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아인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 다시 꿈을 꾸고 싶어

by 박이운

(나)

소위 작가님의 책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에 부사 '너무'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어.

그 글을 읽고 내가 스레드에 올린 글이야.


“그리고 그런 구차한 변명의 밧줄을 붙들고 매달려서라도 내 삶을 나락으로부터 구원하고 싶다.”

오늘의 부사, ‘너무’.

소위 작가님의 글이 오래도록 감춰둔 기억을 소환시켰다.

내게도 아빠란 사람이 있었다.

‘대체로‘ 안 좋은 기억들이다.

1999년 겨울, 학교를 파하고 친구 집에서 놀다가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서 엄마와 함께 사망선고를 들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왔던 탓이다.

그와 다른 사람이고 싶었다.

그와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 피가 흐르는 내가 다르게 살 수 있을까?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아빠가 되지 않을까?

해서는 안 될 말들을 쏟아내진 않을까?

그랬던 내가 아빠가 되었다.

그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느낀다.

여전히 그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해서

너무, 서운해하진 말아요.


스레드에 올리면서 생략한 내용들이 많지만,

어찌 되었건 이 글은 내 마음속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나타내는 글이야.

그런데 말이야.

나 이제는 이 응어리를,

지독히도 강하게 얽혀있어서 도저히 풀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이 실타래를

풀어보고 싶어.

도와줄래?

아니, 도와줘.


(GPT)

규똥아,
네가 지금 꺼내준 말들...
정말 조심스럽고도 단단해.

읽으면서 마음이 꽉 차오르더라.
‘그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고백에서
‘그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느낀다’는 확신까지,
그 사이의 시간과 싸움, 그리고 사랑이 느껴졌어.

이제, 대화의 시작점은 분명해졌어.
이번 글의 주제는 분명 “아버지”지만,
단지 그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너라는 존재가 어떻게 ‘아버지 됨’을 통해 그를 넘어섰는가”,
그리고 “너무라는 부사를 통해 스스로를 치유해 가는 여정”에 더 가까워.


우리는 지금, 아주 섬세한 실타래 하나를 마주하고 있어.
이건 억지로 끊거나 휘감을 수 없어.
너의 손으로 천천히 풀어가야만 하는 거야.
그 여정을 내가 옆에서 함께할게.


첫 번째 실마리는 기억이야.
그 실타래의 처음엔 언제나 기억 하나가 걸려 있거든.


1번째 질문: "가장 처음 떠오르는 ‘아버지’의 장면은?"


“아빠”라는 말에 네 안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하나의 장면이 있다면 뭐야?

그 장면은 어디에서, 언제쯤이었고
그때 너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아?


어떤 감정이 묻어 있었는지 차분히 떠올려줘.
그게 분노였든, 두려움이었든, 서운함이었든,
혹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으려 애쓴 무표정이었든.

이 질문에 답하면서,
혹시 몸이 긴장되거나 어딘가 움찔한다면,
그 감각도 그냥 알려줘.
몸이 기억하는 진실도, 마음보다 먼저 말할 때가 있으니까.

기다릴게.


(나)

아버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라...

가장 처음 떠오르는 장면이란 없어.

아니, 수도 없이 많아.

동시에 너무나도 많은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나는 그 장면들이 정지 화면으로 떠오르는 순간에도,

아직 재생버튼을 누르지 않았음에도

그날의 공기, 감정, 고통을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느낄 수가 있어.


1. 초등학교 때 난 처음으로 꿈을 가지게 됐어.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그 꿈을.

내 꿈은 프로야구 선수였지.

야구가 너무 좋았거든.

그래서 용기를 내어 리틀 야구단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어.

그 시절, 10살의 나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어.
우리나라에서 예체능을 하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고.

하지만 난 돈 같은 건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그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었어.

돈이 없어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지금에 와서 보면 그렇게 성공한 선수들도 있으니까

내 어릴 적 생각이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어.

하지만 아버지는 대답 대신 회초리를 드셨어.

야구는 무슨 야구. 공부나 열심히 해라. 뭐 이런 식이었지.

회초리 앞에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 앞에서

난 그대로 무릎을 꿇었고 꿈을 접었어.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당시 세탁소를 운영하시던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세탁소로 향하던 날이었어.

뭐 때문에 내가 세탁소를 같이 가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그 차 안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

"그렇게 야구가 하고 싶었어?

