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동기 A와의 점심식사

#91. 일상생활로의 초대

by 풍선꽃언니

대학 동기 A를 가장 최근에 만났던 것은 엄마 빈소에서였다. 남편과 가끔 서로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던 사이라 부부동반 모임의 편안함이 있다. 엄마가 죽은 날 저녁과 그다음 날 저녁, A 부부는 대학 선배 몇몇과 함께 갈아입을 검은 양말과 마스크를 챙겨 들고 장례식장을 찾아주었다.


A는 대학 때 학회장을 하던 아이 었다. 왠지 나하고는 안 맞는 구석이 있었다. 가령 나는 취업에 열정적으로 매달린 반면 A는 학회와 같은 (당시 내가 느끼기에 비생산적인) 활동을 주로 해왔다. 대학 4학년이 되던 무렵 훌쩍 어학연수를 떠난다던지 왠지 모르게 태평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저래도 되나?" 하는 내 잣대로의 평가를 하면서도 그 자유로움이 부럽다고 해야 할까. 한편으로는 그랬다.


우리의 대학생활이 달랐듯 졸업 후의 생활도 많이 달랐다. 졸업 전에 남부럽지 않은 회사에 취업한 나와는 달리 A는 졸업유예를 하고 스물일곱쯤 되어서야 이름 모를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철없던 시절 어쭙잖은 우월감에 젖어 나는 A를 두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너보다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야. 네가 놀 때 내가 포기한 사교생활의 가치가 이런 거라고. 어때. 부럽니.

네임밸류가 성공의 척도라고 생각했던 정말 철없던 시절의 자만심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서울 소재 많은 회사의 한 부속품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나는 스물여덟 무렵 한 번의 전직을 했다. A는 지방에서 신임경찰 임용 전 연수를 받는 내게 몰래 먹으라며 초콜릿 등을 소포로 보내준 유일한 친구였다. 징징거리는 내게 고생 많다며 손 크게 상자 가득 간식거리를 담아보내 주는 사람. 나는 한 번도 누군가를 위해 해 본 적 없는 행위였기에 낯선 친절함이 고마운 동시에 부담스럽게도 느껴졌다.

(우리가 이 정도로 친했던가,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린 가끔 만났다. 만나면 다른 동기들이 어찌 지내는지 같은 얘기를 했다. 공통의 화제가 많지 않아 문자로는 가깝고 얼굴 보면 멀게 느껴졌다. 이런 우리의 관계에 불을 붙인 것은 남편들이었다. 비록 다른 계열사였지만 남편과 A의 남편은 같은 그룹사에 다녔고 겹치는 인맥이 많았다. 그 인연으로 남편이 러시아 파견근무로 모스크바에 나가 있을 때 A 부부와 우리 부부는 모스크바와 체코,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을 함께했다. 이후엔 연안부두의 한 회식당에서 여행 뒤풀이를 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우리들의 두 번째 여행 장소는 강릉과 삼척이었다. 각자의 집에 초대하여 부부동반 저녁식사를 하기도 했다. 남자들이 더 시끄러웠다.


우리는 서른다섯이 되었다. 내가 기억하기엔 A도 세 번 정도 이직을 했다. 여전히 이름 없는 회사지만 A는 대단히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급여도 나보다 많고, 다른 것을 다 떠나 자신의 직장 내 위치에 대해 확신이 있다. 나는 내 직장에서 나의 존재가치를 의심해 한 번의 전직과 또 한 번의 이직을 계획하는 현시점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반면, A는 자신의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현명하게 이끌어가고 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안정적이다. 나는 더 이상 소속된 네임밸류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는다.


오늘 A를 만났다. 남편은 MBA 기말고사로 바빴고 A의 남편은 네덜란드 출장 중이다. 고로 우린 자유부인들이 되어 있었다. 즐거웠다. 두 시간 만나 초밥뷔페에서 점심을 먹고 헤어졌을 뿐인데. A는 나에게 매실청과 직접 만든 샐러드를 내밀었다. 엄마를 잃은 날 은근히 위로하는 A의 마음 씀씀이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우린 더 이상 다른 사람 얘길 하지 않고 우리 얘길 한다. 요즘 부부 사이가 어떤지, 회사는 어떤지 같은 것들. 좀 전엔 남편들 코로나 예방접종 빨리 시켜서 여름휴가를 괌으로 같이 가지 않겠냐는 대화를 나누는데 오래간만에 머릿속이 시원해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A와 나는 오늘 별로 한 게 없다. 그냥 밥 먹고 커피 한잔 마셨다. 두 시간 함께 있다가 운전 조심히 하라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문자메시지로 도착 잘했다고 안부를 전했다. 매실청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A는 김치찌개에 꽁치통조림 넣고 끓이면 맛있다는 얘기를 했다. <연두>라는 요리 에센스를 첨가하면 모든 음식이 다 맛있어진다는 얘기도 했다. 소소한 사람 사는 얘기들.


A가 초대한 일상은 내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다.


즐거웠어.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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