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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

전쟁이 아니라 사랑을

by 교양이



1944년 나치 독일이 패망의 길을 걷던 시기, 뮌헨 시내에 폭탄이 투하되었다. 뮌헨의 헬라브룬 동물원에는 침팬지 무리가 살았는데, 그들 중 일부가 포격소리에 놀라 죽었다. 유난히 머리가 작고 팔다리가 길고 소심한 녀석들이었다. 피그미침팬지라 부르던, 침팬지의 아종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진짜 이름은 따로 있다. 잊혀진 유인원, 보노보다.


보노보를 보고 있으면 공통점이 먼저 보인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노는 걸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함께 나눠 먹으려 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위로받으려 한다. 성적인 유희를 즐기며, 서로 옆구리나 배를 간질이며 킬킬대기도 한다.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설렘을 즐긴다. 수영은 못하지만 물놀이는 좋아한다. 스킨십을 너무 좋아해서 머리가 벗어진 대머리 보노보도 있다. 보노보는 유쾌하고 활발하며 인생을 즐기는 낙천주의자다. 침팬지는 전쟁을 하지만, 보노보는 사랑을 한다.



보노보의 공식 학명은 판 파니스쿠스(Pan Paniscus)다. Pan은 사람의 얼굴에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을 한 숲의 신 판에서 따왔다. Paniscus는 작다는 뜻이다. 결국 작은 염소신이란 의미가 되는데, 동굴 거주자를 뜻하는 침팬지의 학명 판 프로글로디테스(Pan Troglodytes)와 비교해 보면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침팬지는 동굴 속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음침한 느낌을 주지만, 보노보는 잔디밭에서 낮잠을 즐기는 한량에 가깝다.


보노보는 평화와 섹스를 사랑하는 히피족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침팬지가 낯선 무리와 만나면 피가 튀는 유혈극이 벌어지지만, 보노보의 경우엔 난교 파티가 벌어진다. 침팬지에게 과일 바구니를 갖다 주면 경쟁과 다툼이 벌어지지만, 보노보는 진한 포옹과 스킨십을 한 후 사이좋게 먹이를 나눠먹는다. 자연의 보편적 언어인 폭력과 경쟁을 보노보에게선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자유분방한 성적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부모가 아이들의 눈을 가린 채 동물원에서 황급히 나오는 일도 흔하다. 보노보에게 성별이나 나이, 계급 같은 문제는 성적 파트너로서의 자격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포르노 배우들이 보노보에게서 한 수 배워야 할 정도로, 그들은 성에 관해선 아주 창의적인 기술을 선보인다.


