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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Feb 07. 2024

차 수업 그 첫 시간

지난번에 갔던 그 장소로 정식 수업 신청을 하고 갔다. 준비물은 하얀 양말 한 켤레. 

최근 웬만해서는 다 처음 보는 사람, 처음 해보는 것들이기에 덜 떨릴만도 한데 여전히 새로운 것은 떨린다. 


 지난번 출입했던 문을 그대로 열고 들어와 사람을 불렀지만 답이 없다. 

"Excuse Me? 스미마셍?"



아직 나만 온 건가...? 앉아서 조용히 대기를 하는데 내가 원해서 신청한 것이건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 수업이 취소된 걸 나만 모르는 거였으면 좋겠다'하는 마음이 든다. 어떻게 나한테만 안 알려줄 수가 있어!!? 하는 마음은 1도 안 든다. 떨려 떨려. 투명인간이 되고 싶다. 아 없어지고 싶어어.


순간 내가 들어온 문이 유일한 출입구인줄 알았는데 다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가 봐도 일본인 얼굴의 갈색 단발머리를 한 여자분과 눈이 마주쳤고 살짝 목례를 했다. 


'아... 수업 취소 아니네...' 

진심이었니, 나란 인간? 멀리서 들려오는 일본어 대화.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놀란 눈을 하시곤 후다닥 뛰어오시며 대체 어디로 들어왔는지 물으신다.


"지난번에 들어왔던 그 문이요." 


홍시맛이 나서.. 아 아니 문이 열려 있어 그때 그 문으로 들어왔다고 했는데, 아니 저 문이 얼려있었냐며 또 두 번째 놀라신다. 지난번엔 공개 행사였던지라 손님용 문을 열어둔 것이고 보통 통행하는 문은 다른 곳에 있다며 숨은 공간으로 나를 인도하셨다. 그니까 단발머리의 수강생이 처음 보는 나를 보고 놀라 선생님께 내 존재를 전했고, 선생님은 도통 들어올 구멍이 없는 공간인데 어디로 들어와 인기척도 없이 있었냐고 놀란 것이지. 목소리를 더 키웠어야 했어. 이랏샤이마세에에에!!!


앞으로 우리가 이용할 주 출입구라고 알려준 곳은 미즈야와 바로 연결되는 1인용의 낮은 작은 문. 

* 미즈야 : みずや [水屋] : 다실에 딸린 차 그릇을 씻는 곳 (네이버 사전) 

일종의 부엌 같은 공간이다.


시간이 지나며 한 명이 더 왔고 역시나 일본인. 상당히 고요하고 경건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들의 밝은 캐릭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뒷공간은 이렇게 화기애애한 것인지 편안한 톤의 대화가 오갔다. 물론 나는 고요했지. 간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일본어에 끄덕끄덕 혹은 답은 했지만 이내 곧 무리데쓰. 


일본인 선생님 1명, 일본인 수강생 2명과 나. 아니 인터내셔널 한 거 아니었냐고요. 왜 나만 외국인이지. 나 한명 때문에 영어를 써야 하는 상황. 정말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상황이다. 다들 알아서 다구들을 챙기고 차와 곁들일 과자들 (히가시/나마가시) 준비를 한다. 그곳에 서 있는 나는 뭐랄까. 일본인 남편 집에 시집와서 첫 명절을 준비하는 외국인 막내며느리가 된 느낌. 혹은 신입사원 첫날 할 일 없는 그 뻘쭘함, 뭐라도 제발 시켜주세요 하는 마음의 느낌.


