럴리스트라 한다. 반면 치타나 코알라처럼 정해진 먹이와 생태 환경을 가지는 종은 스페셜리스트다. 스페셜리스트가 수만 년 동안 한 가지 기술에만 몰두한 장인이라면, 우리는 패거리로 뭉쳐 다니며 돌아다니는 약삭빠른 유목민이다.


제너럴리스트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이다. 자이언트 판다는 점심으로 뭘 먹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판다는 대나무 잎만 있으면 행복하다. 하지만 대나무에 병충해가 퍼진다면? 환경에 적응할 새도 없이 멸종하고 만다. 제너럴리스트는? 다른 먹이를 찾아 떠나면 된다. 당연히 서식지에도 제한이 없다. 그 대가로 무력한 신체를 얻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고 가르쳐주면 된다. 다양한 먹이를 찾고, 구별하고, 학습하고, 배운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파하는 과정을 통해 어떤 환경이든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쥐와 바퀴벌레와 인간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진화에는 방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탄복해 마지않는 높은 지능과 사회성은 무능을 메꾸기 위한 틈새가 된다. 어설픈 신체와 잡식성이 추동해 낸 결과물인 것이다. 한때 인간이 지구 위에 군림하게 된 이유를 뛰어난 사고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사회성 때문이라는 증거가 쏟아지고 있다. 섬세한 돌도끼를 만들고,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고민하는 능력을 발전시켜 나가다 보니 복잡한 수학 방정식과 건물 설계도를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는 '논리적 지능 가설'은 뒤로 밀려났다. 대신 연약한 인간이 서로 의지하고 경쟁하며 살다 보니 높은 지능이 부산물로 생겨났다는, '사회적 지능 가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결국 타인의 감정을 자기 것처럼 느끼는 공감능력과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지능, 집단이 하나가 되는 군중 심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상상력 모두 인간의 초사회성이라는 큰 틀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뛰어난 공감능력이 그 결과다. 심리학자 테오도어 립스는 우리가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를 보며 긴장하는 것을 보고 강한 열정을 경험하다는 뜻의 그리스어 Empatheia를 언급했다. 훗날 영미심리학자들이 이를 참고해 Empathy(공감)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곡예사들은 공감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일부러 줄에서 떨어질 듯 연기를 하며 관중의 심리를 쥐고 흔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포 영화나 아찔한 장면을 보면 손에 땀이 흐르는 것도 모두 공감능력 때문이다. 말 그대로 화면 속의 주인공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노래와 춤은 나를 잊고 하나 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수렵 채집민들에게 종교적 의례는 빼놓을 수 없는 행사다. 춤과 노래가 빠지지 않는 곳이 없다. 불을 피워놓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나라는 존재는 잊히고, 더 크고 고귀한 존재가 된다는 경험을 한다. 매슬로가 말한 절정 경험이 여기에 해당하며, 공감이 그렇게 만든다. 군집 스위치를 켜서, 개인들이 하나가 되는 영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을 만드는 것이다.


현대의 인간들 역시 구석기시대의 선조들과 다르지 않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서 미친 듯이 몸을 흔들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순간만큼은 성격과 가치관, 직업 등 모든 면에서 다른 개인들이 하나가 되는 신비한 경험을 한다. 어떤 이들은 너무 황홀한 감정에 압도된 나머지 기절을 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카타르시스는 종교 단체의 기도회에서도, 월드컵 결승에서도, 전쟁을 앞둔 군인과 수렵채집민, 심지어 침팬지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침팬지 역시 전투에 나서기 전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같은 리듬으로 몸을 흔든다. 그 순간 죽음과 두려움, 이기심은 사라진다. 대신 함께 하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충만함이 그 자리를 채운다. 인류는 그렇게 하나가 되어 세계를 지배해 왔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사회적 관계가 유리된 사람이 병에 잘 걸리고, 회복도 느리고, 수명도 짧으며, 정신적인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실험으로 입증되었다. 행복도가 높은 사회는 가장 부유한 사회도, 도로와 제도가 잘 정비된 사회도 아니다. 힘든 일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고, 길을 물어보는 낯선 사람에게 나쁜 의도가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는 사회다.


서구의 진보주의자들이 정치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흔히 서유럽 문화권을 WEIRD(서양의-Western, 교육받은-Educated, 산업화된-Industrialized, 부유한-Rich, 민주주의-Democratic)라 부르는데, 이들은 개인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이상한 그들이 한때 세계를 지배했을지언정, 전체 인류 중 WEIRD의 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 뇌의 기본값은 사회적이고 공동체주의적으로 세팅되어 있다. 그래서 평등주의와 서열주의,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는 맞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항상 삐걱거리며 굴러간다. 인간의 정치적 심리는 여전히 사바나 초원의 수렵채집 시절에 머물러 있으며, 문화가 진화를 너무 빨리 앞서간 탓에 항상 잡음을 일으키고 있다.


공동체 문화권에서는 사회적 위계와 도덕적ㆍ종교적 규범이 훨씬 더 중요하다. 개인은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 살아간다. 그런 사회에서 진보주의자들이 설파하는 평등과 인권, 자유는 다소 어색하고 이질적인 가치다. 실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국가 역시 극소수다. 시작부터 개인의 권리와 자율성을 전제하기에, 공동체주의와 충돌하는 것이다. 아시아와 남미 대륙, 중동 국가의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하는 이유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보수적인 존재다. 나약하고 겁이 많은 우리는 함께 지내려는 원초적인 본능을 갖고 있다. 그런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개인보다 집단을 우위에 두기 마련이고, 안정과 질서를 최우선으로 삼는다. 자연스럽게 엄격한 사회 규범과 위계질서, 도덕적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단어가 바로 보수주의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보수적인 존재다. 사회성과 도덕성, 문화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고, 그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 안의 침팬지를 만나러 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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