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시선
지난주 가장 큰 화제는 민희진 대표의 기자회견이었다. 3시간에 가까운 기자회견. 기존의 문법을 모두 깬 파격적인 기자회견. 인터넷에는 각종 밈이 쏟아졌고, '희대의 상여자 입덕 쇼케이스', '국힙원탑의 왕좌는 이제 민희진에게로' 등 민희진 대표를 옹호하는 의견들이 다수 생겼다.
하이브와 민희진 대표 간 이슈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민희진 대표가 기자회견을 열기 전까지 여론은 분명 하이브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이브 홍보실에서 연일 역대급 양의 자료를 쏟아내며 언론 플레이에 공을 들였지만 민희진 대표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터넷상에서는 대개 더 많이 더 시끄럽게 떠드는 편의 말을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기자회견 이후 하이브 쪽으로 흐르던 물결은 민희진 대표 쪽으로 바뀌어있었다. 기자회견을 본 사람들은 이미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민희진 대표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기자회견 초반 민희진 대표의 차림새와 욕설 등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던 댓글들은 중반부터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오히려 실시간 댓글창에는 민희진 대표를 응원하는 댓글들이 가득했다.
양측의 시시비비는 앞으로 기나긴 법적 공방을 통해 가려질 일이지만, 이번 기자회견을 통해 일단 여론전에서 민희진 대표는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시총 8조 원대 기업의 언론 플레이를 힘 빠지게 만든 민희진 대표의 기자회견에는 어떤 커뮤니케이션 전략들이 있었던 것일까. 기자회견을 보며 느낀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민희진 대표는 기자회견 채널로 유튜브 생중계를 택했다. 언론이라는 레거시 미디어를 주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활용한 하이브와는 대조적이었다. 사실 민희진 대표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민희진 대표가 엔터업계에서 아무리 레전드라 불리는 인물이라 해도 한 기업에 비하면 민희진 대표는 일개 개인이기 때문이다.
반면 하이브는 시총 8조 원대의 대기업이다. 홍보실을 통해 그간 언론과의 관계를 전략적으로 잘 구축해 두었을 테고, 평소 잘 다져둔 하이브와 언론 간 네트워크는 이슈 상황에서 빛을 발휘했을 것이다. 실제로 네이버 뉴스란을 보면 하이브의 입장을 실어주는 언론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튜브를 통한 기자회견은 민희진 대표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채널이었다. 기자회견 중 민희진 대표는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나라 PR문화도 좀 바뀌어야 해요. 기자님들, 작은 곳들 목소리 좀 들어주세요. 제가 이번에 겪어보니까 제 목소리가 실릴 곳이 없어요." 민희진 대표도 자신의 입장을 전할 곳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는 채널 선택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유튜브 라이브는 민희진 대표의 '찐 빡침'과 뉴진스에 대한 '찐 애정'을 필터링 없이 드러내기에 최적의 채널이었다. 바이럴 측면에서도 유튜브는 레거시 보다 훨씬 더 쉽고 빠르게 확산이 되는 채널이다. 이번 기자회견에 재미를 느낀 사람들은 자신만의 각으로 기자회견을 편집해 업로드했다. 기자회견을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이렇게 2차 확산된 영상들을 통해 기자회견을 만났다. 나에게(혹은 우리 기업에게) 유튜브가 주 커뮤니케이션 채널일 때는 강력한 무기가 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걷잡을 수 없는 들불이 된다. 하이브 입장에서 이번 유튜브 기자회견의 파급력은 정말 식겁할 수준이었을 것이다.
민희진 대표는 기자회견의 장르를 새로 썼다.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민희진 대표의 화법은 감정 그 자체였다. 감정이 드러나다 못해 그냥 철철 흘러내렸다. 욕도 하고, 울기도 하고, 화도 냈다. 지금까지 이런 기자회견이 있었나?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자회견이 아니라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어떤 형식은 그 자체로 내용이 된다.
한 번이라도 기자간담회 같은 미디어 이벤트를 준비해 본 PR인이라면, 민희진 대표의 기자회견을 보고서 정말 '헉! 헐? (내가 보고 있는 게 정녕 실화인가)' 했을 것이다. 정석대로만 보면 민희진 대표는 PI(President Identity) 관점에서 미디어 훈련이 정말 하나도 안된 상태였다. 언어적 요소는 물론 비언어적 요소까지 그 어느 것도 정제된 것이 없었다. 업계 사람들 중에는 "민희진 대표 옷차림부터 망했다"며 "정말 최악의 기자회견, 해서는 안될 기자회견으로 업계 교본이 될 것"이라고 말한 이들도 있었다.
그렇다. 만약 홍보실에서 기자회견을 준비했다면 이런 아마추어 같은 기자회견은 절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만약 홍보실에서 기자회견을 준비했다면 이런 이변을 일으킬 만한 기자회견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기자회견의 주최와 화자는 모두 민희진 대표 자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물론 민희진 대표가 이번 기자회견을 준비하면서 "기존 스타일을 깨는 파격적인 기자회견을 해야겠어!!" 같은 전략을 세워 접근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기자회견은 이래야만 해'와 같은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며 지키고 따라왔던 형식들이 때론 더 나은 방향을 만들어냄에 제약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희진 대표는 기자회견 초두에 스스로를 "평생 프레임을 깨뜨리기 위해 고민해 온 사람"이라 정의했다. 그래서 그런지 민희진 대표는 프레임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하이브의 프레임은 '경영권 탈취'와 '주술경영'이었다. 주술경영이라니.. 좀 많이 갔네 싶기도 했지만 어쨌든 하이브의 목적은 경영인으로서 민희진 대표의 도덕성과 전문성에 스크래치를 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이브의 프레임은 이성적이었다. 초반 하이브의 프레임에 노출됐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삼자가 되어 민희진 대표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민희진 대표의 프레임은 '열심히 일만 하다 회사에게 팽당한 직장인'이었다. 정말 영특한 프레임이었다 생각한다. 민희진 대표는 기자회견 내내 '직장인' 키워드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저 월급사장이에요. 직장인에요 그냥", "난 직장인으로 개같이 일한 것 밖에 없는데 회사가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하이브 저쪽은 정말 똑똑한 사람들 많은데, 전 그냥 미대 출신 일반인이에요" 등등. 민희진 대표가 던진 프레임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이번 이슈의 인식을 가진 자들의 경영권 싸움에서 회사 vs 직장인 구도로 옮겼다. 제삼자가 되어 객관적으로 이슈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민희진 대표의 입장에 자신을 대입했을 것이다. 몇천 명의 좋아요를 받은 유튜브의 어느 댓글은 "수많은 개저씨 상사들에게 당하고 있는 직장인들의 심금을 울렸다"였다. 사람들의 마음에 민희진=우월한 사람이 아니라 민희진=나와 같은 직장인 등식이 성립되면서 공감하고 몰입했다.
어떤 싸움이든 상대방이 나보다 잘하는 영역에서 내가 덤벼들면 깨지기 마련이다. 민희진 대표가 하이브와 동일하게 경영권 프레임 안에서 이성적으로 맞붙으려 했다면 아마 하이브의 프레임에 말려 다수의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상대 진영이 만든 프레임을 반박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 프레임은 더욱 강화된다. 상대의 프레임을 사람들의 인식에서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프레임이 감성적일수록 강력한 힘을 지닌다. 평생 프레임을 깨뜨리기 위해 고민했다던 민희진 대표는 이번에도 대세로 자리 잡는 듯했던 상대방의 프레임을 부수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