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노인의 무료 승차 나이는 만 65세다. 반면 병원에서 만 65세면 젊은 축에 속한다. 갈수록 고령 환자가 많아지면서 최근에는 88세 대장암 수술 환자 케이스도 보았다. 비교적 환자 연령대가 젊다는 외과에서도 고령 환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내과는 말할 필요도 없다. 병원은 초고령 사회로의 변화를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워낙 고령 환자들이 많다 보니 회진 때 호칭은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이다. 비교적 젊은 환자들은 'OO 님'이라고 칭하지만 일정 나이 이상에선 '님' 대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불쑥 나올 때가 많다. 환자를 보는 내 입장에선 훨씬 더 친근한 호칭이지만 환자분들이 어떻게 느끼실지는 의문이다. 충분히 고령환자를 존중하며 대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찰나 교수님과의 회진에서 생각지 못한 울림을 얻었다. 교수님은 고령 환자들에게 항상 '어르신'이라고 칭했다. '어르신'이라고 칭함과 동시에 목소리를 한층 더 키우신다. 귀가 어두운 고령 환자들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교수님이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한참 어린 나보다 훨씬 더 나이에 대한 존중이 느껴졌다.
내게 '나이'는 단순히 해가 지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해가 지나고 생일을 한 번씩 더 맞이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연장자에게 존댓말을 해야 하는 한국어보다 반말과 존댓말이 특별히 구분 없는 영어가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해씩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느끼는 '나이'는 새삼 그 의미가 달랐다. 단순히 본인의 나이가 많아졌기 때문에 '나이'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최근 겪게 된 크고 작은 시련은 나이와 어른에 대한 시선을 달라지게 해 주었다.
작년과 올해, 공사를 막론하고 여러 이슈들이 불어닥쳤다. 생각보다 후폭풍도 컸다. 우울한 생각은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았고 길게는 며칠, 몇 달 동안 나를 잠식하기도 했다. 항상 건강할 줄만 알았던 착각이 가차 없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 자리는 불안으로 채워졌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삶을 고통'이라고 말한다. 이 진리들을 뼈저리게 느꼈던 기간이었다.
이 기간을 거치고 돌아본 주변은 달랐다. 지하철에서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들에게 인사를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할머니는 대단한 분이었다. 가정을 일구고 손자들이 크는 모습을 보기까지 견뎌낸 삶의 굴곡은 상상할 수도 없다. 특히 수술을 이겨내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고령의 환자들은 끊임없이 삶을 이겨내고 있었다. 사연이 없는 개인은 없었고, 그 사연이 가져다주는 희로애락은 결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아니었다. 우리 주변의 어르신들은 불안과 두려움이 난데없이 찾아오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을 버티고 극복하신 분들인 셈이다. 그들이 버텨낸 시련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절로 고개가 숙여질 것이 분명했다.
과거에는 연장자 존중에 대한 이유를 그들이 가진 삶의 지혜와, 이룬 업적에서 찾았다. 지금은 그보다 그들이 겪어낸 세월 자체가 존중의 이유가 되었다. 나잇값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을 잘 살아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에서 그 값은 충분했다. 그들의 삶 자체가 존중받아야 할 마땅한 이유였다. 어쩌면 삶은 가능성으로 가득 차있다는 젊은 날의 의기양양함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빈자리는 오히려 현재에 대한 감사와 겸손으로 채워지고 있다. 앞으로 30년 정도 뒤에 찾아올 나의 만 65세에는 어떤 삶의 굴곡을 또 지나고 있을지. 아마 여전히 시련에 힘들어하고 그 후의 일상에 감사해하며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을 끊임없이 배우고 있지 않을까.
끝으로,,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는 신구갈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듯하다. 나이 듦을 단순한 연약함이나 의존성으로 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는 젊음을 미덕으로 여기고, 노화는 불가피한 쇠퇴로 여기는 인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초고령화 사회를 맞이하는 현대에는 달라져야 한다. 오히려 나이 듦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호칭은 인식 변화의 시작이다. 교수님이 칭하는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노인에 대한 존중뿐 아니라, 그들의 삶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는 의지일 수도 있다. 앞으로의 회진은 환자들에게 다른 호칭으로 다가가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