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 도착하자마자 역시나 비가 내렸다. 비가 많이 와서 택시를 타고자 했지만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숙소에 도착했다. 거짓말처럼 숙소에 도착하고 짐을 푸니 비가 그쳤다. 아침 일찍부터 공항으로 이동하고 비행에 대한 피로 때문에 잠시 쉬었는데, 쉬었다가 다시 나가려 하니 비가 왔다. 어플을 통해 날씨를 보니 우리가 싱가포르 있는 내내 강수확률이 90%였다. 그걸 본 순간 '아... 이번 여행은 망해구나.'라고 자포자기했다.
날씨 예보로 인해 기분도 꿀꿀해지고 배도 고픈데 이왕 싱가포르에 왔으니 한 번쯤은 먹어야 할 칠리크랩을 먹으러 갔다. 비도 오고 숙소가 공항에서 1시간 정도 거리이다 보니 지쳐서 허겁지겁 먹었는지 칠리크랩 사진을 찍어놓지도 못했다. 칠리크랩 외에도 여러 가지를 먹었으나 사진 한 장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여행 첫날이고 싱가포르가 원산지인 타이거 맥주로 더운 열대 지역에서의 첫날을 시원하게 마무리하였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첫날을 마무리했다.
다음날 아침, 싱가포르 기상청도 믿을게 못 되는지 구름 한 점 없이 날이 좋았는데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습도가 장난 아니었다. 찌는 듯한 더위와 높은 습도는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기만 했는데 땀으로 옷을 흠뻑 젖었다. 여행하기 전에 미리 언제 어디 갈지 계획을 세워놓았는데 비가 온다길래 리콩 치안 자연사 박물관에 갈까 했지만 날이 좋은 날은 얼마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바로 부킷 티마로 가기로 결정했다. 부킷 티마까지는 버스를 타고 갔는데 싱가포르에 탔었던 대부분의 버스는 2층 버스였다. 무엇보다 에어컨을 엄청 세게 틀어서 오래 타면 가끔은 춥기도 할 정도였다. 싱가포르에 온다면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타는 것을 추천한다. 굉장히 편할 뿐만 아니라 밖을 보면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싱가포르 2층 버스 탑승
1시간 정도 이동해서 부킷 티마에 도착하였다. 부킷 티마는 울창한 숲인데도 불구하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말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다. 현지인들에게 부킷 티마에 대해 물어보니 부킷(Bukit)은 말레이어로 언덕이라는 뜻이고 티마(Timah)는 원래 티막(Temak)이 맞는 발음인데 서양인들에 의해서 바뀌었다고 한다. 원래 티마의 뜻은 나무가 많다는 의미라고 한다. 심지어 부킷 티마는 해발이 약 163m인데 산이 없는 싱가포르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다.
부킷 티마는 과거 호랑이가 살았을 정도로 싱가포르 많은 동물이 서식하고 있는 핫스팟 같은 곳이었다. 물론 지금도 많은 동물들을 볼 수 있지만 호랑이는 멸종되어 살고 있지 않다. 부킷 티마를 둘러볼 장소 중 하나로 넣은 이유는 싱가포르에 오면서 보고 싶은 동물이 몇 종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부킷 티마에서 자주 관찰된다는 날원숭이(Colugo: Galeopterus variegatus)였기 때문이다. 날원숭이는 영장목(Primate)에 속하지는 않지만 영장목에 상위 단계에는 포함된다. 유전자 분석을 통해 영장류와 매우 가깝다고 나온 연구 결과가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인 'Science'에 소개되기도 한 동물이다.
장이권 교수님과 부킷 티마에 오다.
부킷티마를 대표하는 동물인 날원숭이 그러나 표지판이 많이 낡았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새나 각종 동물들을 찍기 위해 망원렌즈를 꺼내서 카메라를 세팅했고 띵동이는 개미를 주로 보는 친구여서 접사렌즈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는 다양한 동물들의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녹음기를 세팅하기 시작하셨다. 부킷 티마는 동물들의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신 교수님의 천국 같은 곳이었다. 시작부터 매미부터해서 각종 곤충들과 새들의 소리가 많이 들렸다. 매미 소리는 우리 모두 처음에 긴가민가했다. 왜냐하면 무슨 공사장에서 나는 소리가 숲 입구부터 가득 채웠는데 어디서 공사를 하나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가만 들어보니까 소리가 나는 장소가 나무 위였다. 한참을 소리가 나는 곳을 찾다 보니 매미가 내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중국, 일본, 뉴질랜드, 베트남, 호주 등에서 매미를 본 나는 매미에 대해 그래도 조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공사장 작업 소리 같은 매미 소리를 듣고 나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겨자씨 정도는 될까? 라며 앞선 선배 연구자들 간에 거리가 너무나도 멀다 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공사장에서 무언가를 자르는 듯한 기계 소리를 내는 매미 외에 다른 매미들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경쟁에서 밀려서 다른 시간 또는 다른 시기에 노래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한 종의 매미 소리가 숲은 뒤덮었다. 싱가포르를 여행하는 내내 다른 매미도 보거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교수님과 띵동이는 입구에서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띵동이는 입구에서부터 다양한 개미들이 있다고 그냥 주저앉아서 개미를 종류별로 촬영했고 교수님께서는 녹음기를 세팅한 후 가만히 숲 속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들을 녹음하시기 시작하셨다.
