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출처: 네이버 영화 논란의 중심, 말 그대로 화제작 <82년생 김지영>(이하 <김지영>)을 보고 왔다. 동명의 원작 소설은 근 10년 만에 한국 소설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해외 진출은 물론 베스트셀러까지 등극했건만, <김지영>은 개봉도 전부터, 아니 크랭크인 소식이 들릴 때부터 이미 뜨거운 감자였다. 혹자는 원작이 페미니즘 성서라고 하나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차라리 르포르타주,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본다. '소설'임에도 각주를 달아 통계자료를 제시한 작가의 친절에도 불구하고, 자주 '일부'로 한정되는 특정인들은 이를 피해망상적 판타지라고 주장한다. 포털 사이트 별점 테러 및 출연 배우에 대한 인신공격 등 열성 엑스맨들의 추태는 오히려 영화에 대한 관심을 배가했다. (땡큐다.) 결론부터 말하면, <김지영>은 논란이 될 이유도, 누군가 불편할 여지도 없다. 소설보다 더 한 현실을 살아가는 김지영인 당신도, '판타지' 김지영이 미워서 죽겠는 당신도, 일단 봐라. 존재만으로 의미 있는 이 영화는 모두가 봐야 한다.
아래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맵고 칼칼한 한 방을 기대했으나, 순하디 순해 '내게는' 싱거웠다.(나는 매운 갈비를 좋아한다.) <김지영>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류의 아름다운 동화다. 소설이 현실을 순화했다면 영화는 그 소설마저 순화했다. 어쩔 수 없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만드는 상업영화이므로. 처음엔 이건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에 대한 기만 아닌가, 하는 다소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그래, 차라리 이런 결말이 낫겠다 싶었다. 장사 장인 백종원 씨 가라사대, "장사는 통계 싸움"이라는데, 어디 영화 장사라고 다를까. 그리고 김치에 대해 생각했다. 한국인의 정체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김치도 어린 입에는 맵다 못해 고통스럽단다.(매운맛은 통각이다.) 그래서 김치를 먹는 것조차도 실은 훈련이 필요하다. 처음엔 물에 씻어 먹더라도, 점차 익숙해지면 나중엔 김치볶음밥에 김치와 김치찌개를 곁들여 먹는 어엿한 한국인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어릴 때 억지로 김치를 먹은 기억 때문에 평생 김치를 먹지 않는 사람도 있다. 갑자기 구구절절 김치 얘기를 늘어놓는 건, 안타깝지만 우리 사회가 아직 너무나도 어린 입이기 때문이다. 먹기도 전에 뱉을 생각부터하는 미운 네 살이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으니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김지영>은 물에 씻은 하얀 김치를 떠먹여 주는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큰 가치가 있다.
보란 얘길 길게도 했으니 이제 본 얘기를 해 본다. 먼저 아쉬운 부분은 캐릭터다. 제목은 '82년생 김지영'인데, 지영이란 캐릭터의 평면적, 수동적 인상을 지울 수 없어 아쉽다. 영화는 주로 대현의 시점에서 진행되며, 지영은 대부분의 시간동안 관조의 대상이다. 웃고, 까불고, 우는 대현과 달리 지영은 무색무취하다. 소리를 버럭 지르고, 숟가락을 집어 던지고, 가슴을 치며 울어 마땅할 때, 그 감정을 분출하는 주체는 지영이 아니라 주변인들이다. 그래서 영화 속 지영의 성격을 묘사하라면 딱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차라리 대현이나 은영이 더 기억에 남는다. 심지어 대현이 애교를 부리고 까부는 장면에선 일부 관객들의 착즙기 돌아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분히 불필요한 요소였고, 차라리 그 시간을 지영의 서사에 할애하는 게 나았을 거라고 본다.
게다가 극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인 대현은 판타지 속 유니콘 그 자체다. 아내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으며, 퇴근해 집에 오자마자 자연스럽게 육아, 명절엔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눈치껏 미리 짐을 싸놓고, 시어머니의 불호령을 알아서 차단해주며, 아내의 복직을 위해 본인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육아휴직을 자처하는, '좋은' 남편. 사실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건만, 이게 판타지인 현실이 블랙코미디다. 물론 입으로는 아픈 지영을 걱정하면서 집안일 하는 지영을 쳐다만 보거나, 아이와 본인의 삶을 맞바꿔야만 해서 우울하다는 지영에게 내가 잘 '도와'줄 테니 낳자며 떼쓰는 모습도 나온다. 그러나 유니콘으로서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서, 작품의 핵심인 현실감이 떨어질 뿐 아니라 문제 의식에 대한 집중을 분산시켰다.