* 히가시 : ひがし [干菓子] : 건과자 

* 나마가시 : なまがし[生菓子] : 수분이 있는 화과자 


일을 찾아서 알아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손을 씻고 나니 양갱 두 덩이를 주시며 잘라서 그릇에 준비하라고 했다. '와! 할 일이다!!!!' 4명이니까 4 등분하면 되겠지하고 잘랐지만 3조각만 필요했다. 차를 대접하는 사람 한 명은 빼는 듯하다. 역시 손님을 대하는 자리니까. 그리고 접시 위에 홀수로 올린다고 한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일일시호일> 책을 읽은 탓에 일단 처음은 그냥 하라는 대로 하기로 했다. 저자가 다도를 배우며 초반 스승에게 물었을 때 늘 돌아오던 답은 '이유는 없어 원래. 그런 거야'가 대부분이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다미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아 본격 다도를 준비한다. 


* 테이슈 : ていしゅ [亭主] : 다도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주

* 캬쿠 : きゃく [客] : 초대 받은 손님


번갈아 가면서 정주의 역할을 하면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는 식이다. 역시 자세나 여러 절차들이 엄청 세세하다. 다다미 밟는 순서, 규칙, 앉는 자리나 방향. 다구들을 잡는 방법, 접고 펴는 방법, 내려놓는 자리. 그리고 서로 대화 때 묻는 질문까지도 정해져 있다. 


'음.. 그러니까 이걸 눈으로 보면서 동시에 익혀야 한다는 것이지... 펜도 휴대폰도 없이 말이야'

'아하! 이게 뇌훈련이 되겠네.' 


일찌감치 다도보다는 정신 승리를 꾀해본다. 다도는 무슨... 머리 쓰느라 바쁘겠어. 조금 집중하려고 하면 남편이 경고했던 그 고비가 찾아온다무릎 꿇고 앉아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든다. 인어공주 마냥 쓰러져 앉으려고 하는 것도 다리가 너무너무너무 저려서 시간이 걸린다. 오메오메인지 워매워매인지 한국인의 구수한 탄식이 머릿속에만 맴돈다.


첫날인 만큼 두 번째 손님 자리에 앉아 가만히 참관하는 것으로 끝났다. 선생님은 내게 오늘은 도와주는 선생님이 안 계셔서 개별적인 시간을 할애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아뇨 무슨 말씀을요...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바빴는걸요. 실제로 그저 두 분 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이 배웠다고 전했고 그녀들은 내게 스고이이 엄지척을 건네주었다. 혼또니 아름다운 한일여성의 대화가 아닐 수가 없다데쓰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도토리를 닮은 귀여운 히가시를 먹고 나나상이 우스차를 내주었고, 아까 내가 잘랐던 나마가시, 양갱을 먹고 미호상이 코이차를 내주었다. 그리고 다시 미즈야로 돌아와 차를 한 번씩 더 마시는 것으로 해서 수업을 마치기로 했고, 직접 내 차를 만들어 보게 해 주셨다. 

 

* 우스차 : うすちゃ [薄茶]  : 묽은 차 

* 코이차 : こいちゃ [濃い茶] : 진한 차


빠르면서도 부드럽게 차센을 움직여 거품을 내야 한다. 적당한 온도에 잘 일어난 거품. 기쁜 마음으로 기념사진을 남긴 뒤 두 손으로 다완을 잡고 세 번에 나눠 마셨다. 아 맛있다. 미끌한 우유 거품과는 다른 포근하고 진한 거품이 그대로 입술에 묻어 혼자 민망하긴 했지만 마치 홀로하는 도원결의 마냥 '그래 이제 시작이야' 하는 마음이 일었다고나 할까. 


* 차센 : ちゃせん [茶筅] : 가루차를 끓일 때 차를 저어서 거품을 일게 하는 도구



준비물이길래 집에서부터 신고 갔던 하얀 양말은 다음부터는 따로 챙겨야겠다. 

단순한 복장 규칙을 넘어서서 그 의미에 이유가 있다. 

속세의 때를 묻히지 않고 정갈한 마음으로 다실로 들어간다는 의미란다. 


나 홀로 외국인인 점은 여전히 편치 않지만... 

속세의 때를 덜고, 부디 그런 마음으로 또 만나요.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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