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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전공의 Jun 07. 2024

20대에 장루를 차게 된 외래환자

전공의 3년 차가 되면 외래 환자를 보기 시작한다. 외래 턴은 다른 파트보다 비교적 편하다. 수술방에 들어갈 필요도, 아침 일찍 병동 갈 필요도 없다. 회진이 시작되는 분주한 병동 아침과는 달리 외래의 아침은 잠잠하다. 회진 대신 식사를 하고 커피 한 잔을 사서 올라가면 그렇게 오전이 평온할 수 없다. 마치 업무를 시작하는 직장인이 된 듯한 느낌이다. 자연스레 걷는 걸음 수도 줄어든다. 직접 환자 찾아가기보다 오시는 환자분 머리 숙여 인사만 하면 된다. 하루 10000보는 기본으로 걸었던 병동턴과 비교하면 에너지 소모적인 측면에서 훨씬 효율적인 셈이다.


하지만 외래가 마냥 편한 건 아니다. 한 번 환자가 몰리고 분주해지기 시작하면 그 좁은 외래 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한다. 기다리는 환자가 차곡차곡 늘어날 때마다 속은 점점 더 타들어간다. 과 특성상 외과 외래는 수술 상처를 보러 오는 환자들이 많다. 간단한 상처면 꿰매면 그만이지만 상처가 크고 고름이 나오는 환자가 있으면 대형 공사가 시작된다. 다시 상처를 열고, 씻어내고, 배액 튜브를 넣는 과정이 수반된다. 이런 환자를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명당 20-30분이 훌쩍 넘는다. 상처가 안 좋은 환자들이 많은 날에는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오전 외래가 끝다.


외래에서 가장 반가운 환자는 약이나 의료 물품을 처방받으러 오는 환자들이다. 단순 처방만 필요한 경우다. 특히 유방암 환자들의 경우 다음 외래보다 호르몬약의 처방 일수가 모자란 경우가 많다. 보험정책상 한 번에 일정 개수 이상의 약을 처방할 수 없기 때문에 중간에 약을 타기 위한 외래를 내원해야 한다. 장루 물품도 마찬가지다. 장루주머니나 벨트, 장루 연고 같은 필수품도 3개월에 한 번씩 병원을 방문해 처방 을 수 있다. 덕분에 장루의 상태를 한 번씩 봐드릴 수는 있지만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은 매번 병원에 오는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


하루는 젊은 여자 환자가 장루 물품을 처방받으러 내원하였다. 간혹 고령 장루환자의 경우 보호자가 대신 내원하는 경우도 있어 이번에도 보호자겠거니 했다. 하지만 나이와 성함을 확인하다 보니 40대 여성 환자 본인이었다. 환자는 장루 물품을 처방받아가는 과정이 익숙하다 못해 무료하다는 듯 원하는 물품만 간략히 말했다. 제품명과 사이즈까지 처방이 필요한 장루 물품은 명확했다. "장루는 잘 관리하시냐"라는 질문에 "네"라는 짧은 한 마디 외에는 더는 답하지 않았다. 한 번 확인해 보자는 말을 꺼내기도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순간 장루라면 진절머리가 난다는 느낌이 흠씬 풍겨졌다. 1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환자는 다시 진료실을 나갔다. 조심히 가시라는 인사는 사치였다.


환자가 나가고 환자의 이전 기록을 다시 열어보았다. 이미 20년째 장루 물품을 받으러 내원한 환자였다. 장루 관리는 잘 되었는지 그간 장루로 인해 문제가 되었던 기록은 없었다. 장루는 말 그대로 장의 인공 샛길이다. 정상인들이 입으로 섭취한 음식의 최종 경로는 항문이지만 일부 환자들의 최종 경로는 좌측 또는 우측 배다. 배꼽 옆 10cm 언저리에 인공 항문인 장루가 있다. 소장루는 그나마 냄새라도 덜하지만 대장루는 악취가 상당하다. 먹은 음식물들이 배꼽 옆에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온다는 사실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환자들이 장루를 꺼려하는 이유는 말을 안 해도 짐작 가능했다.


외래에 방문했던 40대 젊은 여자 환자는 선천적인 소장 장애로 수술을 한 케이스였다. 20대 대학에 입학할 나이에 더는 음식물 섭취가 어려워져 결국 인공항문을 만든 것이었다. 고령의 암환자들에게는 장루가 희망과도 같다. 종양이나 유착으로 인해 음식을 한 입도 못 대다가 장루 수술 후 드디어 입으로 삼킬 수 있게 된 환자들은 새 사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는 다르다. 한창 대학 신입생 행사를 가고 연애에 눈을 뜰 시기에 인공항문 수술은 세상이 무너진듯한 느낌일 수도 있겠다. 세상이 아무리 개방적으로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장루주머니를 찬 비키니 모델은 보지 못했다.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던 환자의 인상이 온전히 이해되었다. 외래 간호기록의 짧은 인적 정보에 환자는 여전히 미혼이었다.


벌써 외래 파트가 끝난 지 8개월이 넘었다. 날이 더워지고 반팔을 꺼내기 시작하면서 그때의 환자가 다시 떠올랐다. 가끔 젊은 환자들에게 예상치  찾아오는 질병들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동안 스무 번은 지나갔을 무더운 여름에, 얇은 반팔 티셔츠 하나 걸치기가 망설일 만큼 장루가 진절머리 나진 않았을지. 아니면 이런 짐작조차 무례할 정도로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다른 행복을 누리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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