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쓸모
2021년 2월 22일 19시 32분
작년 이 맘 때, 퇴근 후 6.6km를 달렸다.
바람이 세차게 앞에서 불어댔지만, 날이 풀리고 일주일 만에 달려서 그런지, 굉장히 몸이 가볍다. 예전과 다르게 4km를 돌파하기 전까지 호흡은 헐 떡 헐 떡 댔고, 몸은 그대로.
벌써 꾸준히 달리기를 시작한 지 어언 한 달이 다 됐다. 처음엔 ‘몇 키로가 되었던지 가능하면 매일 나가서 뛰어보자’라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지만, 여러모로 재미를 붙여 지금까지 틈만 나면 달린다. 뛰다 보면, 지금 내가 힘든 것 또는 어렵게 헤쳐나간 과정이 스쳐 지나가곤 한다. 달리기는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지 않았나?
만약, 이 세상엔 김 씨와 이 씨라는 두 명의 사람이 있다. 김 씨는 온갖 신체적인 축복을 받은 웬만한 운동선수를 뛰어넘는 체력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이 씨는 평범하기 그저 없는 올챙이처럼 배가 튀어나온 청년이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각자 달리기를 한다. 김 씨는 예상대로 폭발적인 스피드와 힘으로 출발하여 정해두었던 목표까지 단숨에 주파한다. 원한다면 그는 더 먼 곳까지 달려 나갈 수도 있다. 그야말로 재능을 듬뿍 받은 청년. 하지만, 이 씨는 그렇지 않다. 목표를 정해두고 천천히 달린다. 그래도 이 씨는 성실했다. 그는 가끔씩 운동을 했던 덕에 숨이 턱 끝까지 타오르지만, 자신만의 페이스를 조절하며 뛰어간다. 비록 속도는 김 씨에 비해 뒤쳐지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속도를 즐기며 달렸다. 어느새 목표 지점을 통과했고, 그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 한 채 더 먼 곳까지 달린다. 그리고 목표점이 한참 지난 후에야 자신이 더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김 씨의 경우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는 본인이 얼마나 노력하기에 따라 앞으로 더 나아갈 수도 멈출 수도 있다. 반면, 이 씨는 숨이 조여 오는 고통을 겪지만 본인의 페이스를 잘 유지하여 어느새 본인도 모르게 목표지점을 통과한다. 승자는 없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닌 본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력에 따라 개인의 성패가 갈린다.
오늘 달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각자만의 속도로 걷고, 달린다. 심지어 날아가는 인간들도 있다. 하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다수의 사람들은 꾸준히 노력하고 나아간다. 최근, '무엇이 나를 급급하게 목적 없이 빠르게 나아가게 만드는 걸까, 왜 불안해하는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분명히 나만의 속도에 맞춰 나아가야 하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늘 불안했고, 급했다.
처음으로 이런 감정을 느낀다. 삶의 방향성을 잃은 기분, 무기력증, 번아웃, 우울증 등 부정적인 감정의 집합.
현재 내 그릇의 크기보다 이 감정의 크기가 더 크기 때문에 나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이 감정을 공유하기로 한다. 감사하게도, 그들은 나의 넘치는 물을 받아주었고, 덕분에 내 잔이 넘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더 큰 그릇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혼자라면, 이 정도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내 사람들이 함께하기에 나는 과감히 내 그릇을 깨고, 새로운 도기를 굽기 위해 공방을 방문한다.
앞으로 이런 감정이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지금 내가 달리는 것처럼 앞으로도 꾸준히 달려, 강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메모장이 꽉 찬 덕분에 지난날의 기록을 훑어보다 이 글을 발견한다. 기록이 없었다면, 작년에 어떤 나날을 보냈는지 두루뭉술하게 느낄 뿐, 기억도 못 했겠지.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낀다. '동물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라는 속담의 의미는 '인간은 문자로 기록을 남긴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며, 그만큼 우리에게 문자와 기록은 중요하고,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과거의 실패를 개선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을 기록해야 만한다. 아무리 별 볼일 없는 하루라도 좋으니, 간단한 기록은 오늘의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힘이다.
과거의 열정이 가득했던 나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자세는 과거의 나에 대한 예의이자 오늘과 내일에 대한 안녕이지 않을까?
"기록하자 그리고 오늘도 달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