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시 시절에는 영어가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가장 성적이 안 나오는 과목이 영어였다. 특히 고3시절 1년간 준비했던 텝스(TEPS) 시험은 답답함 그 자체였다. 온갖 수를 써도 정체된 채 올라가지 않던 점수는 여러 번 좌절하게 만들었다. 성인이 된 후엔 군입대나 취업처럼 점수가 필요한 시기를 제외하고 영어는 쳐다도 안 봤다. 다시 영어에 흥미를 느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영어에 관심이 생긴 건 7년 전, 의과대학 동기들 때문이다. '덕분'이 아니라 '때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시작 동기가 유쾌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의대 동기들 중에서는 외국에서 살다 온 친구들이 많았다.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한 친구들도 있었다. 대화 도중 영어는 자연스럽게 나왔고 특히, 술자리에선 영어가 난무했다. 수능 문제에만 익숙했던 나에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영어 일상 대화는 어색하기만 했다. 떠들다가도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 표현에 머쓱함과 함께 술이 깨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대 동기들은 평생을 함께할 너무 좋은 친구들이었다. 마침 당시 여자친구도 캐나다에서 학교를 나온 유학생 친구였다. "Peer pressure"라고 자연스레 영어를 잘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주말마다 회화학원을 다니고 전화영어를 시작한 건 그 무렵이었다. 점수를 위해 시작한 영어 공부가 아니었다. 단지 영어를 더 편하게 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덕분에 부담 없이 꾸준히 지속할 수 있었다. 하나씩 알아가는 표현에 흥미를 느끼다 보니 점차 항목이 늘어났다. 회화 학원만 다니다 주 5일 전화영어를 시작했고, 팟캐스트를 듣기 시작하더니, 유튜브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정해둔 목적이 없다 보니 기한이 없었고, 꾸준히 하다 보니 습관이 되어버렸다. 점차 '영어 공부하는 시간'이 아니라 '영어 하는 시간'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고 영어 하는 시간이 줄어들까 염려했지만, 그 반대였다. 인턴 잡을 하면서도 빈 병실을 찾아 전화영어를 했었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에는 단어장 어플을 보기 시작했다. 일과 일상 틈틈이 영어 루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비교적 주 88시간이 칼같이 지켜지고, 퇴근하면 더 이상 병원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인턴 시절에는 영어 루틴을 지키기 쉬웠다. 어려웠던 시기는 전공의 1년 차 시절이었다. 주치의가 되고 내 환자, 내 전공이 생기면서 병원이 아닌 공간에서도 병원 생각을 해야 했다. 주말 투오프가 한 달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스케줄 덕에 회화학원은 사치였고, 말만 주 88시간이지 병원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주 100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래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폭풍 같았던 전공의 1년 차 3,4월이 지나자 다시 영어를 시작했다. 팟캐스트와 유튜브, 전화영어, 안키드로이드 단어장, 넷플릭스, 영작 카톡방 등 해왔던 영어 루틴을 일상 틈틈이 넣었다. 블로그의 '병원 일상 속 영어습관' 포스팅은 그 습관을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 포스팅은 2-3년 전인 2021년 11월에 머물러있다. 포스팅은 3년 전이 마지막이었지 몰라도 그동안 영어 습관은 'on and on'이었다. 여전히 식사 시간에 프렌즈를 보고, 주 5일 새벽 6시에 전화영어를 한다. 매일 단어장을 보고, 출근 준비시간에는 테드(Ted)를, 출퇴근길에는 all ears english 팟캐스트를 듣는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하루 2 문장 영작'이다. 이전에 만들었던 영작방은 더는 하지 않는다. (나를 제외하고 다른 분들은 여전히 영작방을 사용 중이다.) 그 시간은 'Chat GPT'가 대체했다. 'Chat GPT'에 요구만 하면 영어 문장 교정과 새로운 표현을 즉시 알 수 있었다. 다만 "Listening"보다 "Writing"은 훨씬 더 적극적인 방법이었다. 그냥 듣는 것과 쓰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훨씬 더 귀찮고, 부담스러웠다. 'Chat GPT'에 매번 적절한 명령문을 쓰고 피드백을 받는 것도 일이었다. 대화가 길어지다 보면 이전에 요구했던 문장 교정은 온데간데 사라지기도 했다.
이러한 번거로움은 최근 Chat GPT 4를 사용하면서 해결되었다. 나만의 영어 학습 플러그인을 만들 수 있었다. 덕분에 매번 입력해야 하는 명령문과 오류의 과정이 해결되었다. 적절한 대답과 이어지는 질문을 해주고, 사용자가 쓴 문장에 대해서는 문법적인 교정 혹은 더 나은 표현으로 바꾸어주도록 만들었다. 사용자는 그냥 영어로 대화를 나누기만 하면 되었다. 문장에 대한 피드백은 Chat GPT가 지속적으로 해주었다. 플러그인 이름은 "English Buddy"로 설정했다. 처음에는 혼자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모두에게 공유할 수 있었다. Chat GPT 4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English Buddy"를 사용할 수 있다.
회화 학원을 시작으로 플러그인을 개발하기까지, 지난 6년의 영어 루틴 정착기가 헛되지는 않았다. 이제는 '유창'까진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말문이 막히는 일은 없다.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아는 단어로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큰 맘먹고 완성된 문장을 내뱉는 영어가 아닌, 일단 문장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어는 어렵다. 갈 길이 너무나도 멀다. 프렌즈 전 시즌을 3번씩이나 돌려보아도 볼 때마다 생소한 표현들이 많다. 알면 알수록 더 의외의 표현이 늘어났고, 담고 있는 뜻이 늘어나는 게 영어였다. 왕도가 없었다. 쓴다고 해서 느는 건 아니었지만, 안 쓰면 바로 까먹는건 확실했다. 하루에 5분이라도 꾸준히 해야 했다. 영어는 특정한 목표지점을 가지고 달리기 하듯 하는 과목이 아니었다.
"Atomic Habit"의 저자 제임스 클리어는 '목표보다 시스템'이라고 했다. 목표는 우리가 얻어내고자 하는 결과이며, 시스템은 그 결과로 이끄는 과정이다. 특정 수준의 영어 실력을 설정해 두고 그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선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매일 영어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결과로 이끄는 과정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게 영어는 목표보다 시스템이 우선시되는 '평생의 학습 과목'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