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엄마 죽음의 사인에 대해 집착하는 나에게 누군가 말해줬다.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집착하지 말라고. 엄말 그리워하는 것이 정확한 슬픔의 원인이니 상처를 치유하는 방향을 그렇게 잡으라고.
엄마가 죽은 지 5개월 차에 접어든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엄마 없이 보낸 시간도 반년이 다 되어간다. 엄마는 죽었고 죽을 것 같았던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요즘은 엄마 생각을 전보단 드문드문한다. 죽음의 경위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려 묻어두려 애를 쓰고 대신 엄마 몫의 살림에 더 집중하고 있다. 엄마가 죽고 나는 요리 솜씨가 좀 더 늘었다. 사온 반찬을 며칠씩 두고 먹기가 물려서 재료를 사다가 조리하기에 이르렀는데 최근에는 감자조림, 어묵볶음, 콩나물 무침에 도전했고 성공했다.
조현병이나 정신분열증 같은 것을 검색어로 넣고 엄마와 증상을 비교하는 것도 이제 안 한다. 몇 개월 동안 볼만큼 봤고 그런 것들을 해봐야 감정의 미궁으로만 치닫기 때문이다.
엄마의 사인을 생각하는 시간에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떠올리는 때가 늘었는데 누군가가 일러 준 것처럼 나의 슬픔은 엄마가 죽은 순간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부재함에서 오는 그리움 쪽에 더 무게가 있는 것 같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에 엄마에 대한 추억이 따라붙는다. 엊그제 예술의 전당에서 광화문 연가를 보았는데 재미나게 뮤지컬을 보면서도 엄마가 남편과 뮤지컬 보러 왔던 홀에 일부러 올라가 봤다. 엄마가 그때 얼마나 즐거워 보였는지 남편에게 반복해서 물었다. 또 엄마와 광화문에 갔었던 추억도 떠올려봤다. 광화문은 내겐 남편과의 십 년 연애가 담긴 젊은 시절의 로맨틱한 기억들로 가득한데 엄마는 돈 벌어오라는 등살에 부역 살이 하듯 걷던 고통의 장소라고 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여전히 마음은 아프다. 그러나 몇 달간 훈련하니 조금씩 되는 것은 엄마 생각에 매몰될 때마다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필라테스도 좋은 수단이다. 동작에 집중하려고 애쓰다 보면 잠시나마 내 상황을 떨칠 수 있어서 머리가 맑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