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최근 접한 콘텐츠들을 곱씹다 문득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잘 산다는 말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체득한 의미인 돈이 많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집이 크고 좋다거나 좋은 차를 탄다거나 하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하지만 돈이 많은 사람들이 모든 측면에서 '잘' 산다고 느껴지지 않는 요즘이다. 날이 갈수록 이기심과 갑질의 횡포를 보여주는 기사들이 많아지고, 돈이 많은 사람들이 부를 더 축적하기 위해 가족들이나 친구들 등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모습도 많이 보게 된다. 잘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모습들이다. 돈이 있으면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는 순수한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노력으로 사랑을 얻기 위한 부를 쌓는다. 그리고 그 부를 이용해 사랑을 되찾기 위해 나아간다. 하지만 그는 결국 비참하고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그의 데이지를 향한 순수한 사랑과 그에 대한 노력과 열정은 분명 세속적인 것이 목표와 목적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과연 위대하다고 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 수단으로 부를 이루기 위해 불법적인 일을 했으며,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 역시 잘 살았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반면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의 주인공 팻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준 것일까? 그는 자신의 집에서 아내의 외도 현정을 목격하고, 상대 남성을 죽기 직전까지 두드려 패고는 접근 금지 명령을 받고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그리고 원인을 제공한 아내와 상대 남성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팻은 폭력을 행사한 후 몇 년간의 기억을 잊어버려 계속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와의 이별이 일시적이라고 믿으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그리고 티파니를 만나 서서히 치유되어가고, 결국 아내와의 완전한 이별을 받아들이고 티파니의 자신을 향한, 자신의 티파니를 향한 사랑을 인정하게 된다. 팻은 과거 사건으로 인해 학교에서도 잘리고 무일푼으로 아무것도 없다. 병원에서 나온 후 줄곧 아빠 엄마와 한 집에 살며 엄마가 사다 주는 옷을 입고,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산다. 하지만 그가 아내를 되찾기 위해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과 친절해지려는 노력, 그리고 열심히 운동을 해서 결혼하기 전보다 더 좋은 몸을 만들려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의 생활이 경제적인 풍요로움이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모습보다 더 더 잘 사는 모습처럼 보였다.
개츠비와 팻은 자신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열정을 불태우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는 점에서 매우 닮아있다. 하지만 과연 잘 살았고,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부분에서는 전혀 다르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개츠비는 사랑에 대한 순수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부를 이루는 과정이 그랬고, 그 부를 옳지 않은 목적(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데이지의 사랑을 얻어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목적)에 이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팻은 물론 용서받지 못할 폭력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고 정신병원에까지 수감되는 일을 겪었지만, 아내와 이미 이혼한 상황, 아내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 가정을 꾸린 상황들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이 좀 더 나은 사람, 좀 더 친절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들의 소중함을 인지하고 다시 그 소중한 시간을 자신의 인생으로 가져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팻은 자신의 아내를 되찾겠다는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줄곧 이야기하고 실버 라이닝, 즉 구름 뒤 해가 있고, 구름이 걷히면 자신에게 해가 내리쬘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티파니와의 사랑을 통해 현실로 이루게 된다. 감히 비교하자면 부를 이루지 못했음에도 팻이 개츠비보다 잘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이 아닌 자기 계발서들을 들여다보자. 요즘 찾아보기 쉬운 자기 계발서들을 읽다 보면 공통된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다.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열심히 파고들고 계속하다 보면 성공에 이르게 되고, 부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수적으로 따라온다는 이야기다. 간단히 말하면 돈을 목표로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열악한 배경에서 성공을 이룬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말이니 어느 정도 신뢰가 간다. 바딤 젤라드의 '리얼리티 트랜서핑'에도 나오듯이, 자신의 삶이 자신이 목표로 한 목표에 도달하게 하기 위해 인생 트랙을 목표로 가는 트랙으로 옮겨놓으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 공통된 이야기는 돈이 많다고 꼭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돈과 행복은 등식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돈이 많음에도 불행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꽤 있으니, 이 역시 공감이 간다. 한참 '워라밸'이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실제 워라밸을 목표로 삼고 그 목표를 기준으로 삶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대에 태어나 가난을 몸소 겪었던 경험을 발판 삼아 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닌 기성세대들은 지금 세대의 생각과 삶의 행태를 보며 탄식을 한다.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 세대가 기성세대의 삶의 방식과 사고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잘 산다는 것,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그 시대에 맞는,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알맞은 사고와 방식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굳이 돈이 넘쳐나지 않아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부를 누리는 정도로 일하고, 또 그 반대급부로 삶의 여유와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삶이 현재를 이야기할 때 잘 살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베푸는 삶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항상 돈을 더 벌고, 더 여유가 생긴 후에 남도 돕고, 좀 더 베풀며 살아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베풀며 살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소비가 같이 늘어나면 돈은 계속 더 벌어야 하지 않겠는가. 반면 지금 그리 풍족하지 않지만, 단돈 천 원이라도 누군가를 돕고 후원하는 일에 쓰고 있는 사람은 돈을 더 벌면 벌수록 더 많이 베풀며 살 것이다. 그것이 잘 사는 삶이라 생각한다. 켈리 최는 그녀의 저서 '웰씽킹'에서 선한 부자에 대해 설명하며 이웃, 지역사회 등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줄 아는 부자가 진정한 부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부자가 돼서 선한 영향력을 주변에 행사하려면 아까도 말했듯이 베푸는 습관이 배어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어렵다기보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빠듯한 생활 속에서도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들, 몇십 년을 폐지를 줍거나 김밥을 팔아 모은 거액을 사회에 기부하는 어르신들을 보면 진정으로 행복해 보이지 않던가.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아도 사회가 구성되고 돌아가는 데 있어서 구성원 하나하나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서로를 위해 베푸는 삶을 산다는 것은 결국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일 테고, 베푸는 행복과 다시 돌려받는 행복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잘 사는' 삶과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 산다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쉽고, 쉬우면서도 어렵다. 매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때마다 단답형의 네,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고 생각과 말이 계속 길어지는 것처럼 복잡하다. 하나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문제다. 또 개인과 개인을 서로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다. 행복만큼 개인적인 가치관이 반영되는 것도 없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잘 살고 있냐고. 행복하냐고. 질문하지 않으면 답을 생각하지 않는다. 질문했을 때 답이 부정적으로 나오더라도 왜 부정적인 답이 나왔는지 생각해 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내가 잘 살 수 있는 길,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