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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마마의 마지막 포옹

by 교양이



2016년, 두 늙은 호미니드가 포옹을 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방송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서로 다른 종끼리의 재회였기 때문이다. 백발의 늙은 생물학자 얀 판 호프는 40년 전부터 알았던 늙은 침팬지 마마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단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찾아갔다. 마마의 거처에 들어선 얀이 먼저 꿀꿀거리는 소리를 내며 안심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선잠에 든 마마가 옛 친구를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자 그녀의 얼굴이 황홀경으로 가득 찼다. 마마는 평소보다 더 입술을 뒤집으며 환한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고음의 꺅꺅거리는 소리를 내며 얀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낑낑거리는 새끼를 달랠 때 하는 제스처였다. 마마의 영역을 침범하며 얀이 느꼈을 두려움을 이해하고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두 호미니드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영상은 공중파 방송을 타고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하는 동시에 충격에 빠뜨렸다. 침팬지가 그리운 이를 만났을 때 껴안고 기뻐하는 모습이 사람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마마는 휘몰아치는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암컷 침팬지치곤 유난히 큰 체격과 호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동맹을 결성하는 능력 또한 뛰어났기 때문이다. 전성기 시절의 마마가 화가 났을 때는 커다란 금속 문을 쾅하고 발로 세게 걷어차며 자신의 분노를 드러냈다. 그럴 때는 누구도 마마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은 피할 수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다 자란 수컷 침팬지에게 지도자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마마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쪽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법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가끔 갈등이 극에 달해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모두가 마마에게 달려가 손을 내밀며 중재를 요청하곤 했다. 두 녀석은 마마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털 고르기를 해주는데, 눈치 좋은 마마가 이쯤 됐다 싶으면 슬쩍 빠진다. 그럼 조금 전까지 털을 부풀리며 서로를 위협하던 두 침팬지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포옹과 털 고르기를 해준다. 화해가 끝나면 둘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한때 카리스마가 넘치던 여장부 마마가 이제 모두가 의지하는 든든하고 인자한 할머니 침팬지로 변모한 것이다.


마마의 삶을 돌이켜 보면,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 권력의 의미에 다시 한번 고민해 보게 된다. 평범한 소시민에게 권력은 항상 어둡고 착취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아나키스트라고 불렀던 무정부주의자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이 보기에 권력과 위계질서란 자유롭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았을 인간을 억압하는 악마 같은 존재였다. 낭만주의자들은 국가만 사라진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돌아올 거라 믿었다.


침팬지와 인간의 공통점을 알고 있는 나로선 그런 믿음을 회의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완전한 평화와 평등, 순수한 자유와 사랑이 존재하는 유토피아는 결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주류 사회에 저항했던 학생 운동 세대 역시 평등주의와 관용을 설파하는 동시에 높은 서열에 오르기 위해 잠재적 도전자를 조롱하고 견제하며 침팬지처럼 행동했다. 급진적 평등주의자들을 한 방에 몰아넣어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 안에서 질투와 배신,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치 드라마를 보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진화의 시간에 새겨진 지위에 대한 갈망은 쉽사리 없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얀은 생명이 꺼져가던 마마의 눈망울에서 여전히 내려놓지 못한 지배욕을 보았을까? 그럴 리 없다. 아른헴의 침팬지 국민들이 지도자를 뽑을 때 가장 눈여겨보는 점은 커다란 몸집과 호전적인 성격이 아니다. 책임과 희생정신이다. 루이트가 죽고 난 후, 힘만 믿고 공포정치를 펼치던 젊은 니키는 무리에서 인기가 없었다. 폭군 니키는 공식적인 일인자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무리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자주 집단의 공격으로부터 도망 다녀야 했다. 대신 노련한 정치 9단 이에론이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했다. 이에론은 다툼이 있으면 훌륭한 중재자 역할을 했다. 지위가 낮은 침팬지가 괴롭힘 당하는 것도 막아주었다. 그래서인지 이에론은 암컷들에게 특히 인기가 좋았고, 웅얼거리는 복종 인사를 가장 많이 받았다. 자존심이 짓밟힌 니키는 자기도 중요하다는 듯 과시 행동을 했다. 물론 큰 효과는 없었다.


