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이에게 나는 스며들었지
밀수 개봉 둘째 날.
영화에 대한 자세한 정보 없이 보다가 '뭐야 저 사람 박정민이야? 옴마 박정민이네?' 하고 놀랐더랬다.
관람 이후 그의 뒤를 한참 캐다가(?) 밀리의 서재에서 <쓸만한 인간> 오디오 북을 찾아 들었다. 마치 존재감 없던 선배가 조용히 옆에 앉아 꺼벙한 눈을 하고는 '명징하게 직조한' 병맛 드립을 치는 것 같아 무방비 속에 웃음이 터지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낭독을 플레이하자마자 작가는 밀수 속 장도리와는 달리 꽤 멀쩡해 보이는 이 말을 한다.
'이 세상 모든 작가님들에게, 그들의 품위에 그들의 고됨에 넘볼 수 없는 존경을 표한다'
'그럴듯한 문장과 서사는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그래도 읽어보시겠다면 그저 무심결에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앗. 별거 없이 은근히 풍기는 겸손함에 살짝 반할 뻔했다.
이후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이런 말을 한다.
못하는 것도 없지만 잘하는 것도 딱히 없는. 잘생기지 않았는데 개성 있게 생겼다기엔 한 끗이 부족한. 못돼 처먹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걸 착하다고 할 수 없는. 아주 애매한 선상 위에 위치한 인간. 이른바 과도기적 인간. 나쁘게 말하면 그냥 좀 '찌질이'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10_찌질이)
어맛! 나도 나도! 나도 찌질이야!
찌질이한테 이미 반해버림.
(생일날 학교) 내 책상 위에는 작은 쇼핑백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이건 뭐지. 안 받던 거 받으니까 상처받을 것 같은 이 느낌 뭐지. 난 잘생기긴 했지만 잘생김을 아직 보여준 적은 없는데. 설마 똥 같은 거 들었나...? 하며 쇼핑백을 열어보니 두꺼운 책 하나가 들어있었는데 <상실의 시대>. 아 나 책 싫어하는데... 약간 한스헤어 볼륨매직 상품권 같은 거 좋아하는데... (13_상실의 시대)
상실의 시대에 얽힌 기막힌 서사 크크.
아니 서사는 없다며. 이게 서사가 아니고 뭐야.
실수로 잃어버린 조끼를 뒤따라오던 벨기에 아저씨가 찾아주었다. 보답하는 의미로 '곧 미남'라고 쓰여있는 모자를 선물했다. 그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은 후 너무 배가 고파 들른 역시나 한적한 동네의 한 빵집에서 산 빵은 아직까지 인생 최고의 빵이고... (14_벨기에)
위트 어쩔 거야.
그간 주워들은 말이 아무리 많아도 내 입, 내 손에서, 내 이야기로 나오는 건 쉽지 않은 거야.
나 혼자도 할 줄 아는 게 많다는 것을 알았고, 이 할 줄 아는 것들이 얼마나 귀찮은 것인지도 알았으며 이것의 배의 배의 배를 엄마는 혼자 할 줄 안다는 것도 알았고 그것이 존경스러웠고 마음이 조금 아프기도 했다. 엄마에겐 일터가 있는데 집에 돌아오면 그 집도 일터였다. 최근에 엄마가 본인과 싸우고 방에 들어가서 운 적이 있다. 요즘 자주 울길래 갱년기 약을 사주려고 알아보다가 아버지한테 여쭤봤더니 갱년기는 진작에 끝났고 그냥 너 새끼 때문에 우는 거니까 엄마한테 잘하라고 했다. (16_엄마)
자면서 들으려고 20분 자동종료 설정을 해두고 플레이했던 건데 어느새 1시간 넘게 듣느라 잠을 못 자고 있었다. 내게는 특별할 것 없던 존재였는데 어느새 입체적으로 변하고 이젠 호감형이 되어 왠지 '아 씨 또 혼자 웃어버렸잖아' 하게 되는 상황이 계속 연출된 것이다. (혹은 '아 뭐야 감동-뿌우-')
진짜 웃긴 말도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안 웃고 말해서 아 자존심이 상하는데 이상하게 호감 가네.
그런데 말입니다.
얼핏 보면 내내 무심하게 무던하게 가만히 덩어리로 존재하는 듯한 사람인데 그의 연기는 예리하고 섬세하고 세밀하게 결이 살아 있는 게 느껴진다. 의아했다. 요즘 핫한 푸바오의 엉덩이나 나무늘보 같이 부들부들 넙데데한 느낌인데 혹시 안으로 가시날을 세워 홀로 불편함을 자처하는 사람이 아닐까? 어떻게 트랜스 젠더나 아스퍼거스 증후군을 앓는 사람 같은 비범한 인물들을 원래 그 사람인 듯 연기할까? 가만히 궁금증이 들더랬다.
근데 중간쯤 심리 검사 결과나 군대 때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의 연기 스펙트럼과 집념이 조금 이해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잘 될 겁니다.' '잘 될 테니까.'라는 말을 마무리로 많이 한다. 그냥 낙천적인 말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될 겁니다'에 가깝고, 결국 지금 모습까지 흘러온 인생에 감사하는 듯한 마음으로 진심의 응원을 건네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디오 북이 낯선 이에게도 나는 강추!
박배우는 필시 "오디오북"을 만들려고 연재를 했음이 틀림없으니까. 크크
그 정도로 재밌고 자기의 감정 그대로 표현하는 따옴표 속 대사들이 기가 막힌다.
마치 어릴 적 아빠가 들으시던 라디오 드라마 마냥 너무 흥미진진하다.
2013년 한 매거진에 연재하던 칼럼을 6년 뒤 책으로 엮은거라는데
그래 우리 모두 열심히 쓰시라.
어찌 어떤 모습으로 엮어질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