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2)
#8. 엄마의 장례식과 외조모님
부모 잃은 자식은 더 못 받은 사랑이 고파 울고, 자식 잃은 부모는 더 못 준 사랑이 피멍으로 남아 운다.
우여곡절 끝에 차린 빈소가 이튿날 오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안정적으로 정돈이 되었다.
코로나로 민감한 시기에, 늦은 연락임에도 마다 앉고 많은 이들이 엄마의 빈소를 찾아 주었다. 특히 유년기 우리 집에서 엄마가 해준 밥을 한 번이라도 먹은 적 있었던 친구들은 자신이 기억하는 엄마와의 오래된 추억이 있을 터인데 그 때문에 오늘의 엄마 부고가 장난처럼, 멍하게 들렸다고 했다.
엄마는 우리 친구들이 집 근처에서 있다고 하면, 꼭 집으로 불렀다. 사 먹고 간다고 해도 굳이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와서 먹으라고 했다. 오랜만에 얼굴 좀 보게, 하면서.
우리야 뭐 이제 스무 살도 넘어 어른입녜 하고 여기저기 밤거리를 싸돌아 다니며 세계맥주집이니 라이브 카페니 오만가지 새로운 것들 지천인데 굳이 집밥 먹으러 집에 들어가긴 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가 집으로 와, 하면 그냥 야 엄마가 밥 준대. 우리 집 가자. 하고 친구를 집으로 데려갔고, 요리하며 즐거워 보이는 엄마를 보는 나도 기쁘니 그리하곤 했다.
엄마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손수 밥을 해주었다.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과 반찬, 냉장고에서 뭐 몇 개 꺼내고 좀 볶고 끓이고 하면 진수성찬이었다. 라면 이런 거 말고 진짜 밥.
엄만, 집에 놀러 온 어린 손님들에게 밥은 꼭 챙겨 먹여 보냈다. 다 먹을 때까지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다 먹고 나면 과일이니 커피니 후식까지 챙겨 먹이곤 잘 먹는 모습을 두 손을 모아 턱을 괸 채로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곤 했다.
요즘이 쌍팔년도 굶는 집 많은 시절도 아닌데 엄만 어린 손님들에게 무척이나 정성이었고 인심이 후했다. 스스로 뭔가 베푸는 것을 무척 행복해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 저 진짜 배불러요" 해야 식사가 끝이 났다.
학창 시절 우리 집에 숙식하는 남동생 친구들이 많았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저녁엔 온 식구가 둘러앉아 "엄마의 메뉴"가 뭐였냐에 따라 달라지는 주종을 잔뜩 깔아놓고 아빠까지 가세해서 술판을 거하게 벌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내 부모님은 옛날 사람 같지 않았다. 사고가 열려있어 어린 손님들의 얘기를 궁금해했다. 어색한 조합의 만남일 수 있었겠다마는 집에 누군가 초대하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던 나의 열아홉부터 오늘날이었다.
"네가 너무 걱정이 돼서.. 왔다"
그때의 그 사람들은 엄마의 빈소에서 나를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 남동생은 자기가 울면 엄마가 눈에 밟혀 못 간다고 자긴 안 운다고 했고, 안 슬픈척하는 내 동생이 안되었다고 올케가 대신 울었다.
"이럴 때나 한 번씩 보네. 연락 잘 못했는데. 그렇게 됐네"
"당연히 와야지, 네가 잘 추스러야돼. 그만 울어. 진 빠져"
눈물이 멈추지 않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며 같이 우는 그들. 참 오랜만인데 이런 때나 돼야 만났네. 그렇지만 정말 고마워. 와줘서.
