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밤, 스피아민트, 페퍼민트
초여름 시작된 허브 실내가드닝
6월의 어느 날, 허브 씨앗세트를 덜컥 구매하게 되었다. 토스트에 발라먹으면 그렇게 맛있다는 레몬 딜 버터를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 하에, 허브 딜 단품 씨앗을 구매하러 간 길이었는데 막상 허브 딜 단품은 안 보이고 <레몬밤+허브 딜+페퍼민트> 세트상품이 보였다. 고민도 순간, 이상한 객기가 도졌다. "뭐 어때, 허브 여럿 키워서 다 먹으면 되는 거지."
그렇게 Lv.1 식물 집사의 허브 가드닝이 시작되었다.
레몬밤(Lemon Balm) 이야기
레몬이나 립밤은 들어봤어도 레몬밤은 처음 들었다. 이름도 모르니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그래도 일단 구매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구글에 레몬밤의 재배/활용법을 검색했고, 다행히 레몬밤이 허브티용으로도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는 글을 보고 잘 키워보기로 마음먹었다.
레몬밤의 발아 속도는 꽤 빠른 편이었다. 연두색의 새싹이 끊임없이 생성되었다. 꼭 작은 하트 모양 같아서 귀엽기도 했다. 정성을 많이 들여서 그런 건 아니(...)었고 사실 레몬밤은 키친타월 위에 뿌려진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알아서 잘 크고 있었다.
세상 강인한 생명력, 완전 내 취향이다.
잘 키워서 잡아먹어보자.
6월 22일. 레몬밤 식재를 위해 이름표를 만들어주고 3*3 대열로 심어줬다. 아직 순이 작기 때문에 큰 화분을 사지는 않았고, 요플레 통을 씻어 임시 화분을 만들어주었다. (나름 재활용. 크래프트지도 둘러 씌워 주었다.) 어, 나 좀 소질 있나 봐.(???)
Day+3
레몬밤을 화분에 심은 지 3일 정도 지났다.
고개를 잘 못 가누는 아기들처럼 제 머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픽 쓰러져있었던 친구들이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짜식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대로만 쑥쑥 커다오.
한 달이 지났다. 여름철 식물은 워낙 빨리 자라기 때문에 그 과정을 잘 찍어줬어야 했는데, 다른 친구들보다 기록에 큰 열정을 들이지 못했다. 그동안 레몬밤의 성장 환경에는 변화가 찾아왔다. 레몬밤은 그간 채광이 약한 발코니에서 키웠는데, 내가 여름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채광은 물론, 풍경까지 개선되었다. 여름을 지나며 레몬밤은 본잎을 틔워냈다. 흡사 깻잎 같은 모습에 잡초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름 어엿한 허브다. 레몬밤 물 공급 주기는.. 음. 솔직히 말하면 잊을만할 때쯤 주며 키웠다. 다행히 내 기대보다 더 잘 자라고 있다.
다른 허브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가득 뽐내는 레몬밤은 어느새 화분의 표면적을 다 채워냈다. 위쪽으로도 좀 길게 자라줬으면 좋겠는데 옆으로 엄청 잘 자란다. 나날이 비대해지는 나 같다. 이런 건 왜 닮는 거니.
심은지 두 달도 안되었는데 급속도로 덩치를 키운 레몬밤의 모습. 분갈이를 해줄까, 순을 칠까 고민하다 화분에 꽤 많은 흙이 있고, 뿌리 발달도 더딘 것 같아서 아래쪽 잎을 잘라줘서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다.
흙 표면에 가까운 잎 위주로 정리해준 모습. 통풍이 잘되고 흙도 잘 마르겠지? (이제 이런 판단도 가능하다구)
이제는 더 잘 자랄 것이라고 생각했다. ㅎ.. 그렇다. 이때만 해도 몰랐다. 그가 곧 초록별로 떠난다는 사실을.
시원하게 벌초(?)한 기쁨도 잠시, 순 정리할 때만 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까만 잎끝이 일주일이 지나자 잎 안쪽으로까지 서서히 물들었다.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애가 탔다. 너 왜 그래- 하고 물어본 들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리가.. 인터넷으로 백방 찾아보니, 나처럼 레몬밤 잎 끝을 태워버린 ㅎㅎ..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대다수는 과습 때문이었다.
고민스러웠다. 과습이라면 물을 덜 주면서 버텨내야 하는데 사진에서 보이듯, 레몬밤 화분의 흙은 건조했기 때문이다. 원인은 대충 알아낸 것 같은데 수습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식물 집사 Lv.1 최대 퀘스트) 고민 끝에, 이미 습기로 가득 찬 것으로 추정되는 흙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겠다 싶어 레몬밤을 화분에서 다 들어내고 수경재배로 잠시 전환한 뒤에 새 화분에 다시 심어주었다. 그러나...
