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눈 뜨고 나니 퇴사 요정이 되었다.
12. 돈 쓸 줄 모르고, 벌고만 싶은 못된 마케터 (이어서)
0.
맞다. 종종 브런치 메인에 올라간 글들을 보다보면 이런 제목이 떠오른다. 저 워딩이 욕심이었다면 미리 사과부터 하겠다. 솔직히 저런 워딩을 쓰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도 '대표님 저 이제 그만 일해야할 것 같아요'라는 말을 썼던 것 같다. 마음 속에서는 좀 달랐다. 저 말을 곱씹고 있었으니깐.
사건 발단은 '신규 사업'에서 시작되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정부 사업'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우리 회사는 여느 스타트업 같았다. 우리의 힘보다는 투자의 힘에 방향이 자주 결정되었고, 우리의 노력보다는 사회적 이슈로 인해서 매출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당연한 일이다. 우린 작았다. 작은 것들은 큰 소리를 내지 못한다. 반대로 작은 소리는 묻힌다. 그래서 흔히들 작은 회사들은 팬(단골 손님)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지 않나? 우리랑 계속 같이 있어달라고, 우리를 좋아한다고 더 많이 자주 얘기해달라고 이벤트도 하고 혜택도 주며 애교(?)를 부린다.
그 와중에 우리에게 큰 기회가 하나 찾아왔다. 지자체 하나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유통망 확산 기회였다. 어쩌면 지자체의 전체 생산자들이 우리를 통해 유통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물론 시작은 유통이 아니었지만, 충분히 수익화 모델로 연결 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단순한 기회도 아니었다. 우리가 그동안 꾸준히 우리의 브랜딩을 했기 때문이었고, 그 색깔을 믿고 우리를 지지해주겠다는 지자체의 신호였다.
1.
우린 흥분이 됐다. 절대 안될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흥분이 됐다. 당시에는 수익율이 떨어지던 기존 사업이 있었고 바로 바로 생산자가 유입되지 않는 한 수익은 갑자기 늘어날 수 없었다. 좀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우린 온라인 유통 서비스를 제공했기 때문에 그만큼 생산자가 늘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 사이트에 들어왔는데 살 게 없어? 그러면 사람들이 금방 나간다는 소리다. 사이트를 오래 보고 정을 붙여도 모자랄 판에 금방금방 나간다면 우리 상품을 살리가 없었다. 사이트에 오래 머무르고 구매까지 더 고민해볼 겸 다양하고 많은 생산자가 있어야만 했다. 그것도 바로! 지금!
이 바쁜 와중에 생산자를 늘리기도 모자랄 판에 다른 일을 벌이다니... 그럴 여력이 있었다면 사이트 개편도 하고, 영상 콘텐츠도 생산하고, 블로그 글도 더 올리고 할 게 산더미였다. 그러니 흥분이 될 수 밖에. 그때 애플워치를 차고 있었다면 심호흡 좀 하라고 진동이 울렸을 것이다.
2.
하지만 길게 본다면 우리에게 더도 없는 기회였다. 기회는 하루아침에 자주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내가 사랑하는 사람(매출)이 나를 사랑할(돈이 될) 확률이 기적인 것처럼, 그 기회와 과정은 아주 천천히 스며들고 나도 모르게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이 선택을 잘해야만했다. 그게 정말 나의 영원한 사랑이 될 지, 잊고 싶은 엑스가 될 지 잘 고민했어야했다.
우린 밤낮으로 일하면서, 술 먹고 고민하고 수다를 떨었다. 여기서 좀 특이한 부분이 있었다면 우린 주주가 아니었고, 임원진도 아니었다. 다만 현생의 85% 가량을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었고, 우리가 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우리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 아주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경영진이 아님에도 우린 우리의 앞날이 걸린 것처럼 고민했다. 결국 선택은 '진행'이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차피 떨어지고 있던 매출, 쉽게 보이지 않는 성장의 기회. 유지를 하고 가만히 있는 게 퇴보하는 것이었기에 우리는 새로운 사업을 선택했다.
3.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 사업은 2년 후 함께 했던 구성원들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 사업으로 인해 기존 인원 수만큼 뽑은 신규직원, 신규인턴들은 목표를 잃었고 기존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서 결국 많은 피해를 입게되었다. 내가 변명을 할 거리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 나는 신규 사업 초기에 빠져나와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사업이 지자체의 사정으로 인해 중도에 지원이 막혔다. 아예 막힌 것이 아니었기에 더 잔인했다. 신규 사업은 성장할 만큼 지원이 되지 않았다. 우리가 느꼈던 바로는 '성장을 바라지 않는 신규 사업'으로 보여졌다.
