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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쿨투랄리스(Homo Culturalis)

문화적 인간

by 교양이



브라질에 있는 세라다카피바라 국립공원 숲 속을 거닐다 보면, 무언가 쾅쾅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마지막 수렵채집민들이 내는 소리일까? 틀렸다. 꼬리감는원숭이가 직접 제작한 석기로 기름야자를 내리치는 소리다. 꼬리감는원숭이는 카푸친형제회의 수도사들이 후드를 벗은 모습을 닮았다 해서 카푸친원숭이라고도 부른다. 크기는 고양이만 하지만 뇌는 침팬지만큼 크고, 수명도 아주 길다. 뛰어난 지능과 풍부한 감정을 지니고 있어 실험용과 애완용으로 인기가 많으며, 거리의 오르간 연주자들이 많이 길러 오르골 원숭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인류학자들이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그 능력이 학습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미 3천 년 전부터 카푸친이 석기시대에 진입했다고 보고 있다. 만약 냉동캡슐에서 잠들었다가 수백만 년 후 깨어난다면 어떤 광경을 보게 될까. 아마 카푸친 몽키엔스라 부르는 신인류가 비행기를 몰고, 호모 사피엔스와의 체스 대결에서 승리하고, 그들과 우리가 지구의 마지막 남은 자원을 걸고 전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람들은 동물이 우리와 같은 출발선에 서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도 그랬다. 플라톤은 인간을 두 발로 걸어 다니는 털 없는 동물로 정의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털을 뽑은 닭을 들고 와서는 “여기 플라톤이 말한 인간이 있다”라고 외쳤다. 난감해진 플라톤은 ‘넓적한 손톱과 발톱을 가진’이라는 주석을 황급히 추가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침팬지가 브라질리언 왁싱을 할 수 있다는 치명적인 명제의 결함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플라톤과 디오게네스, 그리고 인간


처음에는 직립보행으로 시작해 감정, 지능, 언어, 자기 인식, 도구 사용능력까지... 동물과 거리를 두려는 플라톤주의자들의 노력은 계속 업데이트되어야만 했다. 동물들이 매번 인간이 그어 놓은 루비콘 강을 넘어 뒤따라왔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인간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문화를 내세웠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문화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다."라고 하며 절박한 마음으로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마지막 방둑의 틈새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고, 발 밑의 물이 흘러넘치고 있다. 코끼리나 돌고래처럼 지능이 높은 동물부터 시작해 카푸친원숭이, 침팬지, 심지어 문어까지 흐느적거리며 노아의 방주에 올라탄 것이다.


불안해진 인간들은 어린 침팬지를 훈련시켜 다과회를 열었다. 차를 좋아하던 영국인들에게 침팬지의 티 타임(Tea Time)은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침팬지들이 그릇과 컵, 스푼과 찻주전자를 너무 완벽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표정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AI 로봇을 보고 느끼는 기시감을 '불쾌한 골짜기'라고 부르는데, 그 첫 시작은 유인원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수군의 옷을 입은 수컷 침팬지와 드레스를 입은 암컷 오랑우탄을 보고 "고통스럽고 불쾌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 역시 런던 동물원에서 유인원을 보았는데, 한 가지 점만 빼고 여왕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다윈은 인간의 우월성을 확신하는 사람은 모두 유인원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영장류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침팬지들을 다시 훈련시킬 수밖에 없었다. 차를 엎지르고, 사육사가 안 보는 사이 그릇을 집어던지고, 찻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마시고... 난장판이 된 공연을 보고서야 영국인들은 웃으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왜 동물을 바보로 만들어야만 안심하는 걸까. 어쩌면 침팬지에게서 자신을 보는 게 두려워서가 아닐까? 정말로 문화가 인간이 자연에 맞서 승리한 결과라면, 오직 우리만이 문화를 가지고 있는 거라면, 문화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왜 동물들에게서 문화적으로 보이는 행동, 심지어 유행이라는 것까지 발견되는 것일까? 왜 특정 무리의 일본원숭이들만이 이미 씻겨진 고구마를 물에 씻어먹고, 아무 이유 없이 돌을 비벼대는 것일까? 침팬지들 사이에서 귀에 지푸라기를 꽂는 최신 패션이 유행하는 이유는 뭘까?


[크기변환]다운로드.png 원숭이의 고구마 씻어먹기 문화. 이제는 바닷물에서 씻어 짭짤한 고구마를 즐기고 있다.


우리는 문화를 세련된 취미, 지성, 특정 가치관이나 도덕적 원칙 등 좁은 의미로 정의해서 어떻게든 침팬지나 카푸친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생물학의 시각에서 보면, 문화란 기술적인 수준이나 가치 체계가 아니다. 유전에 의존하지 않는 행동 전달의 한 형태이다. 침팬지가 터번을 쓰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그들이 문화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단정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정보의 전달이나 방식 면에서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공감할 수 있다면 당연히 문화도 존재하지 않을까?


