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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May 15. 2023

시스템 다시시작 17032022

비자발적 인간의 생존을 위한 자아탐구기 Ⅰ

발령 이주를 하며 느낀 감정과 발견에 관해 쓰는 이야기 중 첫 번째.
가장 좋았던 감정 중 하나는 해방감이었다.
그리고 그 해방감의 근원지를 말하자면 5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똥손은 웁니다


당시 새로 이사한 우리 동네는 미취학 아동 초과밀 지역이었다. 지금은 자동화 시스템이 생겼지만 그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려면 최대한 많은 곳에 직접 지원해야 했다. 추첨일이 되면 모두 모여 자기 번호가 불리길 두 손 모아 빌었고 현장의 애절함은 수년 전 수능 고사장 앞과 다름없었다. 나는 옆 동네까지 총 여덟 군데나 지원했다. 하지만 모두 보기 좋게 떨어졌다. 한편, 집과 가까운 곳에 시아버님이 운영하는 사업체가 있었고 그 바로 앞이 정원 미달의 ‘놀이 학교’였다. 장난 같은 운명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다.

구경이나 해보자 하고 입학 상담을 받았다가 눈은 한껏 높아져 버렸고 여기가 아니면 매일 셔틀버스를 40분가량 타야 하는 아이가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 회전이 빠른 남편은 ‘맞벌이로 가계에 보탬이 되면 비싼 놀이학교도 문제없다’라고 나를 은근히 설득했다. 이미 아버님과 일하고 있던 시누이도 ‘아이가 커가는데 계속 집에만 있을 거냐?’며 함께 일하자고 옆에서 거들었다. 게다가 당시 회사엔 상전 같은 후임은 싫다며 며느리 입사를 반대하는 직원들이 있었는데 시아버지께서는 기꺼이 자리 마련을 해 주시겠다고 넘치는 배려를 굳이 보여주셨다. 문제는 ‘싫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씌워질 고얀 며느리가 되고 싶지 않은 나, 그렇다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못 찾은 나였다. 내 앞날 결정에 ‘나’는 쏙 빠져있었다. 그렇게 얕은 고민 한번 제대로 못 하고 떠밀리듯 아이와 ‘환장의 출근’이 시작되었다.




애증의 시월드


얼마 지나지 않아 버거운 현실이 눈앞에 보란 듯이 펼쳐졌다. 나는 꽃을 선물받으면 숨겨져 있는 카드를 챙기고, 알맞은 병에 꽂아 오래오래 볼 수 있게 관리하는 게 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식물은 수단일 뿐 화분 리본에 붙여진 ‘배상 아무개, 소속 ooo’ 가 훈장인 분이시다. 꽃과 잎이 떨어지고 시들건 말건 상관없이 사람들이 오가는 현관에 리본을 빳빳하게 펴 자랑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셨다. 실제로 내가 몇 달 후 그 리본을 버렸을 때 리본만 꽃집에서 똑같이 새로 구매해오셨던 건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또한 인맥 관리를 위해 지역 유지나 관공서 고위직들을 만나시며 단골 식당 사장님에게까지 나를 인사시키기도 하셨다. 친한 친구들과 전화 통화도 잘 안 하는 내향인인 내게 쉴 새 없이 새로운 사람을 대면하는 일은 너무 고역이었다. 결국 이건 나중에 남편에게 도움을 청해 멈출 수 있었다.


팀장이었던 시누이도 나와 참 다른 성향이다. 좋게 말하면 친화력이 좋았지만, 열 살이 한참 넘는 사람에게도 반말하고 거리낌 없이 대하는 게 내 눈엔 무례함과 친근함의 아슬아슬 줄타기로 보였다. 업무 중엔 일을 계획하고 벌이는 게 아니라 일단 벌여놓고 수습하는 식이었다. 넘치는 추진력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엔 빈틈이 많았고 그걸 메꾸는 다른 직원들의 고생이 보였다. 그녀의 불안감, 두려움은 나의 10분의 1 정도 되었을까? 모든 걸 먼저 예상하고 플랜B 까지 준비해야 안심되는 나는 매일 소진되는 에너지가 거대했다. 하물며 내가 주로 맡은 업무는 오차 용납이 안 되는 숫자 관련 업무였으니 그야말로 불안의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였다. 그리고 하원하면 내 책상 옆에 자리 잡아 10초에 한 번씩 엄마를 부르는 껌딱지 딸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었다. 매일매일 하루하루 겹겹의 화가 쌓였다. 아, 모두 전 씨(氏)다. 이곳이 시댁인지, 직장인지, 육아 현장인지 모를 대환장의 콜라보다.


속 사정 모르는 사람은 가족회사라 편하겠네, 남의 손에 애 안 맡기고 돈도 번다고 부러워했지만 직원들 사이에서는 이미 발각된 언더커버와 같은 내 존재 때문에 다른 동료들과 거리감이 있었다. 귀가 후 직장 내 불만을 남편에게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 부부 싸움까지 번지는 날 또한 허다했다. ‘이 사람도 전 씨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지양합니다만) 사춘기에도 하지 않았던 욕이 이때 다 늘었다. 착한 며느리, 좋은 아내는커녕 매일 불평만 하니 절대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잠식되던 기간이었다.


