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1)

#7. 엄마의 장례식과 외조부님

by 풍선꽃언니

아빠가 경찰과 검찰을 아울러 실컷 취조를 받는 중에 또 다른 경찰은 남동생을 장례식장 건물 한편으로 불러 이것저것 조사를 진행했다. 두개골을 허옇게 내놓은 엄마의 시신은 영안실에서 딱딱히 굳어가고 있는데 해답과 결론 없이 시간만 계속 흘러갔다.


아빨 취조하던 경찰관은 "절차일 뿐이니 너무 불쾌해 마시라며" 딴에는 아빠를 진정시켜주려 했다.

아빤, 가족관계 기입란의 직업란에 평생 직업이 있던 자신의 직업을 "무직"으로 기입하며 잠시 어색해했을 것이다.

자식들 직장을 각각 대한민국 육군, 경찰로 썼을 땐, 상대 경찰관은 아니 딸이 경찰이면 가족이네요. 어떻게 자식들을 둘 다 군인 경찰 만드셨대. 군경 합동작전이네, 하고 조금 웃고, 친근한 어조로 "산사람은 살아야지요, 따님이 강하시겠네요" 하며 아빨 위로했다고 했다. 아빠는 "우리 딸 지 에미 닮아서 약해 빠졌습니다"라는 말을 헛웃음으로 대신했을 것이다.


아빠는 위기의 순간에 특히나 태연자약한 사람이라 엄마는 아빠의 그런 점을 유독 갑갑해했다. 감정적인 엄마(그리고 나)와는 달리 아빤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럴 때 아빠는 본인이 생각을 해야 하는데 엄마나 내가 말을 걸거나 하면 짜증을 냈고 침묵했다. 아빠와 엄마는 많이 달랐다. 많이 기뻐하고 많이 슬퍼하는 엄마와, 기쁘든 슬프든 잠깐인 아빠. 소녀와 고목나무 같달까.


위기 상황의 엄마와 나도 많이 달랐는데, 나는 궁금한 게 있어도 아빠가 생각의 동굴에 들어가면, 혼날까 봐 묻지 않고 끙끙 거리며 기다렸다는 점, 엄마는 엉뚱한 행동을 해서 모두를 경악하게 하거나 아빠에게 마구 책임을 돌리며 목소리 높여 탓하 거나하여 부부싸움으로 번졌다는 점

"너네 아빠가 얼마나 웃긴 사람인지 아니, "로 푸념을 시작할 때마다 나는 아빠가 엄마 등쌀에 불쌍하게 여겨지곤 했다. 엄마, 아빠도 잘해보자고 저러고 있는 거잖아.


어쨌든, 위기 중의 아빠는 뭔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해서 우릴(엄마 포함) 빨리 안심시켜주곤 했으니, 살면서 난 무슨 고민이 생기거나 하면 주로 아빠에게 전화하여 안식과 평화를 찾았다. 엄만 아빠한테 주로 전화하는 날 보며 또 "다른 집 딸들은 안 그런데 쟤는 애가 성격이 안 좋다"는 둥 "무슨 애가 싹퉁바가지 없이 떽떽거리고 너무 예민하다"는 둥 비난 일색이었다.


다시 며칠 전으로 돌아가, 우리 가족 최대의 위기 순간인

엄마의 죽음 앞에서도 아빠는 역시나 담담한 듯 보였다. 단 한 번의 무너지는 모습이나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안심이 되었다. "마음 단단히 먹어라" 한 마디가 갖는 고통스러운 현실의 무게가 평소와는 차원이 다른 막막함을 주었지만 내겐 든든한 아빠의 존재가 깊은 위로가 되었다. 삶이 힘들다 느낀 순간에 언제나 그래 왔듯 이번에도 아빠가 있으니까 다행이야, 하며 일단은 그 순간을 견디고 버티는 중이었다.


