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나 (3)

#3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by 박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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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타 씨는 자신이 텅 비었다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호시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인물 나카타를 만나 그를 도우며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러 알을 깨뜨리고 세상으로의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인물이다. 나카타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이유로 트럭에 태워 그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돕는 과정에서, 호시노는 신기하게도 타인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아주 깊숙이 들여다보게 되는 경험을 한다. 자신이 텅 비어있다고 말하는 이 노인은 텅 비어있음에도 왜 이리 '위인'같다 여겨지는 것일까. 그는 '텅 비어있다'는 노인 나카타의 말을 듣고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찌 보면 <해변의 카프카>에서 나를 가장 닮은 인물은 카프카 군도 나카타도 아닌, 호시노일지도 모른다.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나>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호시노를 통해 풀어보는 나의 이야기를 담아 보려 한다.




호시노는 자신이 꽉 차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주니치 드래건스 야구팀을 마치 자신의 분신이라 여기는 듯 진심으로 열렬히 응원을 하며 살아왔고, 만나는 이성이 있을 땐 다른 이성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그 상대에게만 집중했다. 또 일은 어떤가. 트럭을 모는 일을 하면서 요령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했고, 사장이 누군가가 펑크 낸 일을 호시노에게 맡겼을 때도 군소리 없이 무조건 '네!'하고 그 부름에 달려가 일을 맡아 완수했다. 풍족하다거나 하는 삶은 분명 아니었지만,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다고 여길 만한 삶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랬던 호시노가 나카타를 만나 혼란에 빠져 버렸다. 왜 텅 빈 나카타와 동행하면서 점점 자신이 실체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 시작한 것일까.


"그냥 살아가면 됐다. 살아 있는 날까지, 내가 어떤 존재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자연히 그렇게 돼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렇지 않게 됐다. 살아가면서 점점 나는 아무 존재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응원하는 야구팀이 있다. 엘지 트윈스.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93년, 난 아버지를 따라 처음 잠실 야구장에 가게 됐고, 현장에서 어린이 회원 등록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부로 엘지 트윈스의 열혈팬이 되었다. 서울 태생이신 아버지가 MBC 청룡 - LG Twins를 응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그의 아들인 나도 자연스럽게 팬이 된 것이다. 이후 난 야구에 살고 야구에 죽는 삶을 살았다. 거의 매일같이 집에서 야구 시청을 하며 '우리 팀이 이기게 해 주세요, 제발!' 하며 모태 신앙의 힘을 응원하는 야구팀의 승리에 쏟아부었고, 유일하게 친구들보다 잘하는 운동이 야구가 되자 자연히 야구 선수의 꿈을 꾸게 되었다. 부모님의 반대로 꿈은 접게 되었지만, 어쨌든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나도 호시노처럼 야구팀 응원에 진심이었다는 점이다. 과연 의미 있는 것이었을까.


일에서도 난 호시노를 닮았다.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무렵, 매일 12시까지 이어지는 야근과 특근 수당이 나오지 않는 주말 출근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다들 그렇게 살기에 내가 그 삶에 적응해야 한다고만 여겼다. 조금은 낫겠지 하는 생각으로 이직한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퇴근 시간은 한국에서 보다야 빨라졌지만, 업무를 따라가려면 기숙사에서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그러려니 했다. 그게 삶이라고 생각했다.


호시노는 나카타를 만나기 전까지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았다. 그런 호시노의 이야기를 통해 난 과거의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시노카 텅 빈 나카타의 모습을 거울삼아 자신을 비춰 보았듯, 난 호시노를 거울삼아 나를 들여다본 것이다.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과거의 나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무런 목표나 계획이 없이, 남들 하는 대로, 살아지는 대로,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사는 청년. 돈도 벌고 싶고, 가정도 꾸리고 싶고, 여유롭게 살고 싶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룰 수 없는 소망으로 치부해 버리고는 출근, 일, 퇴근, 잠, 출근의 일상이 당연하다는 듯이 살아왔던 철없는 젊은이. 분명 살아가고 있는데, 살아가고 있기에 나라는 존재가 그토록 분명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살아가면서 점점 아무 존재도 아닌 것이 되어갔던 것이다. 호시노도, 나도.


"그래서 말인데, 왜 그렇게 됐는지 생각해 보니까, 내가 줄곧 나카타 씨 옆에 있었기 때문인 거야. 그리고 나카타 씨의 눈을 통해 사물을 보게 됐기 때문인 거야. 물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나카타 씨의 눈을 통해 본 것은 아니지만 뭐랄까, 극히 자연스럽게 난 아저씨의 눈을 통해 여러 가지 것을 보고 있었던 거야. 왜 그렇게 했냐면 아저씨의 세계를 보는 자세가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일어난 일 가운데 제일알맹이가 있는 일이야."