워킹맘 95%가 퇴사를 고민한다(1) 는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도 누구 한 명 나의 퇴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까?’, ‘먼 곳으로 이사를 해야만 벗어날 수 있으려나?’. 허울만 착한 며느리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을 살며 그즈음부터 복잡한 마음을 안 보이는 곳에 글로 마구 풀어내기 시작했다. 주체가 빠진 결정으로 인한 고통과 대가가 고스란히 내 몫인 것을 그제야 발견했다. ‘내 목소리’는 그 누구도 대신 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 흩날리기만 하던 수많은 격언과 조언이 뒤늦게야 제대로 내 살갗에 닿은 것이다. 가족이나 주변 눈치 좀 덜 보고, 내가 원하는 걸 찾아보자고 첫 발걸음을 떼보기로 마음먹었다.


소박하지만 대담한 첫걸음


그 첫 시도는 도발과도 같았던 ‘육아기 근로 시간 단축 근무 제도’ 신청이었다. 직장 내 선례가 없었기에 조용히 혼자 알아보며 준비했다, 신기하게도 괜한 불안이나 걱정거리도 싹 사라지고 처음으로 내 안에서 용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좋은 기분이 들었다. 그 와중에 가장 큰 난관은 결재권을 가진 시아버지도, 제도를 몰라 누리지 못했던 시누이도 아니었다. 다만, 자기 아버지 사업장에 피해를 줄까 염려하며 단축근무를 반대한 남편이었다면 그 당시 나의 고독감이 가늠될까? 하교하면 내내 사무실에 갇혀 있는 초등 1년생, 자기 자식을 위해 단축근무를 하겠다는데 말이다. 왜 당신은 후천적 효자인지요? 암튼 당연하게도! 라고 쓰고 싶지만 감사하게도 제안서는 통과되었고, 단축근무를 누린지 2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갑자기 후천적 효자께서 빅뉴스를 터뜨렸다. “자기야 나 베트남으로 발령 났어.”

WHAT?! 철천지원수 같은 남편의 등 뒤에서 큰 날개 한 쌍이 돋아나는 환상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아니 이게 웬 떡이야 ?’ 라기엔 너무 큰 떡. 심장은 쿵쾅쿵쾅. 쩍쩍 갈라진 마음에 갑자기 햇빛과 비가 내려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난다. 친구 중 한 명은 우스갯소리로 남편의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신혼 초에도 한번 해외 발령이 예정되었다 취소된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최대한 차분히, 비행기 뜰 때까지 뜬 게 아니라고, 너무 기대하면 실망도 클까 봐 무의식적으로 부정하는 기간이 길었다. 그리고 정말 바보스럽게도 직장과 시누이의 혼란이 걱정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단축근무 4개월을 누리고 마침내 퇴사했다. 정말 이사를 하면서, 그것도 ‘해외 이사’를 하면서 퇴사가 성립된 것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집, 가족, 친구 모든 것을 뒤로하고 2022년 3월 코로나 난리를 뚫고 하노이로 출국했다.



Xin Chao, Ha Noi! (신짜오, 하노이!)


쌀국수 먹을 줄만 알았지, 베트남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곳에서 나는 종신계약 이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드디어 해방인 것이다!

모든 것을 초기화할 수 있는 이 귀한 시간, 아무도 나를 모르는 이곳에서 나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근데 어디서부터 무엇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가? 마치 광야를 지나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환상의 동남아에 도착한 듯했는데 ‘모든 건 신기루였나?’ 너무 시끄럽고, 덥고, 더럽기만 한 것 같았다.

이동이 잦은 주재 생활 탓인지 아니면 우리 세대의 특징인지 이웃 또한 미지근했다. 텃새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살가운 챙김도 없었으며, 어이없게도 그런 것을 서운해하는 나를 달래줘야 하는 시간이 길었다. 매 순간을 외국어로 대화해야 한다는 것 또한 생각보다 큰 제약이고 정신이 갇히는 느낌까지 들었다. 남편 회사 계약상 운전을 할 수도 없고, 지하철, 버스는 언감생심, 소통이 어려운 그랩 택시가 최선책이었다. 사실 자가용이 있다고 한들 교통신호가 무의미한 오토바이 천국에서 운전이 최상급 고난도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며칠 걸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외출에 제약이 있어도 초반엔 열심히 하노이 이곳저곳을 도장 깨듯 돌아다녔었다. 프랑스 식민지 흔적이 남아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들, 멋들어지게 뻗친 야자수와 늘어진 넝쿨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 한국 대비 저렴한 인건비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혜택도 좋았다. 그간 못 봤던 드라마도 실컷 봤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일상이 되면 무뎌지기 마련이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가 등교하고 나면 혼자 남는 시간이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났다. 내 커리어, 하고 싶은 일, 즐기고 싶은 일, 아무것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토록 바랬던 무직이건만, 다시 내 쓸모에 대해 존재론적인 물음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체류 신분상 취직은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뭔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겨우 얻은 해방감이건만 다시 어딘가에 속하고 싶은 이상한 기분이 들곤 했다. 이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1) 통계 출처: ‘2019 한국 워킹맘 보고서’ by KB 금융경영연구소



본 콘텐츠는 창고살롱Ⓡ 레퍼런서Ⓡ 이현정과 창고살롱이 공동 기획, 편집하여 유료서비스 구독 콘텐츠 서비스로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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