보노보가 연구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놀랍지 않다. 훈련된 동물행동학자들조차 동물에게서 인간의 우월한 점을 찾고, 보고 싶은 대로 보려는 무의식적인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부계 사회에서 수컷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살아가는 침팬지와 달리, 보노보 사회는 모계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간다. 암컷들이 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며, 수컷 보노보는 마마보이로 태어나 평생 어미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간다. 어미의 권력은 그대로 수컷에게 전해지며, 소심한 수컷 보노보들은 자신의 정해진 위치를 그대로 수용하며 물 흐르듯 살아간다. 아주 가끔씩 일어나는 다툼에서도 부상을 입는 쪽은 항상 수컷 쪽이다. 보노보가 좋아하는 과일을 갖다 주면 수컷들이 먼저 달려와 허겁지겁 입에 먹을 걸 잔뜩 쑤셔놓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암컷들에게 다 빼앗기기 때문이다. 보노보의 동성애와 의기소침한 수컷의 모습이 학계 세미나에서 발표되자, 나이가 많은 한 남성 생물학자는 격분해 "도대체 저 수컷들은 뭐가 문제요?"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인류는 보노보의 좋은 점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침팬지는 알아도 보노보는 잘 모른다. 보노보는 정치적으로 이용되기엔 너무 친절하고 공감능력이 뛰어난 종이다. 반면 침팬지는 보수주의자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다 가졌다. 그들의 권력에 대한 갈망과 엄격한 위계, 순수하고 이기적인 욕망은 보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에 최적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시대적 흐름도 맞아떨어졌다. 최초의 여성 침팬지 연구가인 제인 구달은 곰베에서 4년간에 걸쳐 침팬지들이 벌이는 전쟁을 처음으로 보고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전쟁은 인간만 벌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과일이나 따 먹으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숲 속의 이웃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갑자기 침팬지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들의 폭력성과 지배성에 대한 연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약한 것은 도태된다"는 단순 명쾌한 논리, 따라서 빼앗고 지배하기 위한 경쟁이 자연스럽다는 진화론적 결론. 많은 사람들이 진화를 그렇게 이해한다. 정작 다윈이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건 알려져 있지 않다. 다윈은『종의 기원』에서, "나는 생존 경쟁이라는 말을 넓은 의미에서 쓰고 있으며, 거기에는 상호 의존도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진화론을 멋대로 받아들일까 봐 두려워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다윈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하버트 스펜서라는 철학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늘어나는 인구를 줄이기 위해 빈곤과 전쟁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맬서스의 주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곧 자신도 뒤처지지 않을 만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다윈의 자연선택을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이후 진화란 승리한 자가 살아남고 패한 자는 도태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부랑자, 이교도, 빈곤층, 실업자, 집시, 정신병자, 그리고 유대인...... 인류의 진보를 발목 잡는 이들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했고, 히틀러의 살생부 명단은 실제로 그 효력을 발휘했다.


이게 바로 약육강식의 논리가 자연의 대원칙이 된 과정이다. 정치인들이 그 속에서 진화론과 생물학을 입맛에 맞게 바꿔가며 이용한 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오해는 진실이 되었다. 침팬지를 보며 동물의 열등함을 비웃던 이들이, 이제는 침팬지가 인간의 본성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무제한적인 탐욕은 치솟는 실업률, 경제 위기, 가족과 지역사회의 해체, 살인과 자살, 절망과 증오를 낳았다. 중산층이 붕괴하고 마약 중독자들이 길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은 남성들이 아내와 자식을 때렸다. 교도소의 수용 인원이 부족해졌다. 공교육이 무너졌다. 모두 1970~80년대 생물학이 정치인과 경제학자, 언론인에게 이용되고, 신자유주의가 퍼져나가면서 일어난 일이다.


이후엔 반작용의 시대였다. 탐욕과 이기심을 성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학계는 동물의 공감과 유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세상은 정글에서 에덴동산으로 변했다. 동물학자들은 인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만만한 비유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짠, 이제는 보노보가 선택되었다.






보노보가 다른 어떤 동물보다 평화롭고 배려심 깊은 종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쿠니라는 보노보는 찌르레기가 유리창에 부딪혀 떨어지자, 회복할 때까지 정성껏 돌봐주고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샌디에이고의 보노보 사육장에서도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사육사들이 2미터 높이의 해자를 청소하고 다시 물을 채우려 하자, 카코웨트라는 보노보가 유리창으로 다가와 사육사를 향해 미친 듯이 팔을 흔들며 난리법석을 피웠다. 알고 보니 어린 보노보 여러 마리가 해자에서 놀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히 사육사들은 보노보의 손짓을 이해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녀석은 카코웨트가 직접 끌어올렸다.