하지만 내가 과거의 호시노만을 닮은 것은 아니다. 호시노가 아주 우연히 나카타를 만나 자신의 실체 없는 존재를 자각하고 결국 다른 사람이 되어 멘션을 나섰듯, 나도 우연히 달리기를 만나 나를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고 꿈을 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키가 그린 호시노라는 인물은 20대 후반의 아주 젊고 앞날이 창창한 청년이고, 난 벌써 불혹을 넘긴 나이라는 점에서 그와 나의 차이는 확연하다. 그럼에도 내가 '기버'의 삶을 살겠다며 죽어있는 나카타에게 작별을 고한 후 가방을 둘러메고 멘션을 나선 호시노와 나를 여전히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멘션을 떠나는 장면에서 느껴지던 그의 마음가짐이 마치 트레이싱 페이퍼 위에 따라 그린 것처럼 지금 내가 매일을 살아가며 가슴에 품고 있는 마음가짐과 거의 정확하게 포개졌기 때문일 것이다.


호시노가 운동화 끈을 조이고 멘션을 나선 후 정확히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사실 이 부분이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묻고 싶었던, 굳이 꼽으라면 아주 아주 어렵게 꼽을 수 있는, 정말 미세하고도 유일한 단 하나의 아쉬운 점일 것이다. 카프카 군으로 시작해 나카타에 이르러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에 다가가고 있다 여겼는데, 결국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덮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단연컨대 호시노였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카프카 군이 집으로 돌아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것보다 호시노의 소설 이후 여정이 진심으로 더 궁금했다.(카프카 군은 굳이 내가 궁금해하고 들여다보지 않아도 잘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 것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카프카 군은 열다섯 나이 치고는 너무나도 성숙하지 않았던가.)


"이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말이야, 베토벤이 나한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호시노,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좋지 않은가? 인생이란 그런 거야. 나도 사실은 꽤 못된 짓을 하면서 살아왔다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어찌어찌하다 그렇게 된 거니까. 지금부터 다시 열심히 살면 되는 거야’ 하고 말이야."


“그렇다면 그 녀석을 죽여야 해. 압도적인 편견을 가지고 단호하게 말살하는 거야. 그게 바로 나카타 씨가 원했던 일이거든. 나카타 씨를 위해 자네가 그 일을 하는 거야. 자격을 물려받는 거지. 자네는 지금까지 인생을 줄곧 책임을 회피하며 대충 살아왔어. 지금이 그 빚을 갚을 때야. 실패하면 안 돼. 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마 응원할 테니까.”


호시노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눈에서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의미의 눈물이 흐름을 감지했고, 이내 그 눈물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리고 나카타가 완수하지 못한 임무를 물려받아 '압도적인 편견을 가지고 단호하게' 완수한 뒤 길을 떠난다. 아마 그가 죽여야 했던 희끄무레한 그것은 과거의 자신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루키가 여러 작품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는 모두 어김없는 나임에 틀림이 없고, 그 과정을 지나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나인 것도 맞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과거의 나와 연결을 끊어 버리고 아예 새로운 나로 변화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고도 생각한다. 헤세의 말을 빌리면 알을 깨고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호시노가 나카타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러 과거의 자신을 말살하고 새로운 인생을 향해 첫 발을 내디딘 것처럼, 나도 호시노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니 과거의 우둔했던 나를 내가 깨뜨린 알의 껍질과 함께 땅 속에 묻어두고 새로 태어난 나로 살아가야겠다 다짐을 해본다.




“난 말이야, 아저씨, 이렇게 생각해” 하고 청년은 말을 계속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나카타 씨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말할까, 나카타 씨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할까, 하고 일일이 아저씨를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나카타 씨의 일부가 앞으로도 내 안에서 계속 살아가게 되는 거야. 하긴 그다지 쓸 만한 그릇이 아닌 건 분명하지만, 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어?”


내 그릇도 그다지 쓸 만한 그릇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담지 못할 정도로 나쁘지는 않다고 믿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내 안에 이 세 명의 인물을 조심스레 담아보려 한다.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카프카, 텅 비어 있으면서도 충만했던 나카타, 그리고 나카타를 통해 마침내 삶의 방향을 바꾼 호시노. 그들의 눈을 빌려 나의 길을 비춰보려 한다. 지금도 여전히 불완전한 나지만, 그 불완전함조차 안고 살아가기로 다짐하며,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나> 연재는 이것으로 마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