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주의자의 살갗을 할퀴어 위선자의 피가 흐르게 하라
1976년, 유난히 따듯했던 겨울날, 루이트라는 침팬지가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리고 고환까지 뜯겨나간 채 발견되었다. 루이트는 재빨리 수술대에 올라가 치료를 받았지만, 출혈이 너무 심각했다. 찢긴 온몸을 봉합하기 위해 수백 바늘을 꿰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뜯긴 고환은 짚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꽉 쥐어짰군요." 수의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루이트는 한때 무리의 리더였다. 그는 권력의 찬탈자이기도 했고, 다시 권좌에서 쫓겨난 이인자이기도 했다.
이에론이라는 늙고 교활한 지도자를 몰아내고 왕좌에 올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젊고 혈기왕성한 애송이 침팬지 니키에게 권력을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루이트는 힘과 지혜 면에서 전성기에 이른, 전도유망한 수컷 침팬지였다. 1대 1 싸움 역시 적수가 없었고, 인기도 가장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루이트는 두 경쟁자의 집중 견제 대상이었다. 물론 루이트 역시 동맹을 맺는 데 최선을 다했고, 잠깐씩 일인자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니키가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늙은 여우 이에론의 손가락을 깨무는 오판을 저질렀고, 즉시 동맹이 깨진 것이다. 눈치 빠른 루이트는 그 틈을 타 하루 만에 왕좌를 탈환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위협을 느낀 두 녀석이 모두가 잠든 새벽을 틈타 루이트를 습격했다. 힘이 센 니키가 루이트의 팔을 꽉 붙잡고, 이에론이 공격을 담당했다. 결국 십수 년 동안 이뤄진 루이트와 니키, 이에론의 삼각관계는 한쪽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루이트가 피투성이가 된 채 철창에 쓰러져 있던 그날, 아른헴의 침팬지 숙소는 소름 끼칠 정도로 적막했다. 침팬지들은 처음으로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세계적인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이 침팬지의 일상을 관찰하다가 얻은 슬픈 교훈이다. 당시 풋내기 학자였던 드 발은 침팬지가 맹목적일 정도로 권력을 추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이트와 니키, 이에론 뿐만이 아니다. 다른 침팬지들도 암수를 막론하고 서열을 높이기 위해 매일 최선을 다한다. 어중간한 지위를 가진 이들은 직접 권력 투쟁의 최전선에 나서기보다는 어느 쪽에 붙을지 간을 보는데 집중한다.
흔히 동물 세계에서의 서열은 큰 체격과 뛰어난 싸움 실력, 무자비한 폭력성으로 얻어지는 듯 묘사된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이왕이면 몸집이 더 큰 놈이 싸움을 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치명적인 발톱과 이빨을 가지고 있는 건 상대도 마찬가지다. 일단 싸움이 일어나면 자신도 다칠 각오를 해야 하는데, 야생에서는 사소한 상처도 치명적일 수 있다. 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털 없는 원숭이처럼 깔끔하게 라이트훅 카운터로 상대를 기절시킬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싸움은 애초에 안 하는 게 최선이다.
그런 이유로 동물들은 누가 더 싸움을 더 잘하고 겁이 없는지 진단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침팬지는 털을 부풀리거나 이빨을 드러내며 서로를 위협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고릴라는 모든 인간 수컷들이 부러워하는 거대한 대흉근을 힘차게 두드린다. 이런 과시 행동은 매우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싸움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상체가 크고 두꺼울수록 더 웅장하고 낮은 소리가 나기 때문에, 드럼 소리가 작은 녀석은 승산이 없는 싸움을 포기할 수 있다. 승리한 개체는 맛있는 먹이나 안전한 쉼터, 매력적인 짝에 우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티켓을 얻는다. 생물학자들은 이를 '자원 보유 잠재력'이라 하는데, 사회적 위계질서에서 앞서나가려는 궁극적인 목표에 해당한다.