모든 사회적 동물은 공감할 수 있다. 자연에는 경쟁뿐만 아니라 공감도 있다. 이미 19세기에 다윈은 고양이의 꾹꾹이를 보며 동물에게 공감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그 결과물이『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이라는 책이다. 참고할 자료가 전무하던 시절, 통찰력만으로 150년 후의 제자들보다 앞서나간 것이다. 책에는 평소에 무서워하던 비비 원숭이에게서 사육사를 지켜준 남아메리카 원숭이의 사례가 실려 있다. 그는 공감과 우정이 동물계에서 보편적인 행동 양식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보노보까지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아직도 동물의 공감능력과 이타심을 의심하는가? 그래도 인간보단 못하지 않냐고? 당신을 위해 몇 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겠다. 동물의 공감능력을 알기 위해 누구보다 공감능력이 없었던 어떤 심리학자들은 옆의 친구에게 전기충격을 주는 버튼을 누르면 먹이가 나오도록 실험을 세팅했다. 그럼 원숭이는 거의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우리가 하찮게 생각했던 쥐들은 좋아하는 초콜릿 칩을 포기하고 동료를 먼저 구출한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동료의 비명소리가 들리면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달려간다. 엄격한 서열 사회에서 살아가는 붉은털원숭이도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서열이 높은 원숭이에게 시달리느라 그들의 몸은 성한 데가 없지만, 정신지체 증상을 보이는 어린 아잘레아만은 모두가 너그럽게 대했다. 손발이 없어 걷지 못하는 짧은꼬리원숭이 모주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오래 살았고, 새끼도 다섯이나 길렀다. 정말로 동물들이 유전자의 자기 복제를 위해 명령을 받는 이기적 존재라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공감은 종의 구분도 넘나 든다. 빈티 주아라는 암컷 고릴라는 세 살짜리 아이가 사육장에 떨어지자, 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등을 토닥여주다가 동물원 직원에게 데려다주었다. 쥐들은 사람이 간질여주면 더 간질여달라고 돌아온다. 리트리버는 주인이 다리를 다치면 똑같이 절뚝거리며 걷는다. 야생의 암컷 뱅골호랑이는 새끼 돼지에게 젖을 먹여준다. 생물학자들은 이를 본능이 오작동한 것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호랑이 입장에선 연약하고 어린 새끼를 돌보고 싶은 포유류의 심리적 충동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 우리는 가끔 보는 동물의 동정심에 감동을 받지만,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을 살고 있었다.


우리의 또 다른 이웃, 권력의 화신이라 생각했던 침팬지는 어떤가. 최초로 수화를 배운 침팬지 워쇼는 자신이 모르는 침팬지가 물에 빠져 비명을 지르자, 두 개의 전기 울타리를 넘어가 낯선 이를 끌어냈다. 워쇼는 수영을 할 줄도 몰랐다. 아른헴의 침팬지들은 메이라는 침팬지가 오랜 산고 끝에 새끼를 출산하자, 서로 부둥켜안으며 기뻐하고 환호하기도 했다. 야생의 침팬지들 역시 부상당한 동료가 뒤처질까 봐 의도적으로 이동 속도를 늦추고, 상처를 핥아주고,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늙은 동료를 위해 열매를 따다 주고, 질질 흘리면서도 손으로 물을 떠다 먹여준다. 마이크라는 수컷 침팬지는 개에게 다리를 물려 절뚝이는 친구를 위해 이틀 동안 새끼를 업고 다니기도 했다. 둘은 혈연관계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인간에게 입양된 침팬지 조니는 말 안 듣는 악동으로 유명했지만, 주인이 흐느끼거나 우는 시늉을 하면 안절부절못하며 얼굴을 만지고 낑낑거리며 위로하려 애썼다.


인간과 공통점도 많다. 그들은 슬랩스틱 영화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가오다 미끄러지면 처음에는 걱정하며 다가오지만, 멀쩡한 걸 확인하면 안도하며 웃는다. 늙은 할머니 침팬지 마마는 연구자가 흑표범 가면을 쓰고 수풀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장난을 치자 기겁을 했지만, 이내 속았다는 걸 알고는 유쾌하게 웃었다. 게다가 침팬지는 다른 침팬지가 하품하는 영상을 보면, 무리 전체가 미친 듯이 하품을 한다. 웃음과 하품은 공감하는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하품은 거의 모든 포유류 동물에게서 관찰되는데, 그만큼 공감이 보편적이라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동물이 하품을 하는 걸 보면 공감이 아니라 본능을 본다.


