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용석 Sep 22. 2020

교회가 비대면 예배를 싫어하는 이유

교회 고인물 청년이 바라본 현 상황

일단 제 경력(?)을 소개하겠습니다.

청년부 회장만 3번 했고 큰 교회 작은 교회 다 다녀봤습니다. 심지어 학생 때는 교회에 일주일 내내 봉사하면서 열성적으로 살아본 경험도 있습니다. 그 외에 9회가 넘는 단기 선교와 사역 등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행사는 거의 다 참여하고 진행했습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사회관계보다 교회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많고 돈독한 편입니다. 삶에서 가장 많은 관계가 이루어진 곳입니다.


코로나 때 우리 교회의 대응

정부의 지침에 따라 바로바로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습니다. 주변 다른 교회는 계속 대면 예배 고집해도 목사님께서는 오히려 바로 온라인으로 하고 헌금도 몇 달 뒤에 조심스럽게 온라인 계좌를 댓글에 남기셨습니다. 참고로 교인수는 200명 남짓되고 청년부는 20명가량 됩니다.

교회는 왜 이리 억울해하는가?

‘우리는 안전하게 방역수칙 지키면서 대면 예배드린다’라는 말은 대부분 교회에서 사실일 것입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를 비롯해 지인들의 교회 사정을 물어봤습니다. 예배 시 무조건 띄어 앉고 온도 체크, 손 소독 등 엄격하게 관리했습니다. 심지어 휴가 때 지방 교회에서 조심스럽게 대면 예배를 드렸습니다. (8월 초 경주였고 그 당시 현황으로는 외국인 입국자 제외 추가 확진자는 없었습니다) 그분들도 조심스럽게 온도를 재고 연락처 받고 외부인은 2층에서 따로 예배드리게 했습니다. 물론 자리도 띄어 앉았습니다. 1부 예배(7시)라 저 혼자 2층에서 예배드렸습니다. 아래층을 보니 기존 교인들도 무조건 띄어 앉고 잘 드렸습니다. 끝나고도 칼같이 헤어졌습니다. 여기까지가 교회에서 말하는 철저한 방역수칙입니다. 사실 이렇게 보면 왜 주점이나 식당 이런데는 단속 안 하냐고 화낼 만도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스크 쓰고 온도 재고 자리 철저하게 분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반 교회가 고집스럽게 대면 예배를 주장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마스크도 내리지 않고 조용히 기도하고 헤어지는 게 그렇게 큰 일이냐고 말할 수도 있지요. 그들이 주장하는 건 식당이나 술집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대면 예배의 가장 큰 문제, 소모임

하지만 예배 이후가 진짜 문제입니다. 뉴스에서도 대부분 소모임에서 감염되었다고 합니다. 이 소모임이 여러 형태가  있지만 대부분 서로 마주 앉거나 둘러앉아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이때 소모임장, 리더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생각 없는 리더의 경우 본인 스스로 마스크를 은근슬쩍 내려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간식이나 커피라도 한잔 마시려면 결국 마스크를 내려야 합니다.


소모임 콘텐츠(?) 중 하나로 ‘기도제목 나눔’이라는 게 있습니다. 교회마다 부르는 명칭은 다양합니다. 어떻게 일주일간 지내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는 거죠. 여기서 얘기하다 보면 물을 마시거나 뭔가 마음이 풀어지게 됩니다. 즉, 감염의 기회가 생깁니다.

메라비언의 법칙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인상이나 호감은 바디랭귀지 55% 목소리 38% 말의 내용은 7%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마스크를 쓰고 대화하다 보면 상대방의 표정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색합니다. 얼굴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게 대화의 목적 중 하나입니다. 상대방의 표정이나 눈가의 웃음, 뉘앙스를 보기 위해서는 맨 얼굴이 편합니다.

사회에서도 친구들 만날 때  마스크를 쓴 채로 이야기를 계속하자 친구들이 ‘결국 얼굴도 못 보는 건가?’라고 하면서 장난반 아쉬움반 이야기했습니다. 비슷합니다. 소모임에서도 분위기가 마스크를 쓰고 이야기하다가 뭔가 더 친해지거나 내용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마스크를 내리고 싶어 집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상대방이 유난을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나이가 드신 분들은 일단 오랜 친분 관계가 있고 상대방의 내용, 말, 표현에 공감하기 위해, 분위기에 의해 마스크를 내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식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마스크를 내리고 먹게 되어 있죠. 식사 후 소모임은 더 심각합니다. 식사에서 이미 마스크를 내렸기 때문에 ‘감염되면 이미 감염되었지’라는 생각을 하고 착용을 안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철저한 방역은 ‘목사는 말씀만 전하고 신도들은 듣기만 하고 바로 집을 갈 때’를 가정해서 하는 말입니다. 목사님들은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신도들이 스스로 모인 공간에서 발생한 일인데 교회 전체가 비판을 받으니 말이죠. 하지만 목사님은 소모임의 생태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설교나 리더들을 통해서 강력하게 소모임을 금지하고 설교에서도 언지를 해야 합니다. 많은 확진자가 나온 교회의 경우 대부분 소모임에서 감염되었고 심지어 수련회를 개최합니다. 소모임을 예배와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의 모든 형태의 모임도 결국 예배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비대면 예배는 은혜롭지 않다?

이번엔 설교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 딴짓을 하게 되고 혼자 있다 보니 집중하기가 힘듭니다. 이건 영상매체의 한계도 있습니다. 유튜브의 경우 사람이 집중하는 시간은 10분 내외라고 합니다. 그 이후로 가면 자극적이거나 엄청나게 유용한 정보가 아닌 이상 딴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온라인과 대면 예배의 차이는 큽니다. 현장감이  집중력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인터뷰에서 ‘온라인 예배는 은혜가 떨어진다라고 한 이유가 현장감을 말한 게 아닐까 합니다.