장례식장이 차려지고, 급한 대로 공무원 상조에 연락하고, 제출한 사진은 그럴듯한 영정사진이 되어 제단의 주인이 되어 서 있었다. 햐, 지금 내가 우리 엄마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 거야? 꽃 좋아하더니 꽃밭에 실컷 앉아있네. 천년만년 함께 하며, 내 새끼의 새끼까지 보고 가도 아쉬울 판에 지금 거기 서서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대답해. 아침에 창문 앞에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답하란 말이야. 울부짖었다. 답은 없었다. 그렇지만 TV나 뭐 어디 심령 프로그램에서 나오듯 갑자기 죽은 사람은 장례식장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는 거라면 엄마가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답을 줄거라 애써 미친 기대를 하며 마구 울부짖고 화냈다.


오후 여섯 시쯤, 장례식장 호실을 배정받았다.

일산병원 장례식장 10호실,


십오 년여 전쯤 암 투병하시던 외할아버지도 같은 병원에서 보내드렸는데, 공교롭게도 그때의 그 장례식장의 복도에 서서 이번엔 엄마, 내 엄마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경황에 초라하기 그지없던 외할아버지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비참한 말로는 그 집의 역사와 전통인 것 같다)


한때 같이 살았던 외삼촌 가족과 사촌동생(친손주)보다도 어쩌다 한번 보는 내게 가장 정을 주었던 나의 외할아버지는, 암투병 중 비참하게 죽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즈음이었나,

엄마는 나에게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크게 싸워서 혹시 할머니가 우리 집에 숨었을까 봐 칼 들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항상 집에 들어오기 전에 주위를 살피고 들어오라고 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 무슨 칼부림 같은 얘길 하는 건지 안색 하나 변함없이 엄만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딸에게 하며 안전을 당부시켰다. 그런 일이 설령 일어난다고 해도 놀라지도 않을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이다.


어느 날 엄마 심부름으로 반찬이니 곰국인지를 바리바리 싸들고 할아버지 댁엘 갔었다. 할아버지는 복수가 차고 검어진 피부에,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채로 불도 켜지지 않는 어두운 방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그물을 짜고 계셨다. 냉장고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물 몇 병 식은 밥, 반찬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타파 통 몇 개. 가슴이 죄는 것 같았다. 이게 뭐지. 할아버지는 항상 "넌 우리 손주들 중에 제일 똑똑하니까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그리 사근사근하지 못한 내게 파란색 지폐도 한 번씩 집어 주며 친구들이랑 놀기도 많이 놀라고 했다. 엄마한테 비밀해준다는 그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말이다. 아프시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조금 안 좋지. 허허 사람 좋게 웃었다.


하지만 당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맞았다며 얼굴이 거멓게 멍들어 우리 집으로 도망쳐왔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와선 엄말 붙잡고 너네 아버지가 날 죽이려 한다는 둥 요란스럽게 횡설수설했다. 엄마는 엄마의 아빠에게 엄마 여기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얼마 뒤 두 사람은 이혼을 했다. 위장이혼 이라고들 하던데,


사연인 즉,

"산 사람은 살아야지" 죽어가는 할아버지 앞으로 치료비는커녕 아파트 관리비 한 푼 안 남기고 얼마 안 남은 재산을 몽땅 챙겨 할머니가 도주한 것이었다. 한평생 그래도 니살이 내살입네 하고 자식 낳아 키우며 한 이불 덮던 사람들이었는데 돈 앞에 세월이니 추억이니 도의니 모든 것이 사치였다. 그에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 죽이겠다며 칼부림 운운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앞에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버리고, 할아버지는 엄마가 이러고저러고 쑤시고 알아봐 일산암센터 호스피스 병동에서 (엄마에게 듣기로는)고통 경감만을 시켜준다는 신약 임상시험에 몸을 맡긴 채 세월 보내던 어느 날 죽었다.

드시고 싶은 거 있냐고, 틈틈이 병원으로 음식이나마 해 날랐던 엄마의 애처로운 몸짓과 처진 어깨, 상심을 나는 기억한다.