오전 열 시 즈음이었을까, 입관식을 앞두고 나의 외조모님께서 빈소에 도착했다. 외갓집 식구 중 누군가가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것이고, 모시고 왔을 테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분을 마중하거나 손을 잡거나 눈을 마주치거나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자식 잃은 부모의 얼굴인데 마른 울음을 하는 당신은, 당신 자식의 자식들이 엄마 잃은 고통에 몸무림 치며 울고 있는데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 온정 같은 것은 잃은 지 오래된 이런 관계에서, 나는 나의 외조모가 안 오셨다면, 아니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라면 조문이 고맙기라도 했겠다 싶었다. 그냥 그 사람이 와 있는 게 싫었다.
엄마는 당신이 가난하고 막된 가정의 살림밑천 장녀라는 핑계로, 마구 조리돌림 당했다. 그러나 나의 외조모는 마지막까지 사과 한번 하지를 않았다. 사과는 그렇다 치고 내가 머리가 크고 식견이 생겨 엄마와 조금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어느 무렵에도 내 엄마에게 따뜻하게 곁을 내주는 모습을 보여준 적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 가슴엔 일평생 그것이 한으로 맺혔다. 엄마는 그런 사람도 엄마라고 사랑받고 싶어 했다. 철마다 때마다 좋은 음식을 챙겼다. 딸인 내가 내 엄마 챙기겠다고 이것저것 권할 때도 나에게 부탁해서까지 내 대신 그분 식탁에 오를 뭔가를 더 챙겨주고 싶어 했다. 가령 딸기가 제철이라 실하고 맛있는 걸로 골라다 나하나 동생네 하나, 아픈 막내한테 하나, 친정엄마한테 하나 가져다주면 고맙다는 말이 인지 상정일 것인데, 노인은 다른 형제에게 "먹지도 않은 딸기를 가져왔다는 둥 돈이나 주지" 욕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그 다른 형제는 "언니는 엄마 먹지도 않는다는데 쓸데없이. 돈이나 주지" 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꿋꿋했다. 상처가 될 만도 한데 그래도 엄마에게 그 사람은 엄마고 핏줄이니 잊고 좋은 게 있으면 또 바리바리 싸들고 가는 것이다.
엄마는 자기 엄마에게 조차 "필요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나하고 조금 다퉈도 "넌 나를 필요에 의해 찾지" 하고 말하며 상처 줬다. 딸이 엄마 찾는데 조건이 어디 있어. 그냥 엄마니까 응석 부리고 떼도 써보는 거지. 나와 엄마의 관계와 엄마와 엄마의 엄마와의 관계는 그 결 자체가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채로 또 어떻게 그렇게 굴러가고 세월이 흘러왔다.
그 사람의 얼굴엔 아흔 가까운 나이에도 자글자글 마른 살가죽 위에 욕심이 더덕더덕 붙어있다. 괜찮아요. 오늘이 당신이 당신 첫 째딸을 보는 마지막 날이고, 내가 당신을 보는 마지막 날일 테니, 하고 내 엄마의 빈소에 존재하는 그 사람의 존재를 참았다. 뭐, 어쩌면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그게 엄마와 엄마의 엄마 간에 존재하는 사랑의 방식이라면 또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싶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그 사람이 엄마 영정을 앞에 두고 나의 분노를 치밀게 하는 말들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정말 미친 것일까 그냥 조용히 애도하고 가시면 안 되는 거였던 걸까.
"나도 곧 간다"
아니요, 제발 늦게 늦게 좀 가세요. 우리 엄마 좀 내버려 두고. 가서도 우리 엄마한테 뒤치다꺼리 해달라 장녀니까 다 참아라 네가 희생해라 이러실 건가요? 소름이 쭉 끼쳤다. 그 사람이 발화하는 그 모든 문장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그러고 나선, 노인네 어디서 그런 큰 목소리가 나오는지
아주 자랑스럽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 옛날에 내가 식당을 했어. 그때 럭키 금성 임원 높은 사람이 그 식당도 많은데 꼭 우리 집엘 왔어. 얘가 이것저것 연예인을 하겠다 성우를 하겠다 이것저것 시험 보고 떨어지고 하니까 내가 그 사람한테 부탁을 했단 말이야. 우리 딸이 인물도 좋고 대학도 나왔는데 자꾸 떨어진단 말이야. 애 가 썩 괜찮은데 취직 좀 시켜주시오. 얘가 그 좋은 회사에 턱 하고 취직을 했어. 내가 취직을 시켰지"
아마 너무 해준게 없어 미안한 마음에 죄책감을 덜어보려고 아무말이나 떠들고 있는 것일까, 좋게 생각해 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도저히 당신이 어미가 맞는가 싶었다. 죽은게 당신 딸이다. 내 딸, 그동안 고마웠다. 사랑했다. 당신은 이런 말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지요 외조모님.