레몬밤은 결국 모두 초록별로 떠났다. 적당한 관심조차 주지 못했던 지난날들이 스쳤다. 알아서 잘 자라줬다지만, 다른 허브들에 비해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사실 무관심 속에서도 오래 버텨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레몬밤을 키우지 못했다. 어쩌다 다시 찾아오게 된다면, 그때는 더 잘해줘야겠지만. 한동안은, 안녕!
스피아 민트(Spear Mint) 이야기
민트는 그 종류가 굉장히 다양한데, 우리가 흔히 아는 대표적인 3종류로는 애플민트 / 페퍼민트 / 스피아민트가 있다. 간단하게만 소개해보자면,
애플민트(Apple Mint)는 연한 색의 잎과 잎 주변에 난 하얀 털로 식별이 가능한 민트이다. 사과와 박하를 섞은 듯한 순한 향 때문에 카페 메뉴로 자주 이용되곤 한다. 대표적 활용 음료로는 모히또가 있다. 페퍼민트(Pepper Mint)는 잎 표면에 털이 없고 시원 청량한 향이 나는 민트다. 톱니 모양의 잎이 뾰족하게 날카로워 식별이 용이하다. 내가 씨앗부터 어렵게 키우고 있는 허브이기도 하다. 스피아민트(Spear Mint)는 페퍼민트와 함께 가장 널리 쓰이는 허브로, 잎 모양이 페퍼민트보다 더 뾰족한 창 같아서 스피아(창) 민트라 불린다.
비록 애플민트와 착각하긴 했지만.. 스피아민트가 뿜어내는 향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지인의 스피아민트를 조금 잘라다가 집에서 물꽂이 번식을 시도하게 되었다.
텃밭에서 무성하게 잘 자라던 스피아민트의 가지를 조금 잘라 실내에서 물꽂이 한 지 일주일 만에 아주 건강한 뿌리가 자라났다. 환경이 눈에 띄게 척박해졌는데도 굉장한 성장세였다. 뿌리가 어느 정도 길어지고 난 뒤, 커피 컵 화분에 옮겨서 다른 화분들 사이에 놓아주었다. 확실히 새 식구가 늘어난 느낌이 들었다. 텃밭에서 무심히 잘 자라던 처음처럼 앞으로 자라게 될 환경에도 잘 적응해줬으면 하는 내 마음을 잘 알아주기를 바랄 뿐.
그러나 이름표를 바꾸기도 전에 스피아민트는 점점 잎에 검은 얼룩이 생겨났다. 과습 방지를 위해 햇볕을 좀 더 쐬어주고 창가에 둬서 바람도 쐐주고 있으나.. 결국 초록별로 떠났다. 레몬밤 데자뷔.
페퍼민트(Pepper Mint) 이야기
페퍼민트 이야기는 사실 인생 2회 차 이야기다.
6월 14일 처음 발아를 시도했는데, 씨앗의 크기가 워낙 작아서 그런지.. 발아가 도통 잘 되지 않았다. 반 포기하는 심정으로 젖은 키친타월 발아를 포기하고 손에 닿는 대로 씨앗을 흙에 뿌렸다. 파종 대비 발아율은 몹시 떨어졌지만 그래도 알아서 제발 자라줘라 부탁했더니 어찌어찌 크긴 컸다. (사진은 8월 초) 그런데 문제는 저모냥으로 커버렸다는 거다...
8월 말, 이대로는 페퍼민트가 너무 힘없이 자랄 것 같아 다 버릴 것을 각오하고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 왜 이렇게 얇게 자란 건지, 왜 갑자기 끝부분은 무성한지 알아보니 소위 말하는 '웃자람 현상'이었고, 햇볕이 부족해서 부실하게 자랐다는 결론과 그 원인으로 화분의 깊이가 문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페퍼민트 화분은 다른 화분에 비해 흙의 높이가 많이 낮았고 때문에 해가 잘 드는 방향에 두어도 매일같이 그늘이 져버린 것이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페퍼민트의 모든 줄기를 다 잘라내고 다시 마디마디를 나눠서 물꽂이를 시작했다. 최소 단위에 맞춰 자른 줄기들이라 너무 연약해 과연 뿌리가 날까 싶었지만 튼튼한 페퍼민트로의 재탄생을 위해 약간의 도박을 한 셈이었다.
