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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변실 Dec 10. 2020

9시의 신데렐라

[코로나, 꽃향기, 얼짱]

알바를 마치고 들어선 포장마차,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특유의 신랄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이미 얼짱 취한 듯한 그는 이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안기듯 쓰러지는 그를 부축하자 낯익은 꽃향기가 풍겼다.


"제길..."


나는 가슴 한편에 불안한 예감을 품고 자리에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테이블 위엔 비어버린 접시와 함께 이슬톡톡 3병이 올려져 있었다. 흩뿌려진 케첩만이 그는 좋은 계란말이였음을 증언했다. 마치 살해 현장의 혈흔과도 같았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오늘 밤 관절을 녹여내 번 일당이 녹아내릴게 자명했다.


약속시간을 어긴 건 나지만 고작 30분 새 이슬톡톡을 3병이나, 그것도 안주 한 접시와 같이 비워버린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거기다 그걸 마시고 저렇게 인사불성이라니... 가성비가 나쁘다 해야 할지 가심비가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값을 치를 생각에 술 한잔 하지도 않은 속만 쓰렸다.


애써 분을 삭여보려 해도, 어느덧 다가온 겨울 추위에 코로 나오는 콧김마저 감추지는 못했다. 내 기분을 캐치한 그가 또다시 능글맞게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말어,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 아니겠으?"


맞다. 문제는 당신만 배부르게 먹었다는 거다.


그는 내게 잔을 권한 뒤 마지막 남은 이슬톡톡을 비워냈다. 말투와 하는 행동만 보면 영락없는 아저씨지만, 그는 이제 처음 알바를 시작한 20살짜리 자취생에 불과했다. 똑같이 지방에서 올라와 외로운 서울살이를 하는 처지라 술자리 몇 번을 같이 한 게 이 사달을 불렀다.


졸업도 미룬 채 취준생이라는 백수의 또 다른 이름으로 생활하는 것도 암울한데, 이제 나보다 7살이나 어린 양아치에게 술값을 뜯기고 있으니 소주가 절로 땡겼다.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하자 앞의 그 애저씨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얼짱 소리 좀 들어보게 생긴 앳된 얼굴에 울화만 더 치밀어 올랐다.


"뭘 봐"


괜히 무의미한 시비를 걸어봤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좋지?"


"뭐가?"


"코로나 때문에 챙기는 강제 워라벨 말야. 좋은 직장 있는 사람들은 몇 년 전부터 52시간 근무제니, 뭐니 들떴지만, 우리는 허구한 날 잔업이었잖아" 


고작 달달한 이슬톡톡에 취해 내뱉는 실없는 헛소리 같았지만, 소리 안 감정까지 달진 않았다. 말하자면 말과 술이 따로 노는 환장판에 가까웠다.


어쨋든 막 성인이 된 어린 친구가 푹 삭힌 무게를 그때서야 어렴풋이 매만졌다. 원래 애가 아저씨가 될 때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애저씨는 후천적이란 소리다.


한참을 껄껄 웃어젖히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9시 안에 뭘하라고...집합금지인지 궁합금지인지도 모를 것. 아, 신데렐라는 12시까지 잖아. 말하자면 하위 호환이네?"


"그렇네"


잠시 술을 홀짝이며 대꾸하자, 그가 처음으로 슬픈 기색을 내비쳤다.


"조금 부끄럽지만, 내가 대학 생각도 못하고 집 나와서 배움이 짧아. 코로나 처음 터졌을 때도 사전에 쳐봤다? 그랬더니 뭐라는지 알아?"


"모르겠는데"


"태양 가장 바깥쪽에 있는 엷은 가스층. 너무 얇아서 보통 때는 보이지도 않는다나. 근데 코로나가 길어지니까 어떤 면에서는 너무 내 얘기 같더라. 보통 때면 근본 없는 알바생 따위 알게 뭐야. 학위도 없는 학생인데. 근데 이젠 그게 너무 잘 보여. 일도 끊기고, 사람도 끊기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원룸 구석 안에 도망갈 틈도 없어. 언제는 캄캄한 새벽에 너무 숨이 막혀서, 이 날씨에 쓰레빠만 신고 뛰쳐나왔다니까? 에휴 남들은 부동산이고 주식이고 태양처럼 활활 타는 불장이라는데..."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제 막 들이킨 술 한잔 때문은 아니었다. 부모의 주름을 파먹고 따낸 졸업장 생각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가 비워낸 술값이 내 안도감의 값어치라고 생각하자 되려 염치가 없어졌다.


내게 타인의 슬픔이란 일단 비교주의와 엄숙주의의 근엄한 잣대를 통과하고나서야 굴곡지게 마주할 수 있는, 아주 추레한 표상이었다. 어느 때는, 가짜로 가득 찬 도시에 마음만이 진짜라고 믿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심장이 고장났다. 혹은 쓸 일이 생기니 그제서야 알아차려짐 당한 것일 수도 있다. 


“왜? 좀 그런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어느새 다시 그 헤실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참 이슬처럼 맑은 미소다. 세상에 나온 처음처럼 밝은 미소다. 그런데도 12시가 지나서야 잠에 든 신데렐라가 누구보다 먼저 새벽 찬물 빨래를 시작할 때 '속 쓰림'이 어린다.  누구라도 알 것이다. 신데렐라가 뒤집어 쓴 포장지는 왕자가 있어야 유의미한 '시한부 변수'라는 것을.  


그나마 신데렐라에겐 유리구두라는 단서라도 있었다. 그에겐 고작해야 눈 앞의 유리잔이 전부다. 왕자가 되지 못한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은 그의 잔이 비지 않게 채워주는 일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 대신 잔을 채웠다. 


집에 돌아 가는 길엔 '허락된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청춘은 자의 반, 타의  제게 허락된 시간 보다 빨리 지난다. 그런 청춘을 감히 죽은 청춘이라고 명명할 것이다. 


무덤가에 핀 꽃에도 꽃향기는 있건만, 피워보지 못한 꽃에도 허락된 향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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