오늘날 알파 메일(Alpha Male)이란 말이 사용되는 걸 보면 우려스럽다. 잘생긴 외모와 큰 키, 높은 지위와 자신감이 넘치는 바람둥이 남성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파 수컷은 1940년대 스위스 동물행동학자 루돌프 솅켈이 늑대를 연구하며 유래한 동물행동학 용어일 뿐이다. 영장류학자 드 발 역시『침팬지 폴리틱스』에서 알파 침팬지라는 말을 중립적인 의미에서 사용했다. 하지만 워싱턴의 정치인들은 책을 돌려보면서 자신들의 뒤틀린 권력욕을 정당화했다. 동기 부여 강사들은 돈 냄새를 맡았다. 그들은 침팬지처럼 쟁취하고 빼앗으라고, 정상에 서서 모두를 내려보라고 인간 수컷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침팬지 세계의 알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그들은 수많은 갈등을 통제하고 무리를 안정적으로 이끌어야 하는 중책을 맡는다. 지도자가 없거나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면 침팬지 무리는 급속도로 붕괴된다. 공동체의 사회적 긴장이 급속도로 높아지고, 목이나 급소를 물어뜯는 치명적인 폭력 사태가 증가한다. 털 고르기와 화해도 줄어든다. 그래서 알파 메일, 또는 알파 피메일은 다른 어떤 암컷 침팬지보다도 공감과 위로 행동을 많이 하고 약자의 편을 들면서 소외되는 이가 없는지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래서 알파 침팬지는 가장 지위가 낮은 개체만큼이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우리는 동물 사회에서 단순히 크고 강한 개체가 서열의 꼭대기에 오른다고 짐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의 리더는 무리를 이끌고 보호하며,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임무를 맡는다. 누구보다 권력욕이 강한 침팬지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얻는 수단과 목적에는 지배만 있는 게 아니다. 책임과 희생정신도 있다. 지배성과 권력은 다르다. 마마와 이에론 역시 다른 침팬지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기 위해 권력을 쥔 것이 아니다. 무리의 질서와 안정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선택했던 것이다.


훌륭한 침팬지 지도자가 왕좌에서 내려온 후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우아하게 늙어갈 뿐만 아니라, 마마처럼 막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피니어스라는 수컷 침팬지도 정상에서 내려온 후엔 서열 3위에 만족하면서 살아갔는데, 어린 침팬지들과 놀아주고 분쟁을 대신 해결해 줘서 모두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침팬지의 사회는 강한 견제와 균형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 침팬지의 마음속에도 헌법은 존재한다. 무리의 일인자라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점이 많다. 한 번은 사육사들이 로스예라는 어린 침팬지를 다른 침팬지들에게 소개한 적이 있었다. 모두들 반기며 서로 안아보기 위해 안달이었지만, 우두머리 니키만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니키에게 두들겨 맞던 나머지 세 마리가 힘을 합쳐 폭군의 앞을 가로막고 털을 부풀리며 으르렁거렸다. 니키는 갑자기 친절한 태도로 돌변했고, 어색한 웃음을 짓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보노보와 침팬지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보노보의 정치 제도는 침팬지에 비해 유연성이 떨어진다. 평화와 공감이 넘치는 인간의 또 다른 사촌에게는 갈등과 다툼이 자주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화해를 할 일도, 동맹을 맺거나 배신할 일도 없다. 침팬지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동맹을 맺고 그 속에서 치열한 눈치 싸움을 하며 살아가는 것과 달리, 보노보의 사회는 우정과 공감 수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지 못한다. 권력이 뒤집히는 기회주의적인 동맹도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보노보를 평등주의자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그보다는 인내심이 강하거나, 순박하고 친절한 이웃에 가깝다고 보는 게 맞겠다. 그들에게 서열이란 나이가 들며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세상의 섭리와 같다. 그렇기에 보노보의 사회는 정체되어 있으며, 발전의 여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반대로 침팬지는 공격성과 권력욕이 강한 만큼, 지위는 항상 도전을 받는 동시에 모호하게 뒤섞인다. 지도자든 평민이든 권력 역학에 민감하지 않은 개체는 살아남을 수 없다. 권력의 시계추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도전받는다. 사회는 민감하고 역동적이다. 침팬지의 높은 지능이 그 결과물이다. 같은 연령대의 침팬지와 어린이를 비교해 보면, 기억력 테스트에서 침팬지가 훨씬 좋은 점수를 받는다. 영국의 암기력 챔피언도 아유무라는 침팬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누가 누구와 동맹을 맺었고, 상대가 나를 배신한다면 어떻게 대응할지 옳은 판단을 내리려면 뛰어난 사회적 기억력과 추론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판단력이 뛰어난 두뇌와 큰 뇌, 높은 사회성을 발달시킨 셈인데, 이를 사회적 지능 가설이라 한다. 물론 이 분야의 일인자는 침팬지가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 바로 우리다.