이제 침팬지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는가? 침팬지가 동료보다 우위에 서기를 열망하고, 계획적으로 이웃들을 학살해 그들의 피를 마시고, 살아있는 원숭이를 내리쳐서 골수를 파먹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악마로 보일 수도 있겠다. 사자가 갓 태어난 새끼 영양을 잡아먹는 건? 어떤 이들은 피가 흐르는 그들의 이빨에서 폭력성을 본다.


나에겐 배고픔이 보인다. 공격성과 포식성은 다르다. 우리가 소와 돼지를 먹으면서 동시에 새끼 돼지를 보고 귀엽다고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감정보다 이성을 앞에 두는 이들은 그걸 모순이라 말한다. 하지만 진짜 모순은 침팬지나 보노보처럼 복잡한 존재를 한 가지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인간 특유의 오만과 편견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침팬지의 권력욕이 강하다고, 그들이 공감능력이 없다거나 전적으로 이기적인 종인건 아니다. 침팬지는 사회적인 동물이다. 그 뜻은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에, 무리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개개의 침팬지들은 남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경쟁하는 동시에 타인에게 공감하고 협력해야 한다. 침팬지는 갈등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서라도 화해를 하려고 한다. 조금 전까지 털을 곤두세우고 송곳니를 드러내던 두 침팬지가 어느 순간 털을 골라주고 입을 맞춘다. 슬픈 일이 있으면 경쟁자에게 달려가 안김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모순되는 듯 보이는가? 전혀 아니다. 사회적 근접성은 경쟁과 갈등을 심화시킨다. 사회적 동물에게 서열과 지위 획득을 위한 다툼과 갈등은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서로에게서 등을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둘은 서로에게 의존하는 존재다. 그들은 함께 먹이를 찾고, 포식자의 존재를 경고하고, 적과 맞서 힘을 합치며, 경쟁하는 동시에 공감한다. 침팬지가 정치적 동물이라는 뜻은 이런 의미이며, 우리는 침팬지와 정확히 같은 점을 공유하고 있다. 홉스는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 권력욕만을 보았겠지만, 다윈이라면 다른 한쪽 눈에서 연민과 동정심을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보노보의 연민과 공감, 이타심을 내면 깊이 품고 태어나는 종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날 뿐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는데도 타인의 빈곤과 불행을 자기 문제처럼 여기며 눈물을 흘리고, 자기 것을 내주고, 부당함에 분노한다. 때로는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위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진다. 만 오천 년 전 털 없는 원숭이가 먹이사슬의 밑바닥에 있던 시절, 부러졌다 다시 붙은 넓적다리뼈 화석이 그 증거다. 부상당한 동료를 포식자로부터 지켜주고 돌봐주었다는 뜻이다. 인간이 악을 타고난다는 믿음은, 부러진 넓적다리뼈 앞에서 힘을 잃는다. 그 넓적다리뼈는 다시 붙어 문명의 시작점을 알릴 수 있었다.


우리는 침팬지보다 더 잔인하고 보노보보다 공감이 뛰어난, 양극성이 가장 심한 유인원이다. 잔혹성과 동정심을 모두 지닌, 야누스의 얼굴을 한 우리는 두 본성이 불안하고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양 극단이 우리의 정치적 입장을 결정한다. 우리는 두 성향 사이에서 혼돈과 딜레마를 느끼며 살아간다. 경쟁과 협력, 이기심과 사회성, 투쟁과 배려처럼 충돌하는 색채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 우리는 자신을 먼저 챙겨야 하는 요구와 남들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처럼 충돌하는 힘이 빚어낸 산물이다. 갈등이 없었다면 화해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정치적 존재라는 것은 그런 의미다. 인간이 이기적인 본성을 숨기고 있다는 판뚜껑 이론은 틀렸다. 이타주의자의 살갗을 할퀴면 침팬지와 보노보의 피가 동시에 흐를 것이다.


다만, 우리는 보노보에게서 한 가지 교훈을 얻는다.


공감은 길러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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