한참 예쁠 나이에 찢어지는 형편에 그래도 꿈을 꿔보겠다고 대학을 가겠다고 했다가 두들겨 맞기나 하고, 친척들한테 돈을 꾸고 꾸어 매 학기 등록금 걱정하며 대학 다닌 얘기, 입을 옷이 없고 밥 사 먹을 돈이 없어 친구들에게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 하며 빌어먹고 빌려 입고 한 대학시절의 얘기, 그 사람이 엄마에게 짊 어지 운 가족에 대한 부채의식에 항상 지만 잘 먹고 잘살겠다고 나간 이기적인 년이라는 죄책감을 안고 그 잘난 럭키 금성에 다니며 월급날만 되면 차비 한 푼 안 남기고 다 빼앗아가도 찍소리도 못했던 얘기, 한 시간 반씩 걸어서 출퇴근하며 느꼈던 삶의 비참함, 빨리 결혼하고 싶었던 이유 난 다 아는데 당신은 딸 앵벌이 시키던 그 시절의 얘기를 본인의 기억 속에서는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이 사람 저 사람 다 있는 우리 엄마 빈소에서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이다. 죽은 엄마가 어딘가에서 듣고 있다면 우리 엄마가 그럼 그렇지, 할 것만 같았다. 분노가 치밀어 애써 못 들은 척 외면했다. 아빠가 그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할머니, 당신 딸인 우리 엄만 그런 당신 밑에서 받은 상처에 일평생이 고단 했어요. 엄마 자식인 나에게 엄마가 줄 수있는 모든 것을 해줬고, 모든 사랑을 쏟아 부으며 늘 하던 말이 뭔 줄 아시나요? "딸, 넌 엄마처럼 살지마"
나는 엄마를 잃고, 내 새끼 키워준다고 했잖아. 반찬 해준다고 했잖아. 내 남은 공부 뒷바라지해준다고 했잖아. 인천에서 출퇴근하는 사위 힘들면 밥 준다고 들어와 살라고 했잖아. 아랫집 윗집 재미나게 살자고 했잖아. 나는 영원할 것 같았던 엄마의 사랑이 고파 울었다. 자식은 부모를 잃곤 못 받은 사랑이 고파 운다는데, 나는 영락없는 자식이 맞나 보다.
그런데 내 외조모님께는 남편과 자식을 앞세워 보내면서도 당신이 먼저였다. 당신이 엄마에게 해준 게 이렇게나 많다며 떠들 정신의 노망난 노인네였다. 엄마가 죽은 마당에 조금 괜찮은 사람이길 기대해 보고도 싶었는데 혹시, 하는 기대를 했던 내가 한심스러웠다. 좀 다행이랄까, 어떤 의미에서 엄마는 이꼴저꼴 더 안보고 자유로워 진 것이라고 나 스스로를 위로 했다.
하긴, 생전 외손녀라고 해서 날 예뻐한 적 없었어도 내가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들어가 동네 중고등학생들 과외를 하며 돈 몇 푼이나 벌기 시작하여 용돈을 드린다고 갔을 때 "손녀딸이 할마시 고생한다고 봉투를 주네" 하고 단 한 번의 예의상 거절 없이 그 돈을 받고 세상 밝은 웃음을 짓던 모습을 기억하면 기대할 것도 실망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