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의 단어는 ‘버티기’였다. 한 해를 반추해 보았을 때, 힘든 기억부터 떠올랐다. 퇴근 후 터덜터덜 돌아다닌 부동산 임장과, 주경야독의 대학원 생활, 연초부터 생긴 사고. 어떻게 그 기간들을 버텨냈는지 스스로가 대견할 정도이다. 살면서 어서 빨리 한 해가 지나가기를 바랐던 해는 올해가 유일했다.
2023년들의 굵직한 일들만 떠올려보면,
1. 독서 모임의 운영
- 어쩌다 보니 독서모임장이 되어있었다. 학생 때 독서모임은 이따금씩 일회성으로 참가만 했었다. 그러다 운이 좋게도 좋은 구성원들을 만났고, 일회성이 아닌 정기적인 독서모임이 이어졌다. 그리고 점차 구성원이 아닌 모임 리더로 모임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약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독서모임을 운영하면서 나름의 시스템이 갖춰졌다. 책을 읽는 습관도, 책을 오래 기억하는 방법도 자연스레 익히게 되었다. 더불어 책을 매개로 좋은 사람들과의 대화도 올 한 해의 큰 수확 중 하나이다.
2. 동생의 결혼
- 9월, 가장 아끼는 가족의 결혼식이 있었다. 이전부터 예상했다 동생이 먼저 결혼을 할 것 같았다. 오빠에 비해 비교적 성격이 무던한 동생은 안정적인 연애를 오랜 기간 이어왔다. 이해심이 넓은 처형 덕분일 수도 있지만, 둘은 숱한 난관을 함께 헤쳐내고 결혼에 골인했다. 아직도 문이 열리고 동생이 ‘Altar’로 올라오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동생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도하고, 앞날을 무한히 축복해 줄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한 사람을 무한히 사랑한다면 이러한 느낌일까. 동생한테 느끼는 감정만큼 사랑을 나눠줄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또 하나의 목표이기도 하다.
3. 사건의 해결
- 나의 우주가 무너져버린 상반기였다. 말 그대로 사색이 되어 돌아다녔다.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커리어와 주변 사람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우연찮게 맞닥뜨린 사고는 공황장애를 일으킬 만큼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얼마나 큰 지,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동물인지 알 수 있었다. 지옥 같았던 2023년의 봄도 꾸역꾸역 지나갔다. 여름의 초입에서 그간 힘들었던 사고가 해결되었고, 그와 동시에 좋은 소식도 많이 들려왔다. 시간이 흘러 연말인 지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쾌활하다. 역시 시간이 많은 부분을 해결해 주었고,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몸소 느낄 만큼 넓어진 나의 그릇이었다. 웬만한 풍파는 견뎌볼 수 있겠다는 생각과 겸손함을 장착할 수 있었던, 어쩌면 내게 필요한 일 중 하나였을 수도.
4. 미국 연수
- 책을 읽거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 많은 사람들이 ‘시야가 확장되었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개인의 차원에서 표현하는 '시야의 확장'은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그 범위도 모호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으로 얼마나 시야가 확장되었는지, 정말로 시야가 넓어진 것은 맞는지 항상 궁금했다. 아마 그동안 시야가 트이는 느낌을 제대로 못 느꼈기 때문에 생긴 궁금증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올해의 미국 연수는 이 궁금증을 단번에 해결해 주었다. 하늘을 찌르는 뉴욕의 마천루와, 마치 알던 사람인 양 아침인사를 나누던 더럼의 주민들, 낯섦의 연속이었던 듀크대학병원의 시스템은 나의 작고 고착된 세계관을 산산조각 내었다. 한국의 수도인 서울이 자그마하게 느껴졌다. 살면서 이룰 커리어와 맺을 관계들을 ‘작은 도시’ 중 하나인 서울에서만 끝낼 수 없었다. 꿈을 몇 배는 더 키워온 3주간의 미국 연수였다.
5. 전공의의 마지막 한 해
- 지난 4년간의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이 곧 끝난다. 전공의 시절에는 한 달마다 속하는 과가 바뀌었다. 매달 말 인계를 받고, 인계를 해주며 새로운 업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바뀌고, 모셔야 하는 교수님이 달라졌다. 매 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였다. 그렇게 4년이 지나갔다. 남은 전문의 시험을 예정대로 큰 문제없이 치른다면 내년에는 한 달 살이 업무는 더는 없을 예정이다. 대학병원을 떠나는 친구들도 있다. 또 한 번 각자의 선택과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고민 끝에 ‘펠로우’라는 전문의 과정으로 대학병원에 남아있을 예정이자만, 결정을 내린 지금도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정리를 하고 돌아본 2023년은 직업적으로나 관계적으로나 꽤나 의미가 있었던 한 해였다. 겪어보지 못한 고난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해 주었고, 취미가 수입원이 되었으며, 꿈의 크기가 커졌다. 그리고 동생을 통해 한층 더 깊은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마냥 ‘버티기’의 시간은 아니었던 셈이다.
조지 오웰은「1984」에서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라고 말했다. 과거는 현재에서 재해석한 사건인 셈이다. 따라서 개인의 과거는 현재의 '나'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언제 또 어떻게 올 한 해 일어난 일들을 재해석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의 상태는 꽤 괜찮은 편인가 보다. 어쩌면 세상살이 별거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때그때 나의 입맛에 맞게 마음 편한 쪽으로 의미부여를 하다 보면, 죽을 것 같이 힘든 과거도 단단한 지지대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나’를 위한 끊임없는 이기적인 의미부여를, 아마 맞이하는 2024년에도 지속해도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보며 늦은 한 해의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