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고 절약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96. 자식 물려주려고 저축한다는 말
절약을 해야 해
난 지금도 니들 물려주려고 저축한다
니들도 낭비하지 말아라
엄마가 죽은 지 3개월이 넘었다. 아빠는 허무병에 걸렸다. 입에 붙은 말이 있다.
내가 너네 엄마랑 그렇게 아끼고 살았는데...
먹고살만해지니 너네 엄마 죽고 모든 게 허무하다.
그럼 아빠, 이제 부터라도 제발 좀 쓰고 사세요!
아빠와 엄마는 신혼 때 딱 250만 원 들고 경남 김해에 위치한 대한항공 사택에서 시작했다. 서울에 친인척을 두고 있어 아주 어릴 때부터 비행기를 타고 서울과 부산을 오갔다. 항공사 복지정책으로 항공권이 저렴하게 제공되어 가능한 일이었다. 친척들은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우릴 부러워했다. 정작 나는 본가에 방문할 때마다 그들이 먹는 KFC 치킨과 피자헛 피자가 부러웠고 그 사실을 알았던 엄만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날(혹은 아빠와 돈 때문에 싸운 날) 배 터지도록 그러한 것들을 사주곤 했다. 치킨 한 마리 마음껏 사줄 수 없는 졸라매기 연속인 생활에 맏이 었던 나는 겉과 속이 다른 우리 집 형편을 눈치껏 익혀 자연스럽게 절약정신을 체득하며 컸다.
아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자꾸만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게 되는 때가 많다. 대학생이 되어 과외를 해서 용돈을 벌 때에도 그랬다. 사고 싶은 노트북은 당시 <넷북>이라고 불리던 앙증맞은 사이즈의 삼성 노트북이었음에도 내 노트북은 <현대 리베로> 브랜드의 제품으로 얼마나 무거웠던지 말도 못 했다. 2007년쯤 구입해서 고치고 또 고쳐 십 년을 꽉 채 워쓰다 군 생활하던 남동생 사택 비치용으로 물려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은 내뜻이 아니었다. 물건 하나 사면서도 끝없이 비교해 가성비와 가심비를 따지던 부모님 밑에서 덜컥 비싼 제품 하나 사면 사치부린다는 눈총이 싫어 그랬던 것이었다.
독립하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사야지, 생각하며 당시 나름대로 괴롭던 절약의 시기를 거쳐 어른이 된 지금, 마음만 먹으면 국산 중형차도 내일 당장 한대 계약할 수 있음에도(물론 할부로) 신혼이래 내차는 여전히 2015년식 스파크, 경차다. 바꿀 계획도 없다. 남편은 주변 지인들이 하나둘 좋은 차 타는 것을 보면 부러워하는 눈치지만.
아빠
난 절약도 좋지만
아빠가 돈 쓰는 모습도 보고싶어
자식들에게 절약정신을 길러준 것은 좋다. 특히 나 같은 경우는 절약하고 아끼고 하다 보니 일찍부터 돈에 눈을 떴다. 재테크에 밝은 편이고 셈에 빨라 야무진 소비생활을 하는 편이다. 남편도 '차를 사고 싶다'는 욕망을 빼곤 나와 성향이 비슷해서 우리 둘은 부모님 지원 없이도 내 집 마련을 빨리 했다.
아빠는 엄마와 노후대비를 열심히 했다. 나름 장학금도 받고 대학시절부터 내가 경제적 독립을 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연금 나오겠다 작지만 월세 받을 것 있겠다 딱 두 분 살기엔 안정적인 노후. 그런데 엄마가 죽었다. 죽은 엄마 몫의 (경제적으로) 평온한 노후는 오직 아빠의 것이 되었다. 엄마랑 자식들 결혼도 다 시켰겠다 은퇴도 했겠다 이제 재밌게 여행이나 다니며 살일 만 남았다고 하던 아빠는 허무주의에 빠졌다.
엄마랑 잘살아보자고 그렇게 아끼고 노력을 했는데..
미래의 평온을 위해서 절약만 하다가 호사 한번 못 누려보고 죽은 엄마만 불쌍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난 아빠가 더 불쌍한 사람 같다. 허무주의에 빠진 중에도 아빠의 말은 과간이다.
난 지금도 니들 물려주려고 저축을 한다
일할 줄만 알고 쓸 줄은 몰라서 아끼고 아껴 노후대비를 다 하고 나니 이젠 자식들 물려주겠다고 이를테면 상속을 대비한다는 말 듣기가 싫다. 그렇게까지 희생해서 물려주는 재산이 반갑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다.
아빠가 인터넷으로 <에누리닷컴> 좀 그만 들어갔으면 좋겠고 가끔 옷 한 벌을 사더라도 백화점에서 샀으면 좋겠다. 나도 아껴 쓰기 병에 걸려서 못하는 거지만 나는 살날이 더 많다. 아빠의 찬란한 젊음을 희생해서 자식들을 키웠으면 이제 좀 써도 된다. 허무하게 엄마처럼 써보지도 못하고 가지 않길. 제발 한 번이라도 가격표 안 보고 물건도 사보고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해줄 능력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는 안되니 아빠 꺼라도 아빠 마음대로 쓰라는데 여기서 절약=부모의 책임 공식을 내세우면 내가 태어난 게 미안해지잖아.
죽으면 끝인데 낭비 낭비 그놈의 낭비 그런 말 하지 말고 다 같이 때로는 낭비든 사치든 하면서 살아보자고 말했더니 아빤 그래, 먹고살만한데 까짓 거. 하고 내뱉어놓고 오늘도 동네에서 제일 저렴한 마트까지 찾아가 전단지를 집어와 내게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