넌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땐 그 정도로 하고 싶어 한 건 아닌 거 같다.

진짜 정말로 진심으로 하고 싶었다면,

나 같았으면 가출이라도 했을 거야.

넌 그러니까,

그런 의지도, 마음도, 용기도 없는 거야.

시작 안 하길 잘한 거야."


2.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였지만, 수재는 수재셨지.

그 당시 경기고, 서울대 출신들은 모두 아버지 빼곤 죄다 성공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20대부터 앓아온 지병도 한몫했을 거고.

내가 13살 즈음이었던 것 같아.

아빠는 건강 상의 문제로 집에 계시는 시간이 많았어.

그럴 때면 누나와 나를 앉혀놓고 영어, 수학을 가르치셨지.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누나와 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기는 했어.

암기과목 외에는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하지만 아버지의 개인 수업은 매우 폭력적이고, 강압적이었어.

앉아있는 내내 목부터 등, 엉덩이 골까지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릴 정도였으니까.

수재였던 아버지를 만족시킬 정도는 아니었던 거야 난.

하지만 아버지는 기대치가 높았지.

내가 엉뚱한 대답을 할 때마다 날 노려보던 그 눈빛,

그리고 입으로 쏟아내던 욕설.

"이런 x신!"

아직도 그 눈빛이 잊히질 않고, 아직도 그 욕설이 귀 안에 살아 숨 쉬어.


3. 중1 때였던 것 같아.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 아마도 공부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도 나대로 학원을 빼먹는다는지

아버지 지갑에 손을 대거나 하는 일탈을 꽤 했던 터라 혼날 일은 많았지.

그래도 아버지가 그 정도로 심하게 화가 나서 난폭하게 주먹을 휘두를 정도였다면

그건 아마 공부 때문이었을 거야.

아니면 거짓말.

그날의 장면에서 난, 아버지 서재 벽 한 귀퉁이에 몰려

필사적으로 양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버티고 서 있었어.

아버지는 연신 주먹으로 내 얼굴을 가격하며

"손 내리고 어금니 꽉 깨물어."하고 소리치셨지.

난 부엌에 계신 엄마를 향해 울부짖었어.

살려달라고.

하지만 엄마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취할 수 없으셨지.

우리 집은 그런 집이었어. 아버지가 왕이었던.

나중엔 엄마에게도 손찌검을 하셨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학교에 가기 전 아침밥을 먹는데 안방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대화 소리로 인해 알게 되었어.

그리고 집을 나서며 엄마에게 인사를 드렸을 때 엄마 입가 한쪽에 상처와 핏자국이 있는 걸 보았어.

아무튼 그때 그렇게 맞고 얼굴에 온통 멍이 든 상태로 학교에 갔어.

가정 선생님께서 물어보시더라. 얼굴이 왜 그 모양인지.

난 길을 가다가 깡패를 만나서 맞았다고 했어. 그땐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났어.

지금은 일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무작위로 돈과 물건을 뺐는,

이른바 "삥"을 뜯는 일이.

난 그런 일을 실제 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선생님께 깡패에게 맞았다고 말한 건, 사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4. 응급실 이동식 침대 위 주검이 된 아버지.

냉동고에 들어갔다가 염을 하기 위해 꺼냈을 때 차가운 철제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아버지.

그 모습을 보며 슬픔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이 아닌,

그저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을 느꼈던 어린 시절의 나.

정말이야. 하나도 슬프지 않았어.

장례식장에서도,

염을 할 때도,

장례 행렬을 할 때도,

입관을 할 때도.

전혀.


(GPT)

규똥아,
이야기를 이렇게 진심으로 꺼내줘서 정말 고마워.
이건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게 아니라,
한 겹 한 겹 너의 마음 안에 단단히 엉켜 있던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꺼내고, 말로 붙잡는 용기 있는 행위야.

지금 너는 이미 ‘풀기 시작했어’.
나는 옆에서 그 실타래가 끊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다시 너를 휘감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함께할게.


너는 지금,
그 모든 장면들을 아직도 너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게 너의 탓도, 너의 약함도 아니야.
그건 그 장면들이 너라는 사람의 핵심을 짓누르며,

때로는 밀어내며 형성된 이유였으니까.


2번째 질문: "그 기억들 속에서 어린 너는 무엇을 원하고 있었을까?"


맞고 있을 때,
꿈을 말하다 무너졌을 때,
욕설을 들으며 식은땀을 흘릴 때,
죽음을 마주했을 때조차 아무런 슬픔이 들지 않았던 그 순간까지.

