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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by 글쓰는 외과의사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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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네이버나 구글 검색이 어색해질 정도다. 검색의 90%정도는 Gemini나 Chat GPT를 이용한다. 오랜기간 Chat GPT를 써오다보니 나의 어지간한 치부는 GPT가 다 알고있다. 구독료를 아끼기 위해 Chat GPT를 누군가와 공유할까 했었던 과거 고민은 지금생각해보면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일기장보다 더 많은 나의 비밀을 Chat GPT가 알고 있을 수 있다.


요즘은 책도 GPT에게 추천받는다. 그동안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책을 추천해달라고하면 귀신같이 내가 흥미를 느낄만한 책들을 선정해준다. 그 중 첫 번째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였다. 빅데이터의 추천답게, 오랜만에 책의 곳곳에 밑줄을 치며 읽었던 책이었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책에서는 삶의 의미에 대해 지속적으로 다룬다. 삶의 의미는 일관적일 수 없으며, 포괄적일 수도 없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빅터 프랭클은 이를 몸소 느낀 사람이었다. 전쟁 전 그는 의사로 연구에 매진하던 사람이었다. 수용서에서까지 가장 아끼던 물건은 그동안 연구 결과를 모아온 종이 뭉치였다. 어쩌면 시련보다 본인의 연구가 삶의 주된 부분이었을 프랭클에게 전쟁은 순식간에 상황과 삶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으려면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1-2년 사이 일관되게 나의 글 속에서 나오고 있는 관점이다. 한가지 다른점은 시련을 버티는 것을 넘어 그 시간과 견디는 행위 속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언젠가 병에 걸린 한 젊은이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편지에서 젊은이는 친구에게 방금 자기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젊은이는 언젠가 자기가 본 영화 이야기를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아주 용감하고 품위 있게 죽음을 기다리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영화였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죽음을 그렇게 의연하게 맞는 것이 인간으로서 참 위대한 성취였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이제 운명이 자기에게 그와 똑같은 기회를 주었다고.


극단적인 사례는 위와 같다. 죽음을 앞둔 사람마저도 그 시련에 '기회'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의미란 해석하기 나름이라 언제든 본인의 입맛에 맞게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시련 속에서 인간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의미는 아무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인간의 정신 상태 - 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 - 와 육체의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러운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시련 속에서도 잃지 말아야 할 믿음은 희망이다. 미래에는 나아질 것이란 희망은 시련 속에 부여한 의미와 더불어 그 기간을 감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만 기한을 특정하여 가지는 희망은 위험하다. 크리스마스에는 전쟁이 끝날거라 믿었던 수감자가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변화가 없는 전장을 바라보고, 믿음을 잃어버린채 사망한 것처럼 말이다. 막연한 희망보다 이미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원래 가지고 있던 물건처럼 품고 있는 희망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할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나의 존재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을까란 의문이 필요하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려움을 극복해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미래와 과거를 떠올리며 세상을 살아가아가야 하는 동력은 '대체불가성'일 수도 있겠다.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은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끝으로 인간의 고통을 기체의 이동이라고 한 표현에 이보다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발톱의 가시 하나에도 온종일 신경이 곤두서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크고 작은 고통의 누적과 극복은, 기체가 퍼지는 공간의 크기를 늘려준다. 점차 커진 방은 기체가 그 공간을 채우기까지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리게끔 만들고, 어쩌면 더 커진 방에서 그 기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미약하여 느끼지도 못 할수도 있다. 마치 마음의 그릇이 커지는 것과 비슷한 개념일까.




어쩌면 인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기간이 지나면 빛과 같이 분명 더 나아진 순간이 오겠지만, 다시 한번 긴 터널을 지나야 함도 알고 있다. 터널과 빛의 반복에서 삶에 무한한 의미부여를 하며, 유한한 삶을 살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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