붉은털원숭이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자들이 서로를 모르는 붉은털원숭이 두 마리를 좁은 우리에 가둬 놓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했다. 붉은털원숭이는 대개 낯선 이방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좁은 공간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둘은 이내 팽팽한 긴장 관계에 돌입했다. 숲 속에서 만났다면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거나, 싸움을 말리는 친구가 있어 "야, 말리지 마"라고 말하며 허세를 부릴 수도 있었겠지만, 좁은 철창에 갇힌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난다. 급소는 공격하지 않기, 복수하지 않기, 승패가 결정 나면 더 이상 떄리지 않기 같은 원숭이 나름만의 규칙도 지켜지지 않는다. 이때 선택지는 전투 아니면 복종 두 가지밖에 없다.
악랄한 심리학자에 의해 선택지를 강요받은 두 붉은털원숭이는 어떻게든 싸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무관심한 척하고, 구석에 몸을 파묻은 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원숭이 세계에서 상대를 빤히 쳐다보는 건 위협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허공이나 땅을 쳐다보거나 철창 밖에 있는 가상의 지점을 뚫어지게 응시하기도 한다. 마치 바나나가 아른거리는 듯 말이다.
문제는 순서다. 사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 둘 다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먼저 이빨을 드러내고 털을 골라주기에는 자존심이 상한다. 그 순간 내가 너보다 밑이라는 걸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마음속으로는 상대가 어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주기를, 친하게 지내자는 말을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일단은 쿨한 척 연기를 시작한다. 관계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눈치 싸움, 즉 정치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시간이 충분히 흐르고 나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녀석이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다. 첫 단계는 이빨을 활짝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털 없는 원숭이들이 보기에 이런 행동은 날카로운 이빨로 상대를 위협하는 듯 보이겠지만, 털 있는 원숭이들의 세계에선 머리를 긁적이며 화해하자는 어색한 미소를 의미한다. 이 이빨로 너를 물지 않겠다는 순종적인 의미인데, 영장류학자들은 이런 신호를 ‘겁먹은 웃음’이라 부른다. 이후엔 털을 골라주거나 벼룩을 잡아주는 단계로 돌입한다. 상대의 몸을 마사지해 주는 것은 긴장을 누그러트리기에 영장류가 애용하는 방법이다. 털 다듬기가 시작되면 두 원숭이는 서로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안심하며, 이내 평온한 상태가 된다.
인간에게도 이런 행동을 볼 수 있을까? 붉은털원숭이에게 한 것처럼 죄 없는 사람을 철창에 가둬놓을 수는 없다. 그런 심리학자는 고소를 당하게 될 것이고, 자신이 대신 실험 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유사한 상황이 우리에게 매일 일어난다. 바로 엘리베이터 안이다.
사람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치 붉은털원숭이 두 마리가 우리에 갇힌 것처럼 행동한다. 낯선 사람이 타면 괜히 어색하고 불안한 기분이 든다. 불안을 감추기 위해 괜히 천장이나 바닥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닫힘 버튼이 고장 난 듯 강박적으로 누르거나, 최대한 구석으로 가 몸을 파묻는다. 어떻게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 핸드폰을 괜스레 만지며 상대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리려 최선을 다한다.
우리가 붉은털원숭이처럼 행동하는 이유는 뭘까. 두 원시인들이 토끼를 쫓다가 좁고 어두운 동굴에서 서로 마주쳤다고 생각해 보자. 한쪽은 너도밤나무로 만든 튼튼한 몽둥이를, 다른 한쪽은 부족 최고의 장인이 만든 날카로운 뗀석기 창을 들고 있다. 둘은 서로를 모르는 데도 무기를 내려놓고 아내가 점심으로 챙겨준 육포를 사이좋게 나눠먹을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선조들은 대부분 싸움을 택했다. 화석에 남아있는 깨진 머리뼈와 옆구리에 박힌 창 조각이 과거를 증명한다.