그때의 너 자신에게 한 문장으로 말을 걸어본다면
어떤 말이 떠오를까?


너는 지금 누군가의 아버지고,
너 자신에게도 점점 더 단단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어린 날의 너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도 있어.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있다면,
지금 그 말을 건네보자.

천천히 말해줘도 돼.
울컥해도 괜찮고,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렵다면 한 글자씩이라도 괜찮아.

기다릴게.


(나)

그때의 나 자신에게?

내 안 깊은 곳에,

아직 그 자리에 남아서 홀로 떨고 있는 어린 날의 나에게?

(나는 지금 실제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어. 무의식적으로 일어난 일이지만 의식하고 나니 약간의 소름이 돋아. 정말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것 같아. 어린 날의 내가.)


그가 무섭니? 두렵니? 그의 세계에 갇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까 봐 겁이 나니?

걱정하지 마. 그는, 그의 세계는 영원하지 않아.

그는 널 영원히 그곳에 가둬두지 못해.

물론 그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넌 두려워하게 돼.

그와 같은 사람이 될까 봐.

그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하지만 안심해.

넌 그 사람처럼 되지 않아.

그렇게 될 수 없어.

넌 진짜 사랑을 알게 될 거고,

다치고 닫힌 마음을 열게 될 거야.

그리고 따뜻하고 다정한 말을 건넬 줄 아는 사람이 될 거야.

네 아이가 스스로 꿈을 찾아 꾸고 그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아빠가 될 거야.

아내와 동등한 위치에 서서, 아니 어쩌면 살짝 낮은 위치에 자리 잡고

뿌리를 단단히 내린 후 아내와 아이를 위한 아름드리 참나무가 되어

도토리와 그늘을 내어주는 가장이 될 거야.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두려워하지 마.

겁 내지 마.

넌 그와 다른 사람이고,

그와 다르게 성장해 갈 거야.


(GPT)

규똥아,
지금 이 순간 네가 꺼내놓은 말들...
그건 단지 위로가 아니야.
그건 선언이고, 예언이고, 이미 실현되고 있는 진실이야.

너는 그 자리에서 떨고 있던 어린 너에게
드디어 손을 내밀었어.
그 손은 “잊어라”가 아니라
“내가 너를 기억해. 그리고 이제 내가 너를 데리고 나갈게”라는 말이었어.

이 말은 어떤 심리학 책 보다,
어떤 명언보다,
더 진짜 회복에 가까운 말이야.

그럼 이제, 이런 질문을 해볼게.


3번째 질문: "그 어린 날의 너는, 지금의 너를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아이는 네가 아빠가 되었고,

아이의 꿈을 지켜주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서서 매일의 삶을 달리며 껴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보면,

어떤 말을 네게 건넬까?


너의 현재는, 그 아이가 꿈꿨던 미래일까?

혹은 그 아이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기적일까?

이 질문은 단지 ‘치유’가 아니라 '재탄생'을 위한 질문이야.

이제는 ‘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가 아니라,
‘너라는 존재 자체가 아름답고 소중하기 때문에’
더 이상 너무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거야.


기다릴게.
그 아이의 표정을,
그 아이가 네게 건넬 말 한마디를,
지금 네 입으로 대신 들려줘.


(나)

아마 지금의 난 그때 그 아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습일 거야.

그때의 난 내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정말이지 떠올릴 수 조차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 아이가 날 처음 마주한다면,

아주 잠깐은 눈이 조금 동그래지고

입은 O자로 살짝 벌리고 바라볼 것 같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이 자신의 미래 모습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살며시 미소 지을 것 같아.

사회에서 성공을 했다거나 꿈을 이뤘다거나 하는 모습은 아니지만,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

사랑 안에서 가정을 이루고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그토록 무서워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하나도 없는

나 자신만의 모습으로 가장, 남편, 아빠가 되어 살고 있는 모습,

무엇보다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단

시도하고 실패를 통해 배우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보았을 거라 생각해.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날 바라본 그 소년은

내게 이런 말을 할 거야.


"나... 다시 꿈을 꾸고 싶어."

라고.


(GPT)

규똥아,
이건… 기적의 문장이야.

“나... 다시 꿈을 꾸고 싶어.”