그렇기에 침팬지보다 더 지배 성향이 더 강하고 공격적인 호모 사피엔스에게서 민주주의의 원형적 심리가 나타난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불평등이 평등을 낳은 것이다. 우리에게도 니키와 마마가 존재했다. 그들의 선택에 따라 우리의 생존은 중요한 갈림길에 섰을 것이고,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하는 선택압에 직면했을 것이다. 결국 호모 사피엔스는 권력에 복종하는 심리와 저항하는 심리를 동시에 발전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조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이라 부른 것은 옳았다. 우리는 정치적인 동물이다. 자유, 평등, 박애는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탄생했다.


빛이 있는 곳엔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서로 뭉쳐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과정에서 지배와 억압이라는 그림자가 생겨났다. 협력이 있는 곳엔 경쟁이 있다. 그 안에선 반드시 권력의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존재도 생겨난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들은 권력의 화신들이다. 그들의 타고난 성격과 호르몬 체계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 우리는 그들에게 권력을 나눠주거나 빼앗기고, 이용하거나 속으면서 살아왔다. 그 모든 과정이 우리의 DNA에 새겨져 있다. 우리에겐 언제든지 폭군을 끌어내릴 수 있는 정치적 마음이 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쿵족(!Kung People)의 어린아이까지 독재자의 몸에 화살을 평등하게 박아 넣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우리 안에 침팬지와 보노보가 함께 살지 않았다면, 자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는 침팬지의 서열과 경쟁만을 보려 하고, 진보주의자는 보노보에게서 공감과 배려만을 보려 한다. 그리고 진실이 오직 자기편에게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침팬지와 보노보를 정확히 반씩 빼닮은 종이다. 그 점이 정치를 더욱 복잡하고 풍부하게 하며,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그리고 양 극단을 왔다 갔다 하는 중도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들어 낸다. 덕분에 우리는 항상 정치에 혼란과 불만을 느끼며 살 운명이지만, 오히려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서로에게서 더 좋은 점을 볼 수 있다면, 침팬지와 보노보가 서로 털을 골라주고 입을 맞추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위계질서와 권력은 선하지도 나쁘지도 않다. 쪼는 순위는 협력과 공동체가 생겨나는 데 기여할 수도 있고, 우리를 착취하고 죽일 수도 있다. 불이 고기를 익힐 수도, 사람을 태울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겐 개미처럼 페로몬 체계가 없기 때문에, 현대의 대규모 사회에서 협력하고 갈등을 조율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적 위계뿐이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가 일부 희생된다. 그렇다고 보노보의 공감과 배려심이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침팬지와 보노보의 혼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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