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취향의 커튼을 살 자유

#63. 엄마가 물려준 유산에 덧칠은 내 몫

by 풍선꽃언니

온라인으로 뭐든지 주문하면 하루 이틀 안에 받아보는 세상이다. 새로 구입한 커튼 대성공!

내가 고른 우리집 커튼, 방마다 초록초록 싱그럽다


아빠와 합가 하면서 내 살림은 몽땅 시집에 선물했다. 엄마 살림도 많은데 우리 살림도 있다 보니 식탁도 두 개 세탁기도 두 대 등등. 49평형대 집으로 이사 왔지만 세 식구 사는 살림에 물건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때마침 바꿀 때가 된 시집의 살림살이를 우리 살림살이로 교체했다. 우리는 부부 침대와 티브이, 장롱, 냉장고만 빼고 소파를 비롯한 생활집기 일체를 우리가 살던 인천 집에 두고 일산으로 이사를 왔다.


이삿짐을 뺀 인천 집에 나는 따로 가보지는 않았다. 남편과 아빠만 생활집기를 가져다 두려 한두번 다녀왔다. 다다음주면 시부모님 내외가 그 집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내겐 거실에서 엄마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 암흑에 잠식되던 집이었지만 사실 우리 집 <구월 롯데>은 꽤 괜찮은 집이었다. 작은 평수(19평) 임에도 앞 뒤 베란다가 시원하게 나서 공간 활용을 하기 좋고 맞통풍이 잘되는 집.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역과도 가깝다. 무엇보다도 시장이 지척이라 생활물가도 저렴하다. 주변에 구경 다니기도 좋다. 남편과 나는 우리 집을 참 좋아했었다. 그러나 이제 안녕.


5월 17일에 지금 집 <일산 두산위브 더 제니스>에 이사를 왔고 보름쯤 된 지금 내가 고른 커튼이 집안에 걸려있는 것을 보면서 산뜻하니 만족스럽다.


나는 취향이 특별히 없었다. 엔틱도 좋고 바로크도 좋고, 현대적인 감각의 인테리어도 좋다. 냉장고 티브이 같은 것도 잘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만큼 무난한 것이 내 취향이라면 취향인 것 같았다. 신임으로 이제 갓 발령받아 정신없을 때였다는 핑계를 대지만, 혼수를 할 때도 그랬다. 특별히 취향이 없으니 집에 있을 것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마음 급한 엄마와 남편이 둘이 상의해서 마련한 살림살이에 몸만 들어갔다고 하면 말 다했지.


남편은 하나하나 자기가 고른 우리 혼수에 애착이 많다. 본인 본가에 보내는 것임에도 일단 우리 손을 떠난다는 게 슬프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반대로 나는 후련함을 느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신혼 때 우리 둘이 없는 돈 박박 긁어 대출 막아가며 마련한 살림을 보내는데 미련이 없다는 게.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엄마의 틀 안에 살던 내가 엄마 밖 세상으로 나갈 궁리를 시작한 데에 있다는 판단이 든다.


이제 날 위해 물건을 골라 줄 엄마가 없으니 나의 모든 것을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때문에 불안하더라도 나는 커튼부터 시작해서 내 것을 하나하나 채우는 연습을 시작했다. 나의 집은 좋았지만 모든 것이 <엄마 그 자체>였다. 신혼집의 찬장 어디를 열면 뭐가 있을지 내가 정리 안 했어도 알 수 있었다. 서른 해동안 같이 살던 엄마의 취향대로 정리되어있어 물건을 어디에 두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이제 나는 자유롭다. 엄마의 살림을 다 끌어안았지만 아빠는 살림에 관심이 없고, 이 큰 살림이 엄마가 물려준 유산이라면 덧칠은 내 몫이다. 내일이라도 당장 소파에 놓을 방석을 내 취향대로 골라 주문할 수 있다. 사실 나는 내 취향의 물건에 욕심이 있는 줄 엄마가 죽고 나서야 알았다. 엄마 것을 내 것으로 바꾸는 것은 묘한 설렘을 준다. 어찌 보면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천천히 느꼈어야 감정이었겠으나 나는 엄마가 죽고 갑자기 어른이 되려니 온통 낯섦 속에서 적응의 시간을 헤쳐가고 있다.

엄마, 어쩌면 엄마는 <엄마>로 살도록 예정된 엄마의 삶이 할 역할을 다 했기 때문에 떠난 건지도 몰라

추모공원에 가면 정말 많은 죽은 이들이 누워있다. 죽을 이유가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삶에 예정된 역할이 다했기 때문에 죽은 거라고 애써 좋게 포장한다면 엄마가 죽은 것도 그렇겠지, 하고 내 마음을 다독이기에 설득력 있는 구실이 되는 것이다.


커튼을 하나 고른 것뿐이지만, 엄마는 날 어른으로 만들려고 먼저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네가 다 알아서 해봐, 하고 엄마 살림살이도 다 물려주고. 너 먹고사는 건 너 스스로 해야지, 하고 아빠도 내게 맡기고 요리도 시키는 것 같다.


엄마답게,

엄마는 날 어른으로 키우려고

먼저 떠났나 보다.


기다리고 있겠지?

내 몫의 어른으로 내가 잘 크고 엄마 나이가 되면

얼마나 날 다독여주려고 이렇게 강하게 키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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