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내 요구를 없었던 일로 하자고 말하지 않은 이유는 마음 한편에 정말로 그것을 원하는 내가 살아 숨 쉬기 때문이다.
-페퍼민트-
사람은 생각만큼 고상하지 않다. 더 고상하게 살길 갈망하지만 언제나 부딪히는 건 현실의 벽이고 그 벽은 '자기 편이'라는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인데 그걸 얼마나 포기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사랑이 위대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나를 얼마나 내려놓을 수 있느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감정이기에.
식물적 인간인 어머니를 보살피며 생계를 이어나가는 일은 19살 주인공에게 버거운 삶인 게 분명하다. 지랄발광하며 지나가도 아쉬운 게 사춘기인데 그걸 꾹 눌러 담으며 타인을 위해 살아내야 한다는 건 언젠가 곪아터져도 터질 일이다. 시안에게 해일과 해원을 만난 게 계기가 됐을 터이다. 조금 더 늦게 만났으면 큰일 날 뻔했다. 상처 치료는 상처가 여기 있었구나 하는 자각에서부터 시작하니까. 피가 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상처를 꿰맨다는 건 어불성설이니까.
마주하고 보면 상처라는 게 참 별거 없다. 신을 닮은 인간은 마주하는 모든 문제를 뛰어넘을 능력이 있다. 참고 누르고 억압하는 것은 능력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건 학대다. 인간이 가진 능력은 건강한 발산에서부터 온다. 누군가의 아픔을 작다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건강하게 배출하는 게 중요하다. 우울증이라는 것도 결국 담아두는 것에서 시작하던 게 아니었던가. 내 감정과 생각을 받아줄 사람이 주변에 없고 그게 익숙해지다 보면 결국 터져야 할 게 속에서 터져버려 엉망이 된 게 아니던가.
나 또한 생각만큼 고상하지 않다. 생각은 소중한 사람, 대의를 위해 내 모든 걸 희생할 준비가 됐지만 실상은 천지차이다. 내가 힘들 게 먼저 떠오르고 내가 잃을 게 뭔지 계산기나 두드리고 있다. 그 사실을 좀 인정할 필요가 있다. 나는 더럽고 치사하고 못난 인간일 뿐이다. 못난 생각이 드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다. 숨길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관찰하고 계산하고 숙고한 뒤에도 희생했다면 스스로를 칭찬해 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