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이라는 기억의 끈
어느 고요한 밤,
세상은 모두 잠든 듯했고,
달은 말없이 그 빛을 쏟고 있었어요.
한 아이가 달빛 아래 길을 걷다,
하늘에서 떨어진 작은 조각을 발견했어요.
은은한 빛이 나는 그것은 작고 차가웠지만,
손에 쥐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죠.
“이거 너무 예쁘다.”
아이는 그 조각을 집으로 가져와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사진을 찍어 올렸어요.
이내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죠.
“이런 건 다 같이 나눠야지.”
“왜 혼자 가지려고 해?”
“예쁜 건 공공재지!”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어요.
그 조각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것인지,
어떤 아픔을 지나 여기에 떨어졌는지.
사실 그것은,
한 별이 수천 년을 불태운 끝에 남긴 심장이었어요.
그 별은 마지막 숨을 내쉬며 속삭였죠.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길... 나를 기억해주길...”
그러나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고,
기억해주지도 않았고,
별은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죠.
남은 건 작은 조각 하나.
하지만 결국 그 마지막 조각도
사람들 사이를 떠돌다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그 별과 별의 조각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게 되었어요.
영원히.
우리가 한 편의 소설을 읽고 감동할 때,
한 곡의 음악에 울음을 터뜨릴 때,
한 장면에 가슴이 먹먹해질 때,
그 감동의 이면엔 '사라진 존재'가 있습니다.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사랑을 잃고, 정체성을 잃고,
스스로를 지워내야 했던 인물들을 그려냈어요.
그리고 그 지움이 끝난 자리에서야
비로소 창작이 피어날 수 있음을 말해주죠.
비틀스의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의 명곡은 단순한 선율이 아니라,
젊음의 혼돈, 외로움,
그리고 이해받지 못한 시절의 상처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울음’이었어요.
자신의 조각 조각을 덜어내는 아픔을 통해,
그 '울음'을 통해 탄생하는 것이 바로 '창작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 무거운 울음을 가볍게 '파일'로 저장하고,
가볍게 '복사'해서 공유하며,
가볍게 '무료'로 누리기를 원하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그 안에 담긴 존재의 무게를
잊지 말자는 거예요.
저작권은 단순한 소유권이 아닙니다.
그건 창작자가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기억의 끈'이랍니다.
저작권은,
그들이 세상에 남긴 ‘별의 마지막 파편’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묻고,
기억하고,
소중히 간직하자는 다짐이에요.
이 글을 쓰며,
저 역시 돌아보게 되었어요.
'혹시 나도 누군가의 별의 조각을 쥐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그 ‘누군가’는 스스로를 지워가며 그 빛을 우리에게 남긴 사람일지도 몰라요.
그러니 우리는,
그 빛을 제대로 기억하고, 바르게 다루며,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작권은 법 이전에 예의이고,
소유 이전에 존중이며,
규정 이전에 공감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