부킷 티마 입구에서 매미 소리를 녹음하고 계시는 장이권 교수님.
우리는 각자 헤어지면서 2시간 뒤에 만나자고 약속한 뒤,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부킷 티마 지역을 조금 둘러본 뒤 평지가 대부분인 곳을 거점 삼아서 돌아다녔다. 처음에 신기한 새들을 많이 보았으나 시원한 버스에 냉동된 채로 있다가 가방에서 꺼내니 렌즈 앞부분에 습기가 차서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 나도 한동안 적당한 곳에 앉아서 렌즈에 습기 닦아내고 다시 습기 차면 닦아내고를 반복하면서 정상적으로 촬영되기까지 한동안 카메라 정비를 했다. 카메라가 정상적으로 촬영할 수 있기 전에 휴대폰으로 부킷 티마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놓았다. 나중에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부킷 티마에 아름다운 모습은 휴대폰으로 촬영한 것이 다였다.
사진에 습기 차서 안개가 낀 것처럼 사진이 촬영되었다.
아름다운 부킷 티마의 모습
한참을 돌아다녔는데 보고 싶어 하던 날원숭이에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무에 붙어있고 주로 야행성인데 보기 힘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카메라를 설치해서 숲 속에 무엇인가를 촬영하고 계신 현지인 분을 마주치게 되었다. 현지인분에게 나는 "실례지만 혹시 무엇을 촬영하고 계신지 여쭤봐도 될까요?"라고 여쭤보았다. 현지인 분은 말없이 손짓으로 가까이 오라고 하며 손가락으로 나무를 가리켰다. 근데 나는 보이지 않아서 '나무를 촬영하고 계신 건가?' 했는데 자기 카메라를 봐보라며 촬영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셨다. 놀랍게도 그분이 촬영하고 있는 것은 내가 보고자 했고 찾고 있었던 날원숭이였다. 나는 그분에게 혹시 옆에서 촬영해도 되는지 여쭤보았고 그분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한참을 넋 놓고 구경하다가 잠시 현지인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단히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만 말했는데 그분은 그 먼 한국에서 왔는데 관광지는 안 둘러보고 왜 숲 속에 있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관광도 좋지만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동물들을 보기 위해서 왔다고 답했다. 그분은 신기해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나에게 빨리 촬영하라며 조용히 다급하게 외치셨다. 카메라로 자세히 보니 새끼가 있었다. 날원숭이를 본 것도 엄청난 행운이었는데 새끼까지 볼 수 있었다.
위장색을 띠고 있어서 보기가 여간 쉽지 않은 날원숭이
운명처럼 날원숭이도 보고 새끼까지 보았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한 날원숭이
날원숭이는 코알라나 캥거루 같은 새끼를 키우는 주머니가 있는 유대포유류가 아닌데 왜 새끼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날원숭이도 유대포유류 인가 하고 찾아봤더니 유대포유류처럼 아주 작은 새끼를 낳은 뒤 복부에 유대포유류처럼 주머니가 있진 않지만 큰 피부막을 이용하여 양육한다고 한다. 현지인 분은 자신이 이제 충분히 촬영했으니 간다 하며 즐거운 여행이 되라고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장이권 교수님께서도 이 놀라운 동물을 보고 싶어 하셨기에 한참을 찾아서 교수님을 모셔왔지만 아쉽게도 날원숭이도 자리를 떠난 뒤였다. 교수님께서는 여행 기간 동안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많이 아쉬워하셨다.
떠날 때가 돼서 하늘을 보니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아침부터 낮까지 엄청 화창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먹구름으로 하늘이 뒤덮이고 있었다.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내려가며 안전한 장소에서 카메라와 장비들을 가방 안에 넣고 부킷 티마를 빠져나갔다.
