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평온한건 얼마나 행운인건지

#61. 무사 평안한 매일에 대한 소회(일상단상)

by 풍선꽃언니
인생 권태기라는 말이 있잖아. 함부로 쓸 말이 아닌 것 같아.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 이라는데, 오늘 하루 무사 평안했으면 감사할 일이지 지루하다며 권태를 논하면 되겠나 싶어.

며칠 전 외할머니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했다. 그 일만 빼곤 매일이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현업 근무 중일 때처럼 비상도 없고 갑자기 출동도 없다. 휴직 중인 나의 일상은 이토록 안정적이다.


매일이 평온한 만큼 내 마음도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일상생활을 원만하게 하고 있고 어제는 대학원 입시 요강을 자세히 읽어보고 대비반 수업을 등록했다.


까르가 엊그제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는데 이틀 동안 약 잘 먹이고 나니 괜찮아졌다. 어제저녁부터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물고 와서 같이 놀아달라고 할 만큼 컨디션을 회복한 것 같았다. 아빠는 동물병원에 갈 때마다 까르의 몸무게를 재보고 3.6kg인지 3.8kg인지 전보다 줄거나 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한다. 다른 강아지들에 비해 까르가 마른 게 속상해서 강아지용 소고기 통조림을 4개 사서 한통을 이틀 동안 다 먹였다. 맛있게 잘 먹는 모습을 보고 대단히 흡족해하는 아빠를 보는 내 마음도 기뻤다. 생명에 대한 사랑과 의욕을 잃지 않은 아빠의 태도를 행간에서 읽을 때마다 더 젊은 내가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내는 게 옳은가 정신을 다잡게 된다.

까르에게 "기다려"를 가르치는 중인 아빠, 둘다 귀엽다. 아기자기.
장난감을 물기위한 "까르"의 투지

글을 쓰다 보니 가끔 메일이나 댓글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 사연은 "엄마의 자살"이나 "실족사"를 검색어로 넣었을 때 내 글이 노출이 되었다고, 너무 힘들다, 상담할 수 있는지 등등으로 시작이 된다.


아직 누굴 상담할 수 있을 만큼 내 상황 정리가 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에 뚜렷하게 도움이 되는 어떤 한마디를 건네기가 조심스럽다. 위로라고 섣불리 꺼낸말이 더 고통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다. 그러나 보통은 대꾸를 해서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정도는 알리는 편이다. 두 달 전 엄마의 사고를 접했을 때의 나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발가벗고 뛰어다니는 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더라>며 세상을 원망했지만 두 달 뒤 나는 <심연의 고요를 느끼며 상처 치유 중>이라고 상태를 밝혔다. 이런 것들이 당장 닥쳐 고통 속에 허덕이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것 같다.

또 나에게도 내가 어떤지 알려주는 지표가 되니 석 달 뒤 나는 어떤지 일 년 뒤 나는 어떤지 꾸준히 마음건강을 들여다볼 생각이다.

아. 내가 지금 힘든 건 당연하다. 저 사람도 저렇게 힘들어하네. 두 달 정도 지나면 좀 나아지나 보다. 어떻게 살고 있나 살펴보자. 나는 지금 뭘 해야 하지?

이 정도의 생각에서 내 글을 접하고 있다는 독자(?)들의 의견을 접할 때, 나는 <누군가에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음>에 감사함과 동시에 <왜 나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을까> 억울해지기도 한다. 어쨌든, 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따른 불안과 우울치료를 계속하고 있고 일상의 평안 속에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중이지만 여전히 심연에 뭔가 밀물과 썰물이 일고, 그 과정을 눈물로 견디고 있다.


일상은 평안한데, 마음은 안 평안하다.

당연한 얘기 아닐까? 삼십오 년간 날 멋지게 키워낸 엄마가 하루아침에 떠났는데. 몇 달 만에 괜찮아질 기대는 이르다 싶고 다만 이제 뭘 해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확인 사살을 했음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 모색이 주가 되어 생각할 시간을 많이 벌고 있는 중이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다. 엄마가 추락하는 순간에 원했던 건 <죽음이었을지, 삶이었을지> 궁금하지만 아무도 답해 줄 수 없다. 다만, 나는 내 삶의 주체로서 원하든 원치 않는 내 몫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어떻게 살지에 대한 답 또한 내가 찾아야 할 몫인데 요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삶의 의지를 강력하게 느끼고 있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켜야 하는 중요한 것은 <가족들의 인생>이다. 자살자의 가족은 자살 생존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엄마는 사고사였음을, 공공기관이나 보험사를 통해 확인했지만 의도된 실족인지 우발적인 사고인지는 사실상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때문에 나는 우리 가족 역시 엄마의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생존자>로 지칭하고 싶다. 아빠와 남편을 포함한 다른 가족들이 나로 인해 <생존을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기를 원치 않는다. 내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올바로 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보다 더 중한 것은 <생존자로서의 나>의 가치이다. 죽은 엄마가 인생에 가장 열심히 한 것은 <가족에 대한 헌신>일 텐데 내가 살아남지 못한다면 엄마의 삶이 너무 무의미 해지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살아남아 엄마를 기억해야 할 의지과 내가 잘 살아 엄마의 삶에 기쁨으로 남아주고픈 욕심을 더해 내가 일어서는 방편으로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말하고 싶다. 권태로운 듯 평범한 오늘이 평범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행운과 행운이 겹쳐야 하는 것이고 살아있는 한 우리는 일어설 수 있음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주어진 시간들을 좀 더 알차게 살아갈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가 오늘을 조우하는 태도가 그러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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