물꽂이 Day+n
물꽂이를 하던 중 뿌리를 잘 내린 친구들과 (우리 집 페퍼민트 중 어벤저스) 작지만 어느 정도 튼실한 친구들을 골라서 1 식물 1 화분으로 식재해 주었다. 참고로 사진 속의 화분은 트레비 탄산수 페트병 공병이다. 가벼워서 이동이 편하고 표면도 투명해서 흙을 가득 채우지 않더라도 화분의 윗부분에 햇볕이 잘 들기 때문에 실내에서 모종 관리하기에 제격이라는 생각이다.(화분을 사니 탄산수가 덤으로(?))
작은 페퍼민트들은 다행히 점점 더 튼튼하게 자라났다. 햇볕이 좋은 곳에 잘 놔둔 덕도 있지만 화분의 크기가 작아서 배수나 통기가 원활한 덕도 있었다. 굉장히 중요한 발견 중 하나였다. 식물 집사 초기에는 분갈이병(?)이 있었다. 혹시나 식물 크기에 비해 화분이 작아 잘 자라지 못하게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뿌리가 가득 차지 않아도 눈에 보기에 식물이 크면 부지런히 분갈이를 해댔다. 그러나 이따금씩 그게 독이 되어 식물을 초록별로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분갈이 과정에서 식물이 몸살을 앓기도 하고 너무 큰 화분에 식재하면 배수와 통기가 어려워 과습으로 보내기도 했다. 사람도 잦은 이사는 힘이 들듯이 식물도 초반부터 좋은 환경에서 키워줘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왼쪽 사진의 페퍼민트는 당초 요플레 통에 있던 작은 친구들을 투명 컵화분에 옮겨둔 후의 근황이다. 이 친구들은 옮겨심기도 그래서 일단 놔두었는데 투명 컵이라 햇볕이 잘 드는 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줄기가 여전히 얇게 자라나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운데와 오른쪽 사진의 페퍼민트는 물꽂이, 흙삽목 이후에 가장 건강하게 자라던 아이여서 토분과 별도로 큰 화분으로 옮겨주었다.
페퍼민트 살리기 대작전 DAY+n
비실비실했던 페퍼민트 중 살아나는 조짐을 보인 친구들은 위와 같이 총 세 개의 임시 화분에 식재해 줬는데, 군집을 지어 자라는 허브의 특성상 모두 합사 하는 것이 생장에 도움이 될 거 같아 길고 깊은 화분을 구매했다. (구매처는 이마트!) 이제 정말 마지막 분갈이가 되기를 기도하며 민트 줄기를 하나하나 정리했다. 참고로 허브는 배수가 중요하다고 해서 흙 배합은 마사 5 : 배양 5로 했다. 깔망은 양파포장망 재활용 ㅎ_ㅎ
합사는 나름 성공적이었으나 줄기가 힘이 없어서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는 바람에 모양새는 썩 좋지 않았다. 일단은 새 화분이자 최종 화분이 될(?) 이곳에서 페퍼민트들이 적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기에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동향을 살폈고 틈나는 대로 진짜 이상하게 자라는 페퍼민트는 줄기를 잘라서 재삽목을 진행했다.
그러다 페퍼민트는 겨울로 접어들면서 인생 3회 차를 맞게 되었다. 동향인 우리 집 특성상 겨울이 되니 햇볕은 부족하고 깊은 화분 때문에 통풍이 잘 되지 않아 진딧물이 한가득 생긴 것이다. 시중에 판매하는 해충약을 뿌릴 수도 있었지만 나름 식용으로 기르는.. 아이였기에 최대한 양보해서 과산화수소 희석수로 소독을 진행했다. 그럼에도 심하게 진행된 경우가 많아 2022년 봄까지 가지치기와 희석수 분사를 꾸준히 병행했다. 흙 위에 줄기를 남기지 않아도 흙 밑에 건강한 뿌리만 남아있다면 싹을 틔워낼 수 있기 때문에 갈아엎지 않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 결국 모두 죽었다.
아 나는 민트랑 정말 안 맞나 봐!
인쁘삐(IN-FP).
1995년에 태어나 24살부터 시작한 공무원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직업적성검사를 새로 했더니 개그맨이 나와서 결국 못 그만두고 다니는 사람.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는 욕심이 항상 드릉드릉 가득하지만, 사람 많은 곳은 싫어하는 전형적인 INFP.
먹는 식물은 죄다 죽이고 못 먹는 식물은 세상 잘 키워내는 능력치 애매한 식집사.
직장생활 꽤나 힘들어하고 일도 잘 안 맞는데 나름 또 정년퇴직은 하고 싶어서,
숨을 얕게 쉬며 회사를 다니는 20대 직장인.
어느 날 문득, 도대체 나는 왜 이런 사람인지 고민만 할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동안 마주했던 순간들을 털어놓으며 나를 이해해보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