점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어느새 어두워진 부킷 티마 입구 근처
부킷 티마를 거의 다 빠져나올 때쯤 비가 쏟아지고 시작했다. 다행히 우산을 가져왔지만 열대 지방에 비란 우산이 있어도 우산을 뚫어버리겠다는 듯이 비가 오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비를 피하기 위하고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무작정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비를 피하기 위해 음식점으로 들어간 것이기에 맛에 대한 보장은 없었다. 들어가니 꼬치집이었는데 세트가 저렴하고 여러 음식들이 나와서 시켰다. 꼬치가 메인이어야 할 것 같은데 사이드로 나오는 물만두와 야채볶음이 진짜 맛있었다. 띵동이와 교수님께서 여기도 사이드 음식이 최고라며 극찬을 하였다.
1시간 정도 식사를 마치고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 나니 언제 퍼부었냐는 듯이 다시 화창해졌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서 그런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었다. 아침부터 숲을 돌아다니고 비 피하느라 피로해졌으니 탐사를 더 하기보다는 가고자 했다 리콩 치안 자연사박물관으로 향했다.
비를 피하기 위해서 갔었던 가장 가까운 음식점
메인 음식보다 사이드인 물만두와 야채볶음이 더 맛있었다.
리콩 치안 자연사박물관은 싱가포르 국립 대학교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이 굉장히 독특하게 생겼고 여러 층으로 있길래 엄청 크다고 생각했는데 일반인에게 개방된 곳은 2층 구조였다. 자연사 박물관은 큰 기대를 하고 들어갔으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이었다. 싱가포르에는 굉장히 많은 자생종들이 살고 있을 텐데 보르네오 섬의 동물들이 더 많이 소개되고 있었다. 공룡 화석은 인상적이었지만 화석에 대해 큰 관심이 없던 나는 그리 흥미로운 곳은 아니었다.
작은 자연사 박물관인데도 불구하고 장이권 교수님께서는 박물관에 있는 각각의 테마글들을 전부 다 읽으시며 보셨다. 동물뿐만 아니라 암석, 지질, 식물 등 본인의 분야가 아님에도 다 읽으시는 교수님을 보며 '아, 역시 교수님은 다르시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옆에 있는 띵동이도 나의 생각을 공감해 주었다. 띵동이와 나는 지쳐서 자연사 박물관에 마련된 의자에서 쉬었다. 그도 그럴게 교수님께서 그 2시간이 조금 넘게 박물관을 관람하셨다. 더 놀라운 것은 교수님께서 다 못 둘러보았다고 하셨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먼저 이제 그만 가보자고 하셔서 너무나 감사했다.
리콩 치안 자연사박물관
리콩 치안 자연사 박물관 내부
밖으로 나가니 야생닭 무리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교수님께서 여행 내내 야생닭을 굉장히 흥미롭게 생각하셨다. 우리가 먹는 토종닭이 우리 앞에 나타난 야생닭을 품종 개량한 것인데 확실히 야생닭에 수컷은 빠르고 심지어 잘 날고 너무 이뻤다. 그리고 암탉과 어린 병아리들도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장색을 잘 띠고 있었다.
교수님은 야생닭을 보자마자 쏜살같이 뛰어가셨다. 평상시면 뒤바뀌어야 정상인데 나와 띵동이는 교수님 쫓느라 전력을 다했다. 한참을 닭과 교수님을 쫓다가 닭이 먼저 멀리 도망가서 이 추격전은 끝이 났다. 교수님께서는 아까 부킷 티마에서 야생 수탉 소리를 녹음했다 하시며 혹시 수탉 사진을 촬영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날은 띵동이와 나 모두 교수님을 쫓느라 수탉 사진을 찍을 겨를이 없었다.
야생 암탉
우리가 아는 노란 병아리들과 달리 야생 병아리는 위장색을 띠고 있었다.
닭을 한참 쫓고 우리는 다시 숙소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교수님께서 버스 탄지 5초? 최대 약 10초 정도 뒤에 잠에 드셨다. 그 짧은 시간 안에 교수님께서 주무시는 것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버스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밖은 다시 폭우가 쏟아졌다. 아무리 버스 안이라도 비가 워낙 거세서 빗소리가 버스 안에서도 들리는데 교수님께서는 누가 잡아가도 모르실 정도로 깊이 잠드셨다.
숙소에 다 와서 내릴 때쯤에는 다시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화창해졌다가 숙소에서 잠들기 전 다시 폭우가 쏟아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