물론 지금은 처음 보는 사람이 주머니에서 날카롭게 벼려진 돌을 꺼내 나를 찌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진화된 마음은 여전히 남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를 '사바나 원칙'이라 하는데, 우리가 사바나 초원에서 살아가던 수렵채집민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실제 엘리베이터 안에서 살인이나 폭행이 일어날 확률은 통계적으로 0%에 가깝지만, 엘리베이터처럼 좁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긴장되고 불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엘리베이터뿐만이 아니다. 친구와 가족 관계는 물론이고, 국회의사당이나 투표장에서도 지배와 복종과 관련된 행동이 자동적이고 본능적인 무언가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에겐 진화된 정치 심리가 있으며, 구석기시대의 마음은 여전히 무의식의 심연에서 우리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학생은 학점에 피해를 볼까 봐 교수 앞에서 최대한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교수는 자기도 모르게 학생의 태도와 예절을 눈여겨본다. 직급이 낮은 직원은 상급자에게 먼저 밝고 명랑하게 인사하고, 상사는 퉁명스럽게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친구 사이에서도 싸움을 잘하고 키가 큰 친구는 은근한 서열 우위를 누린다. 가족 관계에서도 형이나 누나는 동생에게 물 심부름을 시키고, 동생은 툴툴대면서도 한대 얻어맞지 않게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군대에서는 오직 계급과 명령에 대한 복종만이 유일한 작동 원리가 된다. 사담 후세인은 아랫사람이 자신의 겨드랑이에 키스를 하게 한다. 아마 권력의 냄새를 맡아보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냉정하게 우리의 사회적 행동을 살펴본다면, 지배와 복종 관계가 어디에나 있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써 눈을 돌린다. 1922년 노르웨이의 셸데루프 예배라는 소년이 자신이 키우는 닭들에게서 서로를 쪼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발견한 이후로, 포유류 동물에게 위계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생물학자는 없다. 쪼는 순위는 이제 서열이라는 용어로 사용된다. 하지만 학자들은 동물에겐 지배적인 행동이나 서열이라는 말을 쓰는 데 주저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지배와 복종 행동에 대해선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사회심리학 개론서에도 권력과 지배성에 대한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정치인이나 CEO 역시 말 뿐인 책임과 희생을 이야기할 뿐이다.
침팬지는 솔직하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욕을 숨기지 않으며, 남들을 분쟁에 끌어들이는 패거리 정치를 한다. 동물원에 가보면 열 마리가 넘는 침팬지들이 서로 위협하고 쫓거나 고음의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싸움 실력은 중요하지 않다. 최대한 많은 동맹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다. 침팬지는 항상 주변 동료들을 감시와 의혹의 눈빛으로 보면서 어떻게 해야 사회적 사다리를 더 높이 오를지 고민하며 살아간다.
침팬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침팬지와 인간의 DNA는 1.6%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우리와 갈라진 시간은 고작 600만 년 정도에 불과하며, 해부학적 특징도 거의 비슷하다. 유인원의 사회적ㆍ감정적 삶의 뿌리는 우리와 너무 닮아있기에, 명확한 구분선을 그으려는 시도는 매번 실패해 왔다. 그렇다면 인간 역시 침팬지와 비슷한 수준의 지배욕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메커니즘에 의해 사회가 굴러간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철학자 토마스 홉스 역시 유인원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죽음이 멈추게 할 때까지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성향이다.”
정치철학에서 홉스는 꽤 중요한 인물이다. 사회계약설의 창시자이기 때문이다. 홉스는 문명 이전의 역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고 보았다. 사회는 등 뒤에서 칼이 꽂히기 싫은 사람들의 불안정한 계약으로 이루어진다. 야만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폭력성을 억누른다. 그게 바로 사회고, 정부라는 존재다. 정치란 내면의 야수를 억누르는 과정이다. 홉스주의자들은 그렇게 보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마 같은 존재라고.
다윈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부터 적자생존의 세계관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도태라는 개념은 너무 매력적이었다. 생물학자들은 자연을 서로 먹고 먹히는 야만적인 투쟁이 벌어지는 곳으로 보았다. 진화론자에게 인간이란 이기적인 유전자의 명령을 받는 존재에 불과했다. 동물학자들은 동물을 생존을 위해 본능적인 행동을 반복하는 기계로 보았다. 침팬지가 서로를 죽이고 그 피를 마시는 모습이 보고되었다. 레이건과 대처가 당선되었다. 탐욕과 이기심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시장 경제가 확대되었다. 인간의 도덕은 위선이며, 그 껍데기를 벗기면 지배하고 빼앗으려는 본성이 나타날 것이라는 '판뚜껑 이론(Veeneer Theory)'이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이를 생물학자 마이클 기셀린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타주의자의 살갗을 할퀴어 위선자의 피가 흐르는 것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