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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규김 Mar 04. 2023

실존(實存)과 본질(本疾).

사순절 묵상 - (3)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입니다.


오늘 조금 난해하거나 관념적으로 느껴질법한 이야기를 하고자합니다. 


앞서 적어놓은 사르트르의 말을 간략하게 해석하자면 인간에겐 그들이 세상에 태어난 의도와 목적 따위는 없고, 오직 자기 스스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신은 죽었다.” 그 유명한 철학자 니체의 말입니다. 이는 궁극적인 목적을 잃어버려 허무주의가 떠오르던 시대에서 인간 스스로 새로운 목적을 삶의 가치를 찾아 나서를 맥락으로 이어집니다. 


또 다시 실존주의 철학의 시조격이라 불리는 하이데거는 존재가 존재자를 정의한다 말합니다. 이것을 아주 쉽게 말하면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계승하는 고백은 실존에 앞서는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의 창조론은 우주의 창조에 대한 자연과학적 인과를 이야기하는게 아닙니다. 바로 세상을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바라보아야하느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념은 본질에 대한 이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 살아갔던 수 많은 순교자들은 본질이 실존에 앞서있던 기독교의 철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인간은 아무 의미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닌 창조주의 계획과 일하심 속에 이 세상에 지음을 받은 귀한 존재들로 인식됩니다. 


이는 개인의 욕망에 천착한 삶을 살기보다 자기희생의 사랑을 우선된 가르침으로 삼아 스스로의 삶에 본질 찾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자의 삶에 정답이랄게 어디있겠습니까. 다만 신념은 이렇듯 건강하게 작용할 때에 자기 초월을 향한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곤 해왔습니다. 


인과 예를 실천하여 군자가 되듯, 오욕칠정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듯, 기독교 역시 최고의 인간상을 제시함으로 '공의'라 일컫는 개인과 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는 단순한 수행이 아닌 윤리적 제언으로서 관계적인 의미로 이해되며, 자신을 부정하여 자기를 넘어서는 겸손과 사랑의 미덕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예수를 윤리적 의미로 이해하고자함이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심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고백은 실천이 없다면 아무 소용 없는 고백이며, 자기영달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본질과는 전혀 무관한 사이비적 사설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순교를 따라 역사상 정말 많은 이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주의 십자가를 지고 그의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삶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설명해냈고, 자기의 삶을 통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보여준 것은 세상의 실존을 넘어선 세상의 본질이었습니다. 제 말이 너무 관념적으로만 느껴지신다면 당장 자신의 어제를 한번 돌아봐주시면 됩니다. 본질이 나를 말하고, 내가 본질을 말하면 그것이 교회의 신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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