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정 May 13. 2024

더운 바람이 부는 계절

지난 4월 첫 주에 다도 수업을 가고 일본/베트남 연휴로 한 달 넘게 쉬다가 5월 둘째 주 월요일이 되어서야 다녀왔다. 다짐했던 일본어 공부는 침실용 테이블 위에 초록색 책만 올려둔 채 그대로 망부석이 되어가는 중이다. 수업에서는 그새 다도 순서도 다 까먹은 것 같아 선생님의 힘을 많이 빌렸다.


한 달 넘게 저 자리. 민망한 민나고 니혼고.


나란 인간의 '보통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지.

그래도 괜찮아! 수업 취소하지 않고 오늘도 다녀왔잖아. 그걸로 족하다.

아, 과히 잦은 일희일비로 점철된 인생이여.


아주 적극적이진 못해도 웬만한 성적을 유지하면서 개근상 타오는 애. 나예요 나. 어찌어찌 알아듣고 적고 집에 와서 검색하며 배워가고 있다. 수업 전날 또 긴장하며 배울걸 생각하니 귀찮은 마음이 들었고 남편이 조금 눈치챘나 보다. 


"가기 싫은 거 억지로 하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간 수동적이라는 단어에 숨어있기도 했지만 결국 내가 선택해 온 길이니 조금 더 확실한 발자국을 찍으며 살자고 혼자 되뇌어 본다. 이번달부터는 줌바도 시작했다지. 다도와 줌바라니 극과 극의 활동이다. 크크. 누가 권하거나 시켜서 시작하는데 근데 그게 또 좋아서 근근이 많은 것들을 하고 있다. 어떤 날은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권유가 감사한 요즘이다. 결국 YES라고 말한 사람은 나다. 내 선택으로 이뤄진 것이 지금까지의 내 삶이니 수동적이다 시켜서 한 거다 뭐다 핑계 대지 말기.




다도 수업은 매주 월요일에 진행되는 약 8회의 연습(수업) 중 총 2회를 선택해서 연습하는 식이라 동반 연습생들이 누구인지 늘 랜덤인데 오늘은 완전 럭키였다.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요시코상과 미국인과 결혼한 미호상이 함께 했다. 존재만으로도 너무너무 고맙다는 것을 그녀들은 알까. 


특히 빌딩 맨 위층 옥탑방에 만들어진 다실이라 엄청 더운데 나 때문에 통역을 해주느라 더 진땀 빼는 미호상에게 더욱 고맙다. 수업 후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려 하는데 미호상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전문용어나 격식 차리는 옛 일본어를 통역하려니 많이 서툴렀다고 공부를 해오겠다는데 나는 그저 "いいえ- いいえ- I AM sorry!"를 계속 말할 뿐. 너무 고맙다. 이렇게 오늘도 신세 지고 살았다. 나도 언젠가 그녀에게 기꺼이 도움을 베풀 날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감사히 받고 기억해야지.



다실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다실 한가운데 다다미 아래에서 공기를 데우던 가마가 바깥, 다다미 위쪽으로 나왔다. 확실히 날이 더워졌기 때문이다. 손님들이 더워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의미이다. 이제 뜨겁고 불편한 온기는 온전히 차를 대접하는 '주인'의 몫이다.



일본 계절에 맞춰 다도를 진행하기 때문에 벽에는 5월의 기분 좋은 바람을 뜻하는 '훈풍'이라고 써진 족자가 걸렸다. 훈풍치고는 너무 뜨거운 바람이 부는 게 하노이의 오늘이지만. 하하.




사진 속 우측, 물을 떠올릴 때 쓰는 대나무 도구가 '히샤쿠'인데 오늘은 특별히 이 히샤쿠를 다루는 3가지 방법에 대해 꼼꼼히 배웠다. 


 * 히샤쿠 :  ひしゃく[柄杓] : 국자


오키비샤쿠, 키리비샤쿠, 히키비샤쿠


그냥 이 쪽의 물을 저쪽으로 옮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생각하며 팔 전체를 이용하는 것이 포인트다. 먼저 히샤쿠를 잡기  눈앞의 웅덩이를 상상하며 맨손으로 물을 올리는 것을 연습했다. 무릎을 꿇고 오른손가락을 모두 모아 깨끗한 물을 올린 그 물마음을 담는 잠시 머물고 무릎 차완에 천천히 따른다. 이때 손목만 뒤집는 것이 아니라 팔꿈치까지 전체를 함께 움직이며 예를 갖추고 특히 차완에 따를 오른 팔꿈치가 몸에서 멀어지도록 팔을 벌리며 옮겨 담는다.


수십 분이 걸리는 다도 과정 중에 물 따르는 한 부분이다.

차 한잔을 내는데 들이는 정성이 대단하다. 


이제 집에서 민나노 니혼고 첫 페이지를 넘기고 오늘 배운 다도 복습하는 것이 내 몫.

과연 나는 움직일 것인가. 두둥.


오늘도 안 하던 일들을 굳이 하며 뜨거운 여름을 맞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코비 데마에 그리고 헤어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