그동안 투자했던 것들은 고사하고, 앞을 바라보고 꿈꿨던 희망들이 차츰 차츰 사라지기 시작하면 스타트업은 힘을 빨리 잃는 것을 배웠다. 이 또한 힘이 빠지지 않게... 미리 얘기하자면 앞선 이야기들은 내 퇴사 후에 벌어진 일들이다. 내가 퇴사를 결심했던 것은 신규사업의 지원이 줄어들기 전, 그보다 한참 전이었다. 신규 사업을 막 시작할 때 쯤이었다.
4.
내 성장의 고민은 단순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신규 사업으로 인해 쓸 수 있는 예산이 0원이 된 것은 큰 문제가 안됐다. 그 전에도 예산을 크게 쓴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보다 큰 문제는 내가 집단에서 유일하게 '지출을 내는 부서'였다는 것이다.
원래 마케팅 부서는 '돈을 쓰는 부서'다. 현대 마케팅의 해석으로는 '돈을 써서, 회수하는'(ROI)라는 거창한 단어로 쓸 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돈을 쓰는 부서임은 부정할 수 없다. 돈을 쓰는 행위는 다양하다. 인건비, 원재료비, 유지비, 관리비 등등의 목적이 있지만 그 중에서 '안 써도 될 비용'은 마케팅이 유일하다.
그 마저도 형식 상 존재했던 소량의 예산이 공식적으로 0원이 되는 순간, 내 인건비조차 안써도 될 예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어느순간부터 안써도 될 예산을 쓰는 사람... 아니 없어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게 참 슬픈 일인데,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은 꽤나 늦게 왔다.
예산이 0원인 마케터는 어느 순간부터 공식적으로 하던 일 대신 다른 일을 요청받게된다. 나의 보고 항목이 삭제되고 서포팅 항목이 주간 보고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연히 서포팅을 받는 사람들은 다른 업무를 추가로 해야했고, 그 업무들은 보통 수익을 내는 업무들이었다. 점차 나는 수익을 내는 업무로 방향이 바뀌면서, 어느 금요일 밤 나는 아무 걱정없이 퇴근을 했다.
5.
브랜드 마케터는 필연적으로 매출의 압박을 받는 자리다. 나만 안 써도 될 돈을 쓰니깐, 그리고 그 돈을 써서 더 큰 효과를 만들어야하니깐. 그것이 쾌락이되기도, 고통이 되기도 하지만 그 마저도 업의 본질이다. (아...아니라면... 내가 너무 부정적이라면 이 또한 미래의 내가 고쳐주겠지....) 하여 금요일 저녁이 마냥 기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장 다음주에 진행하던 것이 성과를 내거나, 안되는 것들이 떠오르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니깐. 근데 그런 사람이 어느 금요일 밤 편하게 퇴근을 했다는 것이다. 고로 나는 내가 책임져서 해야할 일이 없어졌다. 그 감정을 느낀 것이 주간 보고서 항목이 바뀌기 시작한 지 딱 2주일이 되던 시점이었다.
어쩌면 대표님께서는 이 순간이 한시적이라고 보셨을 지 모르겠다. 당장 현금이 급하던 시점이었고, 우리가 가장 빨리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으로 나를 배치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많이 어렸다. 당시 나는 책임감과 사명감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다.
'내가 하는 일을 중히 여기는 마음 vs 내가 하는 일을 꼭 이뤄내야려는 마음'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사명감에 가깝게 해석을 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종종 힘을 빼고 살 때 오히려 쉽게 해결되는 일들이 있다. 농담인데 진담같아서 상처받고, 의도가 없는 행동에 나쁜 의도로 해석을 해서 아파하는 것처럼 말이다. 백 날 옆에서 얘기해도 그 당시에는 모른다. 본인 스스로가 '아니다. 저 사람도 모른다' 생각해야 그 때서야 힘이 풀리는 법이다.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내게 주어진 일이 세상을 구하는 것 같았다. 그 사명감을 잃은 마음은 풍선에 바람 빠지듯이 기운을 잃었다. 그렇게 2주가 더 흘러 퇴사 의사를 밝혔고, 1개월을 더 다니다가 퇴사를 했다. 물론 그 와중에 마케팅 부분에 대한 성장 가능성은 더 떨어졌다. 신규사업에 들어갈 추가 예산이 더 늘었고, 신규사업의 신규인원은 추가 채용되었다. 개인적으로도 마침 건강이 안좋아져 휴식을 할 필요도 있었다. 그렇게 두 번째 회사도 휴식과 함께 퇴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접어든 경력이 3년 차, 스스로 '뭐 이리 빨리 퇴사를 하나' 걱정도 많이 됐다. '과연 이직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고.
하지만 이번은 첫 번째 퇴사와는 달랐다. 나름의 보험을 마련했다. 새로운 이직? 아니다. 그럴 리가. 나는 그렇게 앞날을 착착 계획할 정도로 철두철미하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만..
14. 안해봤는데요, 해볼래요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