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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Sep 12. 2022

여름 산식(山食)

여름 산행 간식

이른 새벽, 차가운 기운에 상수리나무 속 굼벵이처럼 몸을 움츠리며 이불속을 파고든다. 며칠 사이에 아침 공기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여름 그리고 겨울 중에 뭐를 더 좋아해?“

“나는 여름을 더 좋아해”

계절은 청중의 의견을 반영할 의사가 없는 의미 없는 논쟁의 시간. 결론은 나지 않고 신념도 지키지 못한 토론이 오가던 도중 여름이 지나갔나 보다.


여름. 지글 하게 끓는 아스팔트 바닥과 자동차 궁둥이가 내뿜는 배기가스, 도시의 열기에서 벗어나 산에 가면 더위를 잠시 잊을 수 있다.


가끔씩 행운처럼 불어오는 시원한 나무 바람과 산뜻한 흙, 졸졸 내려오는 계곡 물 덕분에 잠깐 턱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산이라 할지라도 무섭게 밀려드는 햇빛의 선명함은 피할 수 없다. 작열하는 열기 아래에서 조금만 걸어도 비 오듯 땀이 흐르는 것을 견디며 몇 시간 동안 오르고 내리기 위해서는 대책이 필요하다.


휴대용 선풍기에서도 더운 바람이 나오는 한 여름이면 더위는 더 이상 내 통제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걸음걸음 사이에 아주 맛있고 행복한 것으로 나를 달래줘야 한다.


그것을 견디면 우리는 싱그러운 이파리의 리듬과 이제 막 자라는 아기 산새들이 조잘거리는 노랫소리가 만드는 하모니, 그 소리를 들으며 뜨거운 발을 차가운 계곡에 담그는 짜릿하고 성취감 가득한 여름 등산을 즐길 수 있다.




1. 검은 물.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콜라


검은색은 햇빛을 흡수하지만, 검은 물은 더위를 반사한다.


나는 내 피가 커피가 아닌 게 의심이 될 정도로 깊은 커피 애호가이지만 여름에 산에서 먹는 얼음 아메리카노는 커피 중에서도 가장 특별하다.


암릉에 툭툭 땀이 떨어지며 더 이상 오를 힘이 나지 않을 때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아 텀블러에서 커피를 쫄쫄쫄, 얼음은 툭툭. 무심하지만 소중하게 커피를 따른다.

천 원의 행복으로 다이소에서 엄선해서 산 귀여운 종이컵에 따른 커피를 마시는 순간, 철권에서 매몰차게 지고 있던 캐릭터가 부스터로 변신해서 역전승하는 기분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몽롱한 정신에 카페인 수혈하는 느낌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때는 살기 위해서지만, 지금은 비장하기 위해서라고 할까. 경쾌한 풋워크와 힘 있는 발걸음으로 다시 걸을 힘이 생긴다.


탄산음료, 특히 콜라도 여름 산에 빠지면 매우 섭섭하다. 특히 콜라는 얼려서 가면 더 좋다. 통째로 냉동실에 얼리면 터지기 때문에 한두 입 덜어 하루 전날 냉동실에 얼린다.


꽁꽁 얼은 콜라는 금방 녹아 어린 시절 먹던 슬러시처럼 변한다. 그리고 지칠 때마다 산행할 맛을 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콜라는 펩시 제로 콜라 라임 맛.


마찬가지로 산행이 끝나고 난 후에도 편의점에서 점보 얼음컵을 구매해 콜라 혹은 사이다를 가득 담아 원샷하면 머리도 깨지고 그날 더위도 깨부순다.  



2. 얼린 모든 것


얼린 모든 것은 여름 산의 치트 키이다.

보냉 주머니로 냉기를 잘 보존해야 한다는 번거로운 정성이 필요하지만 얼린 콩물, 얼린 찹쌀떡, 얼린 쿨피스, 얼린 청포도, 냉동실에 유예해둔 어떤 식재료도 산에 가져가면 보물이 된다.


얼린 모든 것들은 그냥 툭 가져가면 그것들이 흘린 물방울에 가방이 젖어 곤란해지기 십상이다. 손수건으로 싸도 좋지만 겨울을 위해 진정한 수면을 취하고 있던 알록달록한 수면양말에 담아 가면 수면사가 축축한 습기를 먹어 물병 주머니 역할을 한다.  


얼린 짜요짜요는 분명한 별미이다. 얼린 요거트 진심을 다하는 사람은 얼린 짜요짜요 40g을 보존하기 위하여 1kg가 넘는 텀블러의 무게를 감내한다. 자기 몸의 몇 배가 넘는 보호막을 두르고 함께 산에 오른 짜요짜요. 그것은 살짝 녹아 액체와 고체의 중간 형태로서 혀 끝에 뭉근하게 닿는다. 달큰한 요거트가 메마른 입술 끝을 적시고 미뢰 곳곳에 박히면 갑자기 시야의 초록 풍광이 더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잠깐잠깐 씹히는 작은 젤리 알맹이는 짜요짜요를 한 번에 쭉 짜 먹고 싶은 탐욕적인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진정시키곤 한다.

얼린 곤약젤리도 참 맛있다. 작은 보냉 가방에 담아 가는 곤약젤리는 산행하는 동안 말랑하게 녹아 야무지게 먹힐 준비를 마친다. 함께 챙겨간 미니 가위로 입술이 베지 않도록 둥근 가로 모양으로 입구를 자르면 죄책감 없는 아이스크림이 완성된다.


3. 모든 여름 과일


분명하게 난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여름 산에서 먹는 제철 과일은 땀으로 푹 젖은 몸을 다시 생그럽게 만든다.

여름 대표 과일 수박은 그 계절에 산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한다. 수분을 가득 담은 수박은 산에서 먹기에 가장 시원 달콤한 여름 과일이다. 몸에서 소금기가 느껴질 정도로 날이 더우면 물을 아무리 먹어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이룬 하산길 계곡 아래에서 발을 담그고 수박을 먹으면 촉촉한 과즙이 땀으로 젖은 혀를 헹구고 당분이 곧장 위로 직행해 지친 세포를 되살린다. 메이플스토리에서 봤던 빨간 포션은 개발자가 산에서 먹은 수박을 떠올리고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새콤한 여름 자두도 참 맛있다. 뽀독한 것이 앞니에 닿는 순간 입안 가득 땀방울의 텁텁함을 상큼함으로 바꾼다. 이 옹골찬 것이 언제 씨앗에서 새싹을 틔워 풍파의 계절을 이겨내고 내 입안으로 들어왔을까. 나는 어떻게 흘리는지 놓치고 살아온 하루가 가득한데, 매일 조금씩 결실을 이룬 자두를 떠올리니 오늘도 자두에게 배운다.



사실 산에서 먹으면 모든 것이 모든 계절에 모두 맛있고 특별하다. 하지만 여름에는 치열한 뜨거움으로부터 차가움을 보존하기 위한 고민과 정성이 담기기 때문에 더 특별해서 맛있고 그래서 더 즐거운 것이 아닐까. 마음은 뜨거움을 잃지 않되 몸은 차가움을 유지했던 익어가는 여름 시간이었다.


여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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