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문득 떠오르는 그(엄마의 가족)들
#116. 내 안의 분노 다스리기
TV를 보는데 어떤 할머니가 고생만 시킨 맏딸이 측은해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할머니 자체도 고생을 많이 한 얼굴이었는데 딸 생각에 자연스럽게 미안한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물을 뚝뚝 떨궜다. 나는 그런 장면을 보면 그런가 보다 하는 게 아니라 자꾸만 내 안의 불이 치밀어 올라 가슴이 갑갑해진다. 엄마의 삶에 대한 애잔함만으로도 힘든데 엄마의 가족에 대한 불을 가슴에 품는 건 정말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것 같다.
"그 집 식구들 누구 죽었다고 하면 나는 가야 해?"
남편에게 물었다.
"아버님이 결정하실 거야. 우린 아버님 하시는 대로 하면 돼. 가신다고 하면 같이 가고 안 가신다고 하면 안 가면 돼."
아마도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이기적인 부류이니까. 그들끼리의 감정싸움을 하느라 엄마가 고통받은 세월을 다 알고도 모른척한 사람들이니까.
엄마는 늘 고상한 말투와 세련된 행색을 하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고생이라고는 하나도 모르고 살았을 것 같은 엄마였다. 일산에 엄마의 가족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나에게도 보이고 들리는 그들의 추태만상. 그것을 참고 사는 사이 엄마 마음엔 병이 생겨 나와 남동생을 키우는데 집착하는 것으로 풀어오며 살았던 것 같다. 엄마는 늘 내게 엄마가 얼마나 좋은 엄마인지 말하곤 했다.
"넌 좋겠다. 엄마 같은 엄마 있어서. 난 없었는데."
"너 키우면서 내가 좋다는 건 다 해먹이고 해 입히고 하면서 키우고 그런 거 너는 아니?"
그럴 때마다 나는 건성으로 알아~ 하고 대답하곤 했다.
엄마가 바라던 대로 엄마 가족이 좀 더 서로를 위하고 따뜻하게 살아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그렇게들 서로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으르렁대며 살았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원흉의 시작은 '돈'이었다.
우리 집은 아빠가 성실했다. 번듯한 직장에 다녔고 벌이도 열심히 일한 만큼 좋은 편이었다. 물론 외벌이 형편에 아주 아주 유복하지는 않아도 내가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가족들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가족과 그 자식들은 그러지 못했다. 사업에 망해 재기의 의지 없이 십수 년을 방황하던 삼촌이나 뚜렷한 직업 없이 이혼한 큰 이모, 식당 알바 등등을 전전하던 작은 이모 모두 먹고사는 게 힘들었다. 상대적으로 잘 지내는 우리 집에 바라는 것이 많았다. 그 압력을 아빠 눈치 보며 생활비 타서 쓰던 엄마는 있는 한도 내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줬는데 늘 그들은 부족해했고 '있는 집이 더한다'며 욕했다. 실상 대단히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고 사촌동생들도 모두 번듯한 직장 없이 소기업에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근무하거나 백수로 놀거나 하며 살고 있다. 살면서 한 번도 열정을 불사르며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다 보니 실력도 없고 패배의식에 젖어있다. 부모의 가이던스와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받지 못해서 사는 대로 대충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안 좋은 생각은 차단해. 좋은 생각만 해. 네가 챙겨야 할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 생각을 해. 그 시간에 남편하고 어디 놀러 갈까. 남편한테 뭐 맛있는 거 해줄까 이런 걸 생각해. 어차피 우리 삶에서 더는 없는 사람들이야."
남편은 말했다.
"네가 생각하기에도 그 사람들 많이 이상해?"
"하나하나가 다 골아파.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상주인데 자고있는 것도 그렇고, 떡집 한다고 아버님 퇴직금 달라고 한 것도 그렇고, 교도소 갔다 온 그 사람이 제일 충격이지."
남편을 통해서 들어도 정말 막장 드라마 같은 엄마의 가족들인데 엄마만 열심히 그들을 짝사랑하며 살았다.
엄마의 병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을 것이나 엄마가 가장 고통받던 건 그 가족들 간의 문제였고 궁극적으로는 엄마를 '버렸던' 외할머니에 대한 엄마의 울분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엄마에게 고통만을 준 그들은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을 것 같다. 살다가 언젠가 마주 칠일이 있다면 그들의 삶이 얼마나 초라한지 일깨워 줄 수 있도록 나는 똑바로 살 것이다. 그렇게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