새벽에 자던 중 할아버지 위독하다고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너 따라갈래? 물었다. 가야 할 것 같았다. 칼부림이니 할머니를 두들겨 팬 할아버지 등등 충격을 적잖이 받아 무섭고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가겠다고 씻지도 않고 따라나섰다. 이미 자가호흡이 불가하던 할아버지는 바싹 말랐다. 의식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할아버지... 하고 불러보자 실눈을 떴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려고 하는 듯이 움찔움찔하였다. 다 녹은 손톱만 한 사탕. 그러곤 완전히 영면하셨다. 그나마 예뻐했던 내가 보고 싶었나 보다고 엄마가 말했다. 나도 임종을 봐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날 순간의 고집으로 안 갈래, 했으면 후회했을 거라는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그렇지만 역시나 십수 년이 지나는 세월을 보내며 드는 생각은, 소중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저질스러운 수준,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인격, 하물며 자신을 존재하게 한 아버지이자 평생의 남편이었음에도 돈 앞에 나 살기 위한 걸림돌이라면 가차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는 그들과 난 외할아버지 장례 이후로 왕래를 끊었다. 아빠도 할아버지 상주 역할을 마지막으로 가차 없이 그 집안의 사람들을 끊어냈다. 그리고 자유로워졌다. 나도 아빠도, 엄마에게 그들을 끊어야 엄마가 산다고 수도 없이 설득하고 다그쳤다. 그런데 미련하게도 엄마는 혈육이 뭔지, 놓지 못했다.


어린 엄마를 돈 때문에 생면부지 부산 미역공장에 버린 여자, 엄마의 환자 된 아버지를 돈 때문에 버린 여자, 아픈 막내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며 방관한 여자, 둘째가 얼마 줬으니 너도 나 얼마 다오. 하는 식으로 형제간에 이간질을 일삼던 괴물. 엄마의 어머니. 그 어머니도 어머니라고 좋은 소리 한번 못 듣고도 미련스럽게 철마다 때마다 좋은 것만 챙겨다 주던 멍청한 엄마.


나는 제주든 속초든 어느 지방엘 내려가면 꼭 엄마한테 "오메기떡 먹을래? 오징어순대 먹을래?" 이런 것들을 물었다. 아빤 밖에서 사회생활하니 이것저것 잘 사다 먹을 것이고, 좋은 데 가고 좋은 거 먹으면 집에 있는 엄마 생각이 나서 꼭 같이 먹고 싶어 지는 것이다


(엄마 죽고, 가족끼리 고기를 먹으러가서 하던 말이, 아빠도, 남동생도 나와 같아서 맛있는 거 보면 항상 우리 마누라 생각이 나는구먼, 우리 엄마 생각나네 했다는 것이다. 엄만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엄만 참 딱한 사람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됐고, 너네 시집보내줘. 그거 맛있니? 맛있으면 할머니 좀 시켜주면 안 될까? 엄마가 돈 줄게" "돈 됐어. 알았어." 엄마. 그런다고 누가 알아준대. 딸이 맛있는 거라고 보낸다고 하면 맛있겠다. 하고 먹으면 될 것이지. 엄마는 엄마가 엄마 무덤 판 거야. 누굴 탓해. 참 핏줄 무섭다. 대단하다. 난 내 자식 낳으면 핏줄끼리 서로 민폐만 끼치지 말고 살라고 가르치고 싶다.


아빤 무거운 목소리로 나와 남편, 남동생 부부에게 각자 회사며 지인에게 부고 소식을 알리라고 했다. 경황이 없어 여기저기 연락을 대신 좀 돌려달라고 부탁을 하고 상복도 없이 손님을 맞았다.


"얼마나 황망하십니까" 아니요, 황당해 죽겠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지금은 누가 누굴 구해 줄 수가 없다. 일단 지금은 각자 버텨야 한다. 난 두통이 너무 심해 타이레놀을 여섯 알 즈음 먹은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음모론(Conspiracy the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