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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단단 Sep 26. 2021

대기업 그만두고 스타트업 가는 기분

PM으로의 첫 걸음

결국 그렇게 됐다. 이곳에 오고야 말았다. 대기업 다니면서 스타트업 씬을 그렇게 기웃거렸다. '창업', 'IT 서비스', '혁신 제품', '미래 기술', '패러다임의 전환'...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쯤부터 한결같이 이런 단어들에 매료됐었다. 그래서 IT 대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신입으로서 배워가면서 업무해야 했던 프로그래밍 자체는 할만했지만 이곳에서는 여전히 나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대리급이 되면서 사내 벤처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에 팀 리더와 나, 둘만이 사내 벤처 오피스에 앉아 있었다. 팀원 모집부터 BM 기획, 기술 스택 확정 등 모든 것을 직접 정하고 수행해야 했다. 이때 정말 재미있게 일했고 의욕이 넘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팀은 기성 조직화되어갔다. 매출이 생기지 않는 어려운 상황에서 뚝심 있게 과감한 도전을 해야 할 시기에 많은 의사결정자들이 끼어들었다. 그 사이 사내 벤처팀은 규모만 커져 기민함과 역동성은 떨어져 갔다. 나의 역할도 AI 분석 엔진만을 개발하는 역할로 한정되고 있었다. 나에게 또다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안은 없었다. 뭐... 창업할 만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우선 멈추고 보자'라는 마음으로 대책 없이 휴직을 시작했다. 하루 종일 책만 읽었던 날도 있고, 넷플릭스 보며 며칠을 보낸 적도 있었다. 만나고 싶었던 친구들 만나기도 하고, 좋아하는 운동 실컷 하며 버킷리스트였던 바디프로필에 도전하기도 했다. 휴직하는 동안 이렇게 글쓰기도 시작하고, 친구와 영상 제작도 다양하게 해 보고, 코로나 때문에 못 간 해외여행 대신 제주도 한 달 살기도 다녀왔다.


그렇게 휴직 생활을 보내다가 우연히 알게 된 지인 분이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주셨다. 아직 런칭도 안 한 초기 스타트업이었다. 어떤 곳인지 들어보니 솔깃했다. 휴직을 하면서 '내가 글을 쓰고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끼고 있던 중에 글과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서비스를 만난 것이다.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사회 속에서 신뢰할 수 있는 담론을 만들어가고자 한단다. 내가 그동안 해 온 Text AI 기술을 활용하는 것도 친숙한 점이었고, 대표님도 인성으로나 커리어로나 신뢰가 갔다. 올 한 해 예스맨으로 살아오던 나는 또 'Yes!'를 외쳐버렸다. 하지만 내 마음이 기운 결정적인 이유는 PM 역할을 제안받았기 때문이었다.




PM은 Product Manager의 줄임말이다. 말 그대로 기획, 디자인, 개발, 팀 관리 할 것 없이 제품이나 서비스의 모든 것을 전부 챙기고 끌어가야 하는 직책이다. PM의 임무를 딱 여섯 글자로 말해보자면, '일을 되게 하라'이다. 개발과 데이터 분석이 커리어인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긴 한다. 게다가 나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면 뇌정지가 오는 사람이다. 멀티 안 되는 내가 PM이라니... 자려고 침대에 누울 땐 '괜히 Yes를 외쳤나...' 생각도 했다.


우선 파트타임으로 두 달 정도 일해보기로 하고 사무실이 있는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향했다. 아직 초기 스타트업인데 PM 역할이라니 쉽지 않을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가보니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초기 스타트업 치고는 직원이 8명 정도로 많은 편이었는데 대표님을 제외한 모두가 주니어였다. 대학 졸업반이거나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들. 대표님과 주니어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줄 PM을 찾던 이유가 있었다. 이거 쉽지 않겠다 싶었다. 이미 노련한 경험이 있는 슈퍼맨 같은 사람이 왔어야 했는데 내가 온 셈이다.


친구한테 이런 스타트업의 상황을 말하니 빨리 나오라고 말한다. 초기 스타트업이라면 어벤저스 정도 모여있어야 지금 회사를 그만두고  만한  아니겠냐고...  멀리서 보면 나도 그렇게 말했을  같다.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역량을 펼쳐보고 싶은 만큼 펼쳐볼 수 있겠다는 설렘도 들었다. 이제 처음 회사에서 일을 해보는 주니어들이지만 내가 대기업에서  어느 사람들보다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일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케이팝스타라는 프로에서 박진영은 이미 노래를 노련하게 하는 사람보다 노래 자체를 배운 적이 없어서 어설프더라도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친구를 선택하던  생각난다. 나도 오히려 같이 성장하면서 잘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사업은 어벤저스 보유 순으로 되는  아니니까.




가끔 회의할 때 혼자 소름 돋을 때가 있다.


우리가 풀려고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 갈 수 있는지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같은 비전을 갖고 무언가를 만들어나갈 때의 설레는 기분, 그게 이루어질 때 맛 볼 뿌듯함이 기대된다. 이것은 뭐랄까... 약간은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막상 자주 꺼내어 말하기엔 민망한 것. 나는 대기업 임원들을 봐도 전혀 되고 싶지도 않았고 동기부여도 되지 않았지만, 이런 것들은 생각보다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


그런 일들을 어벤저스처럼 나누어 해낼 때 ‘일하는 재미’란게 느껴진다. 각자의 일이 조각조각 맞아떨어지는 맛이 찰떡같을 때, 묘한 기쁨이 느껴진다. 혼자 할 수 없는 방탈출 게임을 수학 잘하는 애, 넌센스 잘 푸는 애, 지도 잘 읽는 애, 힘 좋은 애, 남은 시간 말해주는 애가 모여 방탈출 게임을 성공할 때의 기분. 퍼즐이 하나둘 맞아가며 모두가 소원하던 그림이 점점 그려지는 기쁨. 대기업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힘든 ‘일하는 재미’. 이런 재미를 스타트업에서 경험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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