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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1 시간의 거리(distance)

by 여름의끝

며칠 전, 우연히 2003년에 개봉한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주인공이 입고 있는 셔츠와 바지는 어딘가 어색하고 촌스러웠다. 처음엔 단순히 저예산 영화인가 싶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고 나서야 문득 깨달았다. 그 영화 자체가 이미 스무 해가 지난 작품이라는 사실을. 당연한 시간의 흐름을 너무 오래, 너무 가볍게 잊고 있었다.

2000년에 대학에 들어간 뒤의 시간은 마치 잘 말린 종잇장처럼 얇게 구겨져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힘을 조금만 주면 바스라져 날아갈 것 같은, 그런 20년이었다.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기 때문에, 그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었는지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어느새 2000년생 아이돌들이 데뷔하고, 해체하고, 다시 다른 이름으로 두 번째 전성기를 맞는 시대가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고, 또 조금은 서러워졌다.


우리 아파트 거실에서 숙제를 하던 딸아이에게 2003년이 어떤 시절일까 생각해 본다. 2012년생인 아이에게 2003년은, 81년생인 나에게 1972년쯤 되는 거리다. 72년이라면 박정희의 네 번째 임기가 시작된 유신헌법의 첫해. 교과서 속에서만 접하던, 손끝으로도 더 이상 온기를 느낄 수 없는 먼 시대. 그런 해가 내게는 그저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바로 전’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잠시 창밖을 바라본다. 저녁 무렵의 신도시 아파트 단지는 늘 그렇듯 정연하고 조용하다. 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들, 천천히 밝아지는 주차장 불빛, 퇴근 시간에 맞쳐 흘러나오는 자동차의 낮은 엔진음. 이 모든 풍경이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어쩌면 이 도시도 어느새 스무 해쯤 더 나이를 먹었겠지.


시간은 늘 뒤돌아볼 때에서야 그 무게를 드러낸다. 앞을 향해 흐를 때는 너무 매끄럽고 가벼워서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오늘 내가 본 오래된 영화 속 촌스러운 패션처럼, 지나간 것은 어느 순간 불쑥 낯설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낯섦이야말로 우리가 늙어 왔다는 조용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딸아이는 여전히 숙제 공책을 들여다보고 있고, 아들은 방 한쪽에서 작은 블록을 쌓아 올리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 아이들이 지금 겪는 하루하루도 언젠가 어딘가 촌스럽고 오래된 장면으로 남겠지. 그리고 그때쯤이면, 나는 또 오늘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그렇게 우리를 지나쳐 간다. 조금 서러울 만큼 빠르게,

그러나 미처 인지하지 못할 만큼 조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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