좋았던 부분은 역시 작품의 핵심, 현실감이다. 객석에선 동시다발적인 눈물이 여러 번 터졌는데, 그 중 하나는 학생 지영이 남학생에게 스토킹 당하고도 문책 당하는 장면이었다. 극적인 연출 덕도 있겠지만, 그 눈물의 근원에는 트라우마 트리거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단정하게 하고 다녀야지. 바위가 굴러오는데 못 피하면 못 피한 사람 잘못이야." 따위의 말을 들어본 적 없는 대한민국 여성이 있을까. 지영이 겪는 일들은 여성 일반이 겪는 현실이므로, 관객들은 지영을 보고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더욱 몰입했을 테다. 특이하지만 내 트리거는 시어머니의 대사 "밸나다, 밸나.(별나다, 별나.)"였다. 지나가듯 나온 짧은 대사. 그건 내 할머니의 상용구였고, 내 엄마를 자주 아프게 한 말이었다. 현실이 영화보다 더 하다는 말은 내 엄마의 시어머니와 지영의 시어머니에게도 꼭 맞아서, 명절 귀성길 차안에서는 자주 고성이 오갔고 가끔 울음이 터졌다. 어린 나는 까닭도 모른 채 그저 명절이 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게 여태 내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음을 영화를 보면서야 깨달았다. 영화는 이외에도 현존하는 숱한 차별들을 그리는데, 다만 그 연출의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은 아쉬웠다. 여성이 첫 손님이라 들어가길 망설이는 장소가 하필 마트라니. 여성 차별 사례는 만연해 열거하기가 막막할 지경인데, 굳이 작위적인 연출로 몰입을 방해해야 했나 싶다. 불법촬영 피해자들이 범죄 피해를 남 일인 듯 가볍게 언급하는 부분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상영관을 나서 현실로 복귀하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영화 속 김지영은 'Happily ever after' 했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어떤가. 아니, 영화 속 지영이라도 행복해졌으니 다행인 걸까. 현실엔 딸을 차별하는 아빠에게 숟가락을 집어던지며 화를 내주는 엄마가 없거나, 있더라도 엄마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경우가 흔하다. 82년생, 김지영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강산이 변한 후 태어난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명절을 싫어하던 어린이는 이제 명절이 싫은 어른이다. 친가의 귀한 딸자식인 나는 '이뽀'라고 불려도 일가의 중대사인 제사엔 없는 자식이다. 튀김에다 절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없어도 되는' 취급이 싫어서 굳이 아들들 틈에 선 나를 할머니는 끌어다가 작은집 사촌동생 뒤에 세웠다. "바른 순서로 서야지." 하시며. 아무리 생각해도 틀린 순서였다. 작은집 동생이니 부모 세대 기준으로도, 내 세대 기준으로도 내가 먼저... 아. 그건 걘 남자고, 난 여자라는 간단하고 분명한 이유였다. 그 일에 대해 하소연 하는 내게 다른 가족들은 되려 "니가 절을 했어? 왜?" 하고 물었다. 나는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옛날 얘기가 아니라 2019년, 그것도 불과 한 달 전 얘기지만, 그래도 이건 양반이다. 여전히 남자들은 큰 상에 밥을 먹고 그 상을 차린 여자들은 작은 상에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어도, 수십 년간 명절에 시집 서슬 무서워 친정 한 번 못 가본 내 엄마가 고모를 맞이하는 게 당연했어도, 이건 정말 양반인 게 현실이다. 다시 한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이 영화는 큰 가치가 있다. 남은 건 그런 현실을 고쳐 나가는 것이고, 그건 관객들의 몫이다.
<김지영>은 누구는 가해자, 누구는 피해자, 편 가르는 영화가 아니다. 포스터 문구 그대로,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당신과 나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누구나 볼 수 있고, 또 누구나 봐야 한다. 특히 '82년생 김지영'이 인생 최대 주적이라 불철주야 (돈 안 드는) 별점 테러에 힘쓰는 엑스맨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모르는 일에 입을 떼고 싶다면 우선 들어야 한다. 그 이야기가 당신의 평화로운 세상을 흔들고,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알 때까지 들어야 한다. 모르는 당신의 세상과 아는 우리의 세상 중 어디에 살지는 당신이 결정할 몫이다. 다만 당신에게 거저 주어진 선택지를 가져본 일이 없는 숱한 이들이 아우성칠 때, 문제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감히 자르려 들지 마라. 이제야, 이제라도, 이런 영화가 나와서 정말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