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음료 주문

by 식빵엔 땅콩버터

뭔가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날이 있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로 가득 찬 날. 그런 날에는 급격히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짜증이 점층적으로 쌓이는데, 그 감정을 슬기롭게 다스리지 못하면 메마르고 차디찬 마음 상태가 된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 식사 준비에 설거지, 청소, 빨래를 일사천리로 클리어. 다른 게 있다면 이사를 앞둔 터라 불필요한 물건 정리를 위해 다용도실로 향했는데… 내 눈에 들어온 건 바로 싹이 난 열댓 개의 감자와 껍질을 일일이 까야하는 통마늘 한 자루였다.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떴지만 눈앞의 일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 먼저 처리해야 할 게 있네.

본격적인 오늘의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1. 싹이 난 감자

일주일 전쯤이었나… 이마트 트레이더스를 둘러보다가 꽁지머리 남편의 손에 들려왔던 커다란 봉투의 감자. 양이 적은 세 식구가 먹기엔 터무니없이 많은 양이라 만류했는데… 너무 많다는 내 말에 매일같이 감자전을 스스로 만들어 먹겠다며 그는 뭔가에 단단히 홀린 듯이 감자를 집어 들고선 카트에 집어넣었더랬다.


다음 날이었던가 그는 난이도 최상의 스탠팬으로 감자전 부치기에 겁 없이 도전했다가 처참히 실패하고는 스탠팬에 눌어붙지 않은 절반 가량의 감자에다가 밀가루를 섞더니 에어프라이어로 감자빵을 만들어 냈다. 극적으로 소생한 감자는 트러플 소금에 찍어 먹으니 뇨끼와 비슷한 맛이 났으나…


단 한 번의 감자전 도전을 끝으로 감자는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졌… 다. 그리하여 결국은 내가 등판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부터 저기압이었던 나는 어느새 분노의 감자 손질을 하고 있었다.


다시는 큰 봉투의 감자를 카트에 넣지 말지어다.


2. 통마늘 15개, 껍질 벗기기

그다음으로는 마늘 껍질을 벗기고 블렌더로 다지는 미션. 물에 불려놓은 마늘 껍질을 까는데 손에는 물에 젖은 마늘 껍질이 자꾸만 달라붙어 잘 떨어지질 않고, 시간은 왜 이리 많이 걸리는 거지? 1시간이 넘도록 이어지는 작업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통마늘을 당분간 사지 않으리.


3. 초4 딸의 식사 준비

그 와중에 오늘은 친구랑 안 놀거라 하루종일 집에 있겠다고 선포한 방학을 만끽 중인 초4 딸의 점심을 챙겨 주고…


하… 멘털 잡아…


“오늘 애들이랑 안 놀기로 했어. 엄마랑 놀려고~”


“엥? “


“OO아, 그럼 엄마랑 밖에 나갔다 오자. 엄마 뭐 살 거 있어. 준비해.”


집에 더 있다가는 기분이 저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아서 우리는 어두운 기운이 감돌고 있는 집을 서둘러 빠져나와 사람들로 가득 찬 흥겨운 토요일 홍대 거리로 향했다.


코에 바람 좀 넣자.

이 엄마에게는 지금 리프레시가 필요해.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OO의 리퀘스트 요아정을 주문. 그러고 나자 몹시 목이 타는데… 오늘따라 냉장고에는 탄산수도 사이다도 콜라도 없다.


그렇다면…

눈 딱 감고 주문하자! 음료를.


배달앱으로 음료를 주문할까 하다가도 15000 원가량 되는 최소주문금액을 혼자서는 채우지 못하겠고, 또 채운다 해도 배달비를 생각하니 이렇게 까지 해서 먹어야 하나 싶어 포기하기를 여러 번이었는데, 오늘은 주문하는 쪽으로 마음의 추가 기울었다.

디카페인 카페라떼, 자몽에이드와 견과류 스낵
스벅 디카페인 라떼는 역시나 아무런 향이 없다

요아정보다도 먼저 도착한 나의 음료 두 잔과 스낵 한 봉. 그중 자몽에이드를 벌컥벌컥 마시니 적당한 탄산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쌓여있던 묵은 체증을 확 씻어내는 것 같은 속 시원함이 느껴진다.


이왕에 좀 더 풀어져볼까?


“OO아! 우리 텔레비전 보자! “


엄마랑 단둘이 텔레비전 보는 일은 손에 꼽는 일이기에 텔레비전 보자는 말에 OO의 눈은 이미 환희로 가득하다. 아이들의 눈은 참으로 정직하다.


딸은 요아정을 나는 스벅 음료 두 잔을 호사스럽게 옆에 놓고 유퀴즈 재방송을 보는 걸로 오늘 하루를 마무리~

마침 재방송중이던 유퀴즈

누구를 위한 건지도 모를

나만의 룰을 깨니,


그제야 하루 종일

휘몰아쳤던 마음이

잠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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