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의가 되고 펠로우의 연차가 쌓일수록 점차 수술에 대한 책임이 커져갔다. 우연찮게 기회가 생겨 집도의 자리에서 수술을 하는 날에는 그 부담감이 평소보다 배에 달했다. 집도의의 자리는 그동안 항상 어시스트만 했던 전공의에게 한없이 낯선 위치였다. 수술을 돕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그 괴리가 상당했다. 어시스턴트 자리에서 수없이 지켜본 수술도 막상 집도하려 하면 순서가 헷갈리거나, 피가 유난히 많이 난다거나, 기구가 말을 듣지 않기 일쑤였다.
이번 복강경 담낭 절제술도 마찬가지였다. 복강경 담낭 절제술은 전공의 때도 여러 번 해왔던 수술이었다. 꽤나 간단한 수술 중 하나였고, 별문제 없이 끝난다면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수술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하게 된 이번 복강경 담낭 절제술 케이스는 예상외로 난이도가 상당했다. 간으로 덮여 보이지 않는 담낭에, 기구로 잡는 조직마다 찢어졌다. 수술 시작부터 감이 좋지 않았다. 예상대로 정상 해부학 구조는 쉽게 보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피가 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등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금방 끝났어야 할 수술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었다. 오롯이 혼자서 끝마쳐야 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 사투를 벌였다. 보이지 않는 출혈 부위를 겨우 찾아 잡는 과정은 당시 내게 숨도 쉴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당황하지 않은 척했지만, 한 평 남짓 되는 수술 공간 안에서 혼자만의 지진을 겪었다. 어깨와 팔꿈치는 경직되었고, 손아귀에는 힘이 들어갔다. 무릎과 발목이 뻣뻣하게 골반을 지탱했고,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된 채 혼자만의 사투를 이어갔다. 모든 힘겨운 시간이 그러듯 못할 것만 같던 수술도 끝이 났다. 어려웠지만 결국 수술은 잘 마무리되었다. 다만 이 과정은 환자도, 옆에 있던 간호사 선생님도, 마취과 선생님도 모른 채, 나만 알고 있는 고요한 전쟁이었다. 수술 가운을 벗자 땀으로 흠뻑 젖은 등이 해방된 듯 시원하게 느껴졌다.
포커페이스.
수술을 거듭할수록, 외과 의사에게 필요한 능력은 '포커페이스'였다. 집도의의 당황은 곧 수술방의 모든 사람에게 전달된다. 집도의가 서두르고, 긴장하면 어시스턴트들도 덩달아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동시에 수술방의 분위기까지 달라진다. 그 불편한 분위기는 고스란히 환자에게 전달된다. 결국, 수술의 결과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집도의는 한없이 차분해야 한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능력은 수술자에게 수술 스킬만큼 필요한 덕목이었다.
이런 포커페이스는 나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선배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반복되었다. 내시경도 마찬가지였다. 소화기내과를 전공했던 학교 선배의 에피소드를 아직까지 기억한다. 지금은 벌써 교수님이 된 선배도 한창 내시경 경험을 쌓아가던 펠로우 시절이 있었다. 대장에 출혈이 있는 환자의 응급 지혈술 내시경을 하는 날이었다. 피로 가득한 시야에, 마치 피 속에서 헤엄을 치는 기분이라 묘사했던 선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당황함을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하느님, 부처님' 온갖 신을 찾았다고 한다. 새 운동화에 피똥을 맞아가며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던 대장 내시경은, 선배의 펠로우 시절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고 한다.
감정을 제어하고 타인에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능력은 때로는 차갑고 비인간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 무표정이 상황을 현명하게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누구나 다급한 순간엔 흔들리기 마련이고, 흔들림이 표출되는 순간 상황은 더 위태로워진다. 마음은 복잡해도 얼굴만큼은 담담해야 할 이유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장착되는 무심함과 건조함은, 어쩌면 세상을 살아내는 인간의 한 방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