문화의 기원은 공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진화의 연속선상에 있다. 공감은 서로의 신체와 마음을 이어주며, 두 존재를 하나로 만든다. 즉, 모방을 낳는다. 모방을 통해 이전 세대의 지식과 경험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이를 문화적 유전자, 밈(Meme)이라 한다. 그렇다면 문화는 자연 속에 널리 존재하는, 흔한 것이 된다. 학습과 경험이 없으면 동물은 야생에서 생존할 수 없다. 본능은 모방을 통한 학습이 있어야만 의미를 가진다. 새들은 날개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어미 새가 나는 모습을 보고 배우지 못하면 영원히 날지 못한다. 어미에게서 사냥 기술을 배우지 못한 사자 새끼는 사냥에 성공할 수 없다. 인간의 품 속에서 살다가 자연에 돌아간 원숭이들은 굶어 죽는 경우가 많다. 특정 환경에 적응한 어른의 역할 모델을 보고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 아이들도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사랑 표현을 듣고 옹알이를 통해 말하기를 연습하지 못하면 언어능력을 잃어버린다. 동물에게 인간과 같은 형태의 상징적 언어나 기호는 없지만, 새로운 기술, 음식 선호, 의사소통 능력 등 생존에 필수적인 능력은 그들 나름만의 방식을 통해 연장자에게서 어린 개체로 전달된다. 우리처럼 그들 역시 배우고 따라 하려는 무의식적인 본능이 있다. 그러니 생태 환경이 다른 집단마다 행동의 차이가 나타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문화의 본질은 생각보다 대단한 게 아니다.


공감은 모방을 만드는 마중물이다. 타인의 행동을 따라 하려는 성향은 본능적이고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스웨덴 심리학자 울프 딤베리가 1990년대 초에 쓴 논문에 그 해답이 있다. 참가자들이 인식할 수 없는 속도로 사람 얼굴을 보여주자, 그들의 심리 상태가 영향을 받았다. 행복한 표정을 본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지고, 화난 표정을 본 사람들은 똑같이 기분이 나빠진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을 강연장에 세워놓아도 마찬가지다. 청중들의 침에서는 연설자와 동일한 수준의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온다. 반면 청산유수인 사람을 앞에 세워놓으면 청중의 심리상태도 편안해진다.


1930년대엔 한 심리학자 부부가 아들과 침팬지를 함께 기른 적이 있다. 하지만 구아라는 침팬지가 목구멍 깊은 곳에서 내는 '우후, 우후!' 소리를 아이가 따라 하는 것을 보고, 서둘러 실험을 종료시켜야 했다. 물론 구아도 뒤처지지 않았다. 인간 부모가 타자를 치는 모습을 흉내 낸 것이다. 유인원을 뜻하는 'ape'가 동사로 '모방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유인원들은 따라쟁이들이다. 그들은 흉내의 달인이기에, 문화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물론 인간과 침팬지의 모방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어린 침팬지와 아이를 대상으로 한 문제 해결 실험에서, 침팬지가 훨씬 좋은 성적을 낸 적이 있다. 침팬지는 목표와 방법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깊이 고민하고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했다. 선택적 모방을 한 것이다. 반면 아이들은 쓸모없는 것까지 어른의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 했다. 당황한 심리학자들은 곧바로 '과잉 모방'이 실제로는 인간 성공의 기원이자 문화의 뿌리라는 합리화를 시작했다. 최선의 전략은 '토 달지 않고 그대로 따라 하기'라는 것이다. 다행히 동물학자들은 플라톤을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모든 걸 흉내 낸다. 조상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건너뛸 수 있기 때문이다. 북유럽 교육자들은 아이의 개성을 길러주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말하겠지만,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로 보인다. 교육의 목적 중 하나는 아이들에게 문화적 정체성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학교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한국사를 가르칠 이유가 없다. 문제는, 나쁜 쪽으로도 악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교과서에 나오는 수학 문제처럼 말이다.


이스라엘인 다섯 명이 있다. 세 명을 죽이고 나면 몇 명을 더 죽여야 하는가?





문화는 찬란한 문명을 꽃피울 수도, 서로를 증오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독일 동물행동학자 불프 쉬펜회펠이 에이포-파푸아족 촌장 두 명과 비행기를 탄 적이 있었다. 활주로를 건설하는 데 도와준 보답으로 비행 체험을 시켜주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처음 타는 비행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문 한쪽을 열어달라고 했다. 불프 박사는 그들이 중요 부위 가리개 말고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으니 추울 것이라 말했다. 두 족장은 괜찮다고 하며, 대신 돌을 몇 개 가지고 타도 되냐고 물었다. 이유를 묻자, 적대 부족의 위를 지나면 돌을 떨어트리려 한다고 대답했다.