유튜브 영상을 보면 연출과 자극이 필요합니다. 자극이라 하면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것을 떠올리지만 좋은 영상들을 보면 좋은 자극이 무엇인지   있습니다. 평소 궁금해하던 것, 듣고 나니 생활에 유용한 것, 지금 당장 내 삶에 도움을 주는 것 모두 자극입니다.


때문에 교회와 신도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준비를 해야 합니다.


비대면 예배는 콘텐츠가 달라야 한다.

설교도 콘텐츠라 생각합니다.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비하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지만 콘텐츠 뜻 자체가 가공된 정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자의 의도대로 가공되고(복음서) 또 목사님을 거쳐 가공되기 때문에 콘텐츠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지루하거나 고리타분하면 ‘설교’한다라고 합니다. 설교 안에는 이미 알고 있는 것, 뻔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는 것이죠.

목사님도 콘텐츠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온 음식들을 직접 신도들에게 보여주며 먹방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유튜버처럼 브이로그로 해서 하루 일과를 하거나 설교 준비 과정을 보여준다든지 말이죠. 이게 과연 은혜가 떨어지는 행동일까요?

청년부 회장을 할 때 청년들이 매번 말씀을 텍스트로만 받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무교병이 무엇인지, 광야는 어떤 느낌인지 모두들 막연한 이미지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광야는 직접 찍은 사진을 보면 사막이 아니라 잡초가 자라는 약간의 황무지라는 것을 보면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 번은 아예 청년들과 함께 직접 밀가루와 소금, 프라이팬 만드로 각자 무교병 만들기를 진행했습니다. 성경에 수없이 나오는 무교병을 직접 만들고 먹어보는 시간을 통해 말씀을 손으로, 입으로 체험하는 것이죠. 이 시간 또한 굉장히 의미 있었다고들 합니다.


신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제 자신이 청년이기 때문에 청년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많은 종교인들이 비대면으로 인해 인간관계가 많이 끊겼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저 또한 몇 개월간 같은 교인들을 만나지 못해 아쉬움과 외로움을 겪었습니다. 디스코드로 비대면 교제를 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나이 때가 높은 청년들은 사용법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답답함을 느끼면서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결국 서로 연락도 뜸해지고 서로에게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내가 얼마나 사람에게 의지했는가 깨달았습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서로 떡을 떼고 교제하라고 합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 서로 연합하고 보듬어 주면서 공동체를 만들어 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목적은 말씀의 실천을 위함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말씀보다 교제에만 기대고 있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과 충분한 교제가 되는 청년이라면 이러한 상황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삶에서 많은 문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기독교에서도 진짜 괴롭고 힘든 일이 있으면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기도원으로 갑니다. 정말 힘든 상황일 때는 사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말씀을 읽고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기회로 여겨야 하는 게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신실하지 않은 이상 쉽지 않습니다.


비대면 예배 = 휴가기간?

목사님들이 비대면 예배를 경계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각자 집에서 기도하고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기회를 가지면 좋겠지만 많은 청년들은 다른 즐길 거리를 찾습니다. 결국 교회와 멀어집니다. 특히 '선데이 크리스천(주일에 교회만 나오는 사람들)의 경우 비대면 예배는 오히려 휴가기간입니다.

지인의 경우 항상 아침 일찍 봉사를 하는데 비대면 예배가 되면서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속상하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와.. 일요일이 이렇게 길었구나.
요즘 이상하게 푹 쉬는 것 같아 기분 좋은데?”


이렇게 목사님 입장에서는 ‘휴가기간이라 생각하는 교인’들이 제일 고민일 것입니다. 비대면이 되면 이들을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대면 예배 때 이들이 ‘휴가기간의 단 맛’을 잊지 못해 복귀하지 않는다면 큰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누구도 이런 현상을 강제로 막을 수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믿음의 그릇, 분량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면 예배로 전환했는데 교회를 떠나버린다면 그건 그 사람의 그릇의 크기대로 행동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또 교회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도가 떠난다면 그건 교회 전체의 책임입니다.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닌 목자와 성도들이 더 많이 교제하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몇몇 단체는 이 책임을 정부의 방역 실패라는 이름으로 화살을 돌립니다. 마치 과거 일본이 정치적 불안요소를 일소에 해소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처럼 모든 잘못은 본인이 아닌 더 큰 존재, 세상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정부는 감염 위험이 있는 대면 예배와 소모임 대신 비대면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했지만 몇몇 단체는 이것을 종교탄압으로 해석합니다. 그 이면에는 위와 같은 계산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현재 제가 속해 있는 청년부는 디스코드와 화상회의 앱을 이용해서 조금씩 시도하고 있습니다. 분명 확진자가 늘어나 다시 비대면 예배를 해야 할 상황에 대비해서 부지런히 새로운 소통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코로나가 어떻게 감염되는지 알 수 있었고 비대면으로 서로 얼굴을 보면서 소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기술을 이용해서 자신의 신앙심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이 신실하다면 이 기회로 사람보다 하나님에 더 집중하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람을 통해서 신실함이 유지되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소통의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다양한 화상회의 앱,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자체 매뉴얼 제작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서로의 얼굴을 편하게 보기 위한 스마트폰 거치대, 고화질 웹캠도 있을 것입니다.

부디 성경 말씀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면 지금 이 시기가 위기가 아닌 오히려 모범을 보일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경주여행-2) 시간의 나이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