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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변실 Dec 13. 2020

어느 고흐의 사랑

[도화지, 흑심, 소주].    

"정리되지 못한 우울은 사실 애초부터 그럴 수 없는 감정이다"


300쪽이 넘는 책을 읽고 내 머리에 남은 한 줄이다.


난 읽을 때 좀처럼 책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으면 학습으로 쌓은 활자를 읽어내는 능력을 억지로라도 발휘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머리는 하얀 도화지 같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애매한 감정 대신 선명한 한 줄이 남았다. 책을 덮고 한 참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머리는 답을 찾기 위해 애썼지만 마음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기 싫었다. 내가 그 문장에 공감한다는 걸.


그냥 빨리 잊고 싶었다. 아니 잊어야 했다. 괜히 읽었다고 생각했다. 안에 감정을 쌓아 두고 남 얘기를 들으려 하니 그 사람 말이 들릴 턱이 없었다. 그나마 머리에 남은 한 줄에도 한 획 한 획 내가 묻어있지 않던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내 하얀 도화지 위에 남은 한 줄을 한시라도 빨리 지워내야 했다. 그럴 땐 다른 사람의 색으로 채우는 게 가장 쉽다. 색을 덧칠하다 보면 모양도 불분명한 검은 덩어리가 돼 사라질 터였다.


나는 서로 가진 이야기를 안심하고 할 수 있을 만큼 적당히 오래 묵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자주 보지도 않는 이름을 찾았다. 몇 명이 떠올랐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시간되는 사람이 있었다. 소주를 한 잔 하자고 했다.


"왠 일이야 네가 먼저 보자고 하고?'"


자리에 앉은 그녀가 대뜸 말했다.


"그냥 안 본 지 오래된 거 같아서"


나는 사랑이 낳지 않은 흑심을 감추고 답했다.


"그래서 잘 지냈고?"


얼추 나이를 먹으니 화제 돌리기도 쉬웠다.


"그냥 매번 똑같지 뭐 적당히 돈 벌고 지지고 볶는 가족 때문에 속 썩이고..."


그럴 줄 알았다. 그녀는 자기 얘기 하는걸 좋아했다. 매번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지만 해결될 수 없는 난제였다.


오늘 그녀와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이 얘기가 나올 걸 알고 있었다. 자주 보지 않지만 바로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 이유기도 했다.


"이번엔 뭔 데?"


궁금하지 않은 질문을 했다.


"아니 말이야..."


그녀가 들이킨 소주 대신 내뱉는 사정은 늘 같았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어릴 적 이혼을 했고, 재혼도 하지 못한 채 그들 안에 쌓인 우울과 불안을 자신에게 호소한다는 거였다.


매번 같은 이야기지만 그 우울과 불안을 호소하는 에피소드만 업데이트됐다.


나는 이걸 원했다. 눈 앞에서 생생한 감정이 터져 나오면 학습된 공감이 그에 맞춰 기능했다. 인력이 들어가는 가장 고급진 막장 드라마의 생생한 시청 현장이었다. 


그러면 어느새 내 감정은 구겨져 뒤로 물러났다. 오히려 위로 받은 모습을 보고 뭔가 채워지는 기분으로 집에 갈 수 있었다.


내가 그녀를 자주 보지 않는 일도 그녀가 쏟는 에피소드가 자칫 지루해져 공감이 제 기능을 하지 못 할까봐서였다.


그건 나한테도 그녀한테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쿨타임이 필요했단 말이다.


"정말 내가 문제지 문제야..."


그녀는 끝으로 이미 정해둔 자괴감을 토로했다. 이제야 비로소 내 안 흑심이 완성됐다.


쏟아지는 에피소드가 기승전결을 밟을 때마다, 심장에 덧칠하는 오색빛깔 감정들이 흑색으로 섞였다.


"뭘 그러냐 앞으론 더 괜찮을 거야..."


나는 가증스러운 말을 잘도 입에 담았다. 이 말을 꺼낼 땐 원하는 바가 충족됐으니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잔 뜻이었다. 피차 망가진 처지에 그녀도 이를 알고 있으리라.


"잠깐만..."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그녀가 일어나는 내 옷깃을 붙잡았다.


"오늘은 그냥 좀 더 같이 있어주라..."


순간 지진이 일었다. 선을 넘는 일이었다. 그녀는 술을 잘 마시는 편었다. 오늘 마신 소주로는 주량을 넘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러는건지 몰랐다.


"왜 그러는..."


적당히 합리적인 말로 정 떨어지게 하는 수작을 펼치려 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작정하고 본인을 드러내 보이는 순수한 마음의 창 앞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분명 오늘을 지내고 나면 이 관계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다.


그런데도 내가 코 푼 휴지처럼 구겨 마음 한 구석 서랍 속에 쌓아둔 도화지들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한참 전 검은 덩어리가 돼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 덩어리들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변새돼 내 안 여러 곳 하얗고 노란 별들을 남겼다.


"....."


결국 그녀와 꼬깃꼬깃 도화지를 다치지 않게 펴 보았다. 그렇게 별을 헤아리고 밤을 지샜다. 복잡한 마음으로 아침 해가 뜨는 걸 기다렸다. 이젠 도화지를 까맣게 물들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색을 찾을 도화지를 까맣게 만드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나. 이미 변화된 시선이 닿은 그림들은 예전 모습을 찾았다.


정리되지 못한 우울. 내게 별 차이를 만들지 못했던 경험에서 다른 이야기가 반짝인 순간, 그곳엔 이 반복되는 얘기 끝 언젠가 내 얘기를 해주지 않을까 바라는 그녀가 있었다. 언제라도 부르면 바로 볼 수 있는 사람. 나의 이유는 염치 없는 오판이었다.


망가짐이 유독 형편없게 느껴지고 나서야 내내 같은 자리에 있던 소중한 마음이 비쳤다.


잠든 그녀를 잠시 바라봤다. 검게 탄 심장에 불씨가 폈다. 나도 모르게 서랍 속에서 빈 도화지 한 장을 더 꺼냈다. 다만 더는 검은색은 칠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은 자몽 소주라도 마셔볼까..."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깬 그녀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그래. 자몽색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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