우리 편과 상대편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아주 쉽게 촉발될 수 있다. 사람들에게 파란색과 초록색 두 가지 색깔의 볼펜과 메모장을 나누어 주고 발표를 시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은 같은 색깔의 펜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 좋은 점수를 주었다. '우리 대 그들' 사고방식은 아주 강력해서,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고 명백하게 증명된 심리적 현상이다.


문화의 뿌리를 찾기 위해선 아주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 시작은 인류의 도약에 있었다. 농업이 시작되고 식량 채집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문제가 생겼다. 누가 자신의 부족인지 구별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우리가 얼굴을 대면하며 지내는 친밀한 개인의 수는 아무리 많아도 150명을 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를 던바의 수(Dunbar’s number)라 한다. 우리의 인싸력에는 한계가 있는 셈이다.


내집단 구성원을 알아보지 못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낯선 상대가 최근까지 전쟁을 벌이던 라이벌 부족이라면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게다가 부족의 규모가 커지면 익명성이 커지고, 무임승차자가 마음껏 날뛸 수 있는 무대가 생긴다. 이미 부족은 혈연관계를 넘어서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그럴 때 공동 기반이 없는 개인들은 어떻게 협력과 결집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때 선택된 해결책이 유사한 행동과 관습, 제스처나 언어를 통해 같은 일원임을 구별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영장류의 흉내 내는 성향, 즉 모방이 큰 역할을 발휘했다. 그렇게 최초의 문화가 탄생했다. 종교나 제도, 전통과 도덕적 관습은 문화의 창조자이자 결과물이었다. 개인들을 하나로 가장 잘 묶는 집단이 가장 강한 집단이 되었고, 전쟁과 문화적 흡수를 통해 덩치를 키워나갔다. 최종적으로, 국가와 문명, 제국이 되었다. 문화가 인간을 성공으로 이끈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공감 덕분에 가능했다. 문화적 기반을 공유하면 심리적 안정감과 소속감, 유대감을 느끼고 집단에 충성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닥불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의례처럼, 현대인도 촛불에 불을 피우고 노래를 따라 부른다. 월드컵이 열리면 얼굴에 국기를 칠하고, 구호를 외치고, 파도타기를 한다. 해외에 나간 한국인이 부끄러운 짓을 하면 내가 한 것처럼 부끄러움을 느낀다. 관객 중 하나가 웃기 시작하면 모두가 따라 웃고,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면 졸던 청중조차 박수를 친다.


우리의 뇌는 주위 사람들의 신념과 가치를 받아들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개인적 신념을 담당하는 신경 체계는 타인의 신념에 영향을 받는 부위와 데칼코마니처럼 중첩되어 있다. 덕분에 우리는 다수의 압력을 받으면 쉽게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고 군중 속으로 뛰어든다. 한 실험에서는 정답에 더 많은 상금을 걸수록 자신의 판단보다는 문화적 배경과 주변의 압력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명확한 답이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의 오답을 따라가는 것도 관찰되었다.


캡처.jpg 피실험자들은 1번이 왼쪽 선과 가장 가깝다고 대답했다.


이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거나 불확실한 상황일 때, 문화가 우리의 경험과 사고를 지배하는 경향이 있음을 의미한다. 문화란 뇌의 펌웨어 업데이트다. 자연선택이란 개발자는 우리가 모방을 통해 문화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하지만 한 가지 제한사항이 있다. 다수의 의견을 따르라는 진화론적 명령이다. 그렇기에 문화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도 있고, 집단 학살을 초래하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문화가 주변 환경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휘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증오나 폭력 역시 학습되고 강화되며 퍼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아른헴 동물원에서도 그랬다. 루이트가 죽은 후, 무리의 폭력적 행동이 급격히 늘어났다. 테펠이라는 침팬지는 두 번이나 댄디의 음낭을 물어뜯으려 했는데, 침팬지에게도 선을 넘는 공격이었다. 한 암컷은 송곳니에 배가 뚫렸고, 다른 수컷들은 매 싸움마다 손가락과 발가락 끝을 잃었다. 모두 루이트가 당한 것과 똑같은 형태였고, 그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폭력이었다. 무리의 이인자가 살해되며, 침팬지 국민들도 폭력적 문화에 물든 것이다.


정치적 문화도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보수와 진보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뀐다. 정치는 우리 문화가 어디로 향할지 결정하는, 고차원의 의사결정 단위체다. 정치가 심리적ㆍ사회적 구조를 바꾸면, 한 번 길이 든 문화의 관성에서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다. 증오할 것인지, 존중할 것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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