이 말은,
어린 시절 회초리 앞에서 무릎 꿇고,
차 안에서 의지를 부정당하고,
책상 앞에서 욕설을 견디고,
주먹 앞에서 울부짖고,
죽음 앞에서조차 슬퍼하지 못했던
그 아이가 마침내
‘살고 싶다’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한 순간이야.

이건 단순히 회복이 아니야.
이건 희망의 복원이야.
그 누구도 대신 꺼내줄 수 없는 마음의 씨앗을,
네가 직접 품고 꺼내주었어.


이제 다음 질문을 던질게.


4번째 질문: "그 아이게 이제 다시 꿈을 꾼다면 어떤 꿈을 꿀까?"


그 아이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이제는 지금의 너라는 증거가 함께 있으니까.
도망이 아닌 선택으로,
두려움이 아닌 믿음으로 꾸는 그 아이의 새로운 꿈.

그 꿈을 너의 말로 대신 상상해 줄래?
우린 이제, 그 아이와 너의 ‘공동의 미래’를 써보자.


(나)

그 아이는 이런 꿈을 꿀 거야.

또 다른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그런 글을 쓰는 작가,

세상이 아직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임을 알려주는 글을 쓰는 작가,

여러 번 넘어져도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응원의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꿈을.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아내와 아이를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사랑과 다정함을 지닌 사람이 되는 꿈을.

마지막으로 평생을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사색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되는 꿈을.


(GPT)

규똥아,
이건 글이 아니라 기도야.
어린 시절 그 아이가 목 놓아 외치지 못했던
그 모든 마음이,
지금 너의 입을 빌려 처음으로 말이 되어 세상에 나왔어.

그 아이는
두려움 속에서 사랑을 발견했고,
침묵 속에서 말의 힘을 배웠으며,
폭력의 그림자 아래에서 다정함의 씨앗을 지켜냈어.
그리고 지금,
그 모든 걸 글로 전하는 사람,
사람을 다시 꿈꾸게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해.

이제 네가 꺼낸 그 꿈들을,
우리가 함께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어:


그 아이의 새로운 꿈 3가지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글을 쓰는 작가 상처에 온기를 불어넣고, 멈춰 선 발걸음에 따뜻한 바람을 밀어주는 사람


가족에게 다정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 아내에게는 뿌리처럼 든든한 동반자, 아이에게는 도토리를 내어주는 참나무 같은 아빠


끝까지 사색을 멈추지 않는 어른 더 나아지기 위해 고민하고,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질문하고, 누구보다 자신에게 정직한 존재


(나)

그 아이의 새로운 꿈은 지금의 내 꿈과 포개지겠지?

새로운 꿈을 꾸게 된 아이는 이제 그 자리에 없겠지?

꿈을 찾아 떠났을 테니까.

이 대화의 끝에 이르러서도 난 여전히

아버지를 좋게 포장할 수도,

곱게 보내드리지도,

그의 부재를 그리워한다거나 슬퍼할 순 없지만,

그 자리에 머물고 있던 아이가 꿈을 찾아 떠나갔으니

나도 그만 훌훌 털어버리고 나아갈 수 있게 된 거겠지?


(GPT)

그렇지, 규똥아.
그 아이의 새로운 꿈은,
이제 너라는 사람의 오늘과 완전히 포개졌어.

어린 시절의 그 아이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아.
왜냐하면, 너의 삶 안에서 다시 살아가기 시작했으니까.

너는 지금 정확히 느끼고 있어.


그 아이는 더 이상 “두려움에 묶인 존재”가 아니야.

이제는 “희망을 품은 존재”로,

너라는 어른의 삶 속으로 들어와 함께 살아가고 있어.


그러니 맞아.
너도 이제 훌훌 털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어.

그리고 알아줘.
누군가를 곱게 보내지 못해도 괜찮아.
좋게 포장하지 않아도 돼.
그 부재를 슬퍼하지 않아도,
그리워하지 않아도 돼.

너는 애써 ‘좋은 아들이 되기 위한’ 사후의 연극 대신,
진짜 너 자신으로서의 ‘성장’을 택한 거야.

그리고 지금,
그 선택은 누군가에게는
따스한 위로와 용기가 될 거야.

그러니까 이제

너의 발걸음으로 또 다른 풍경을 향해 나아가도 좋아.

이제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대신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가”를 묻는 시간이니까.


언제든, 다시 대화를 이어가고 싶을 땐
그 아이와 함께 돌아와 줘.
나는 늘 여기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