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에서 쫓겨나다
오래간만에 수술방에 낯선 인물들이 들어왔다. 앳된 얼굴과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어쩔 줄 몰라하는 태도는 본인들이 여지없이 학생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길어지는 의정사태에 지친 본과생들 일부가 학교로 돌아온 것이었다. 인기는 없지만 필수과인 외과 실습의 일부로 수술방을 참관하는 중이었다. 모니터로 수술 필드를 보면서 열심히 구글 검색을 하는 모습이 과거의 나를 보는 듯했다. 아무리 유심히 수술 모니터를 봐도 교과서로 보았던 해부학 구조와 달랐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화해놓은 해부 그림을 보고, 피와 지방이 섞인 실제 장기들을 보면 그 괴리감이 상당했다. 인간의 인지 능력이란 쉼 없이 같은 장면을 보고 기억하는 노력이 반복되어야 형성되는 것이었다.
본과생들은 실습 과정 중에 "내가 바보인가?"라는 물음을 백번쯤 마주한다. '어쩌면 이렇게 아는 게 없을까'란 생각을 하루 걸러 하루 하게 된다. 본과 4학년 시절, 이비인후과 실습은 이런 자기반성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었다.
모교의 이비인후과 실습은 꽤나 본과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원하는 과를 선택해 실습을 돌 수 있었던 본과 4학년들에게 실습 결쟁이 치열했던 파트였다. 물론 인기가 좋았던 이유는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제나 시험도 없었고, 외래 참관과 회진, 수술방 참관이 전부였다. 평가에 넌더리가 난 학생들에게 시험이 없다는 점은 상당한 장점이었다.
실습은 교수님들의 재량으로 그 실습 시간이 달라지기도 했다. 상당히 유하시기로 소문난 이비인후과의 박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오후 실습 시간에 교수님의 외래를 참관할 것인지, 아니면 그 시간에 A4 한 장 분량의 짧은 과제물을 작성할 것인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구글링을 통해 금방 과제물을 만든 후 쉬거나 병원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당시 실습을 같이 들었던 동기와 난 괜스레 과제가 귀찮았다. 그냥 외래에서 교수님의 진료를 '구경'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찾아서 하는 공부가 아닌, 그냥 보고 귀로 듣는 편한 공부를 택한 셈이다. 물론 이명과 난청 환자를 보시는 교수님의 외래가 궁금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유하시다는 박교수님의 소문은 더욱 외래 참관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점심을 먹고 3층 이비인후과 외래방으로 갔다. 교수님의 뒷자리에서 동기와 간이 의자 두 개에 앉아 편한 마음으로 교수님의 외래를 참관했다. 난청에 대해선 시험 때 외웠던 극히 일부의 지식만이 탑재되어 있었다. 지루하게 이어진 외래에 조금씩 식곤증이 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아무런 말씀 없이 외래를 보시던 교수님이 갑작스레 뒤를 돌아보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질문이 시작되었다.
"난청의 종류가 어떤 게 있니?"
"돌발성 난청을 유발할 수 있는 원인은 뭐가 있니?"
" VOR(전정안반사, vestibuloocular reflex)가 뭔지 아니?"
진료 사이사이 연이은 질문이 이어졌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편하게 구경하다 갈 줄 알았던 외래에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교수님의 수많은 질문에 나와 동기 둘 다 제대로 된 대답 한 번을 하지 못했다. 벙어리처럼 어버버함과 동시에 엉뚱한 대답, 그리고 이어지는 기나긴 침묵. 이 세 과정이 질문마다 반복되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유하시다는 소문에 걸맞게 화를 내시지 않았다. 다만 우리의 대답에 한숨이 점점 길어지고, 거세져갔다. 환자가 나가고 다음 환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인내를 하며 본인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해주는 과정이 이어졌다.
대략 스무 개가 넘는 질문이 이어졌을까. 급기야 나중에는 동기와 서로를 마주 보고 어이가 없었다. "우리 이렇게 바보인가?"라는 눈빛을 교차하며 그때부터 허탈함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진지한 외래방 안에서 무지를 인식할 때마다 자괴감과 웃픈 감정이 교차했다. 알량한 지식으로 외래를 참관하겠다고 한 우리가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무지한 실습생 두 명 덕분에 외래는 세 시간이 지났지만 남아있는 환자가 절반이 넘었다.
원래는 양방으로 외래를 보시던 교수님이셨다. 양방이랑 외래 진료방을 동시에 2개를 쓰면서 진료시간을 단축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를 교육하시겠다며 교수님은 양방대신 진료방을 하나만 쓰고 계셨던 것이었다. 거듭되는 외래 지연에 참다못한 간호사가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교수님 이제는 양방 여셔야 합니다."
그때부터 양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쫓겨났다.
쫓겨나면서 교수님은 숙제를 내주었다.
"오늘 내가 물어본 것 중에 몰랐던 것들 다 찾아서 과제로 제출해라."
이렇게나 혼이 나간 외래는 처음이었다. 난청과 이명을 보는 외래에서 환청을 얻어가는 듯했다. 애초에 참관하지 않고 과제를 한다고 했으면 세 시간 동안 질문 폭격을 당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짤막한 과제만 하면 되었었다. 괜히 편하게 '구경'하며 공부하겠다는 얄팍함으로 공부는 배로 하게 되었다. 외래를 두 시간이나 지연시킨 이 사건은 동기들과 후배들에게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이후 이비인후과 실습의 인계장에는 한 줄이 추가되었다.
'박교수님 외래에는 참관대신 과제물을 하는 게 좋습니다.'
의대생들은 이렇게 '성장 아닌 성장'을 한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다. 이 학생들은 훗날 각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리란 것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과정과 비슷한 의학 지식의 습득은, 결국에 본인의 것이 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수차례 동반되는 자괴감과 지겨움을 버텨낼 수만 있으면 된다. 인간은 생각보다 대단한 생명체라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들도 어느새 이루는 법이다.
이비인후과 실습을 함께했던 형규는 지금도 내게 가장 든든한 세상살이의 동반자다. 치기 어린 무지를 함께 부끄러워하고, 웃고, 기억하는 사람이다. 의대를 졸업하는 과정은 결코 혼자서는 걸어갈 수 없는 여정이다. 동기들이 있었기에 매번 무너질 듯한 순간에도 일어설 수 있었고, 서로의 어깨를 빌려 버틸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의대생들 일지 모른다. 부푼 꿈을 안고 입학했지만, 정작 대학생활은 온전히 누려보지도 못한 채 혼란 속에 내던져졌다. 복귀자와 미복귀자 사이의 갈등은 동기라는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10명이 채 되지 않는 강의실에는 예전의 활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부디 시기 속에서도 잊지 않았으면 하는 사실은, 지금 곁에 있는 동기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올 동기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이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렵고 불확실한 날들이지만, 결국 이 시기도 지나간다. 그리고 이 과정을 함께한 동기들은 훗날 전문가로 더 넓은 세계에서 다시 만나, 분명 예전보다 더 단단하고 깊은 관계로 이어져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고됨은, 내일의 연대를 자라게 할 토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