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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선꽃언니 Apr 04. 2022

아빠가 '드디어' 가스레인지 앞에 섰다.

60대에 처음 해보는 조리 일기(+작지만 큰 발전)

코로나 확진이 된 화요일부터 오늘(요일)까지 시간이 순삭 되었다. 자고 일어나서 몇 시간 깨있으면 또 밤이 왔다. 어제 피크를 치던 목 아픔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코로나 균의 마지막 발악이 어젯밤까지였나 보다. 대신 기침의 서막이 열렸다. 콧물은 덤으로. 가족들은 목 아픈 나보다 콜록거리는 나를 더 불안해했다. 일단 아빠와 남편은  어제 각각 PCR 검사와 신속항원검사를 했고 "음성" 상태다.


자가격리를 하고는 있지만 남편은 나와 한방을 쓰고 있다. 온 국민의 1/4이 걸렸는데 걸리려면 걸리라지. 매몰차게 날 방에 가둬두기가 마음이 아파서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출근도 못하고 나와 함께 집에 처박혀 있남편이 안쓰럽다.


아빠는 손소독제를 살뜰히 바르고 나와의 거리두기를 철저히 이행하고 있다.


식사 준비는 남편이 한다. 아빠는 내가 조리기구 하나만 만져도 난리를 친다. 코로나에 걸리니 공주가 된 것 같다. 묘하지만 어쨌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공주. 그러다 남편이 바빠 아빠가 주방 앞에 섰다. 아빠가 식사를 준비하는 뒷모습을 보는 것은 뭐랄까, 신기했다.


남편은 배고프면 냉장고를 열고 뭔가 찾아먹는 사람이다. 고추장에 참기름을 넣고 비벼먹는 게 전부라 할지라도. 아빠의 경우는 아무도 밥을 주지 않는다면 라면과 초코파이 냉커피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 인내심의 한계가 들 즈음이나 돼서야 뭔가 사 먹을 사람이다. 엄마는 나에게 죽기 한 달 전까지도 푸념을 했다.


"너네 아빠가 얼마나 웃기는지 아니. 집에 먹을 거 해놔도 차려먹기 귀찮다고 라면만 먹어. 미친 거 같아."


그런 아빠가 불 앞에 서다니. 진짜 놀랄만한 일이다. 나는 머리 털나고 한 번도 아빠가 주방에서 라면 이상의 무언가를 조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엄마가 죽고 친정집에서 생활하던 며칠간은 정말 아수라장이었다. 매일 눈뜨기가 무서워 차라리 죽으면 끝나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그때에도 엄마를 대신해 아빠의 끼니를 준비해야겠다는 의식이 있었다. 할 줄 아는 게 없어 냉동식품을 해동해서 굽기라도 할 요량이었다. 아빠에게 에어프라이어 조작 방법을 물었다. 이 집에 있던 거니까 아빠가 알겠지. 아빠는 무척 당황하며 아무 버튼이나 누르더니 결국 신경질을 냈다. 


"내가 이거 어떻게 쓰는 건지 어떻게 알아. 해본 적이 없는데."


아빠나 나나 밥을 제대로 해본 적도 없었다. 인천 집에서 눈대중으로 대충 넣고 해 먹긴 했었다. 그 때야 죽밥이 되든 떡밥이 되든 남편하고 나하고 둘이 먹는데 아무려면 어떤가 했었는데 여기선 상황이 달랐다. 햇반으로 며칠 버티다가 이마트에 밥솥 매장에 가서 집에 있는 것과 같은 사이즈의 밥솥에 쌀 몇 컵 물 몇 미리를 넣어야 황금 비율인지 배워왔다. 아빠가 엄마의 부재를 조금이라도 덜 느끼려면 먹는 것이 좀 괜찮아야 할 것 같아서 신경이 많이 쓰였다.


코로나 확진 후 목 아픔과 무감각해진 후각이 불편했지만 자기 전에 일단 새벽 배송 어플에서 "조미료가 안 들었다고 광고하는" 국거리 반찬거리를 주문했다. 아빠든 남편이든 되는대로 챙겨 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 얼린 상태로 오면 해동시켜서 끓이고 굽고 해서 간단하게 한 상 차려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다행히 남편이 재택근무 중이라 뭐랑 뭐랑 짝 맞춰 차리면 된다고 알려주면 말귀를 알아듣고 움직여 줘서 배달음식 신세는 지지 않았다(이놈의 아파트 단지 근처에는 맛있는 집이 없다. 그런데 배송비는 옆 단지 보다도 천 원 비싸게 받는다)


그러다 남편이 회사일로 바빠 우리 집 밥시간을 놓칠 때가 몇 번 생겼다. 조리하던 녀석은 회사 컴퓨터 봤다가 국 끓는 거 보러 나왔다 정신이 없고 그렇다고 일하는 사위더러 밥부터 차리라고 닦달하기도 좀 모양이 웃기고. 딸더러 하라고 하려니 퀭한 눈으로 기침을 해대며 연체동물처럼 쓰러져있는 이런 상황. 배가 엄청 고팠던 아빠는 두유를 한 개 먹다가 초코파이도 몇 개 먹다가 도저히 안 되겠었나 보다.


"야, 이거 그냥 다 붓고 이렇게 대충 휘저으면 되는 거냐?"


돼지불고기가 담긴 플라스틱 통에서 해동되며 흐르는 양념을 옷에 죄 묻힌 아빠. 칼로 비닐막 개봉. 프라이팬 뭘 쓰면 되느냐 기름은 넣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묻더니 끄덕끄덕.


"별것도 없네. 그냥 넣고 한 십분 불에 지지면 되는 거네."


해동된 음식물을 조심스럽게 프라이팬에 기울여 담아야 하는데 요령 없는 아빠는 고무찰흙처럼 집어던져 온 사방천지에 양념진창을 해놨다. 그렇치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아, 이거 기회다. 아빠의 자생력을 훈련할 기회.


아빠는 투덜거리면서도 기가 막히게 고기를 구웠다. 안 타게 살살 뒤집어가면서 말이다. 67년간 누가 해주던 밥을 먹고살다가 이제 와서 직접 해먹을 상황이 되니 "주방일은 원래 내가 할 일이 아님" 프레임에서 빠져나오기가 멋쩍은 모양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휴직 중인 동안 나는 아빠의 입맛과 건강을 고려해 내 딴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식탁을 준비해왔다. 그러나 내년엔 내가 집에 없을 것이고 아빠는 아빠 손으로 식사를 챙겨야 하는 날들이 늘어날 것이다. 지금 내가 곁에 있을 때 적어도 즉석국이나 밀키트 정도의 식사 준비를 할 의지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라면은 간단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즉석국도 간단하다는 것을 가르쳐 드려야 한다.


작년에는 발가락이 정말 작살나 수술을 했었다. 전신마취 수술이었고 입원은 이틀 했다. 올해는 담낭절제술을 했었다. 역시 전신마취 수술이었고 입원은 사흘 했다. 다 합쳐서 일주일도 안 되는 병동 생활이었지만 확실히 느낀 것은 입원 그 자체가 하루든 며칠이든 간에 할 짓이 못된다는 것이다. 답답하고 시끄럽고 피곤한데 계속 깨우고 피 뽑아 가고 등등 그런데 아빠는 나에게 번번이 입원을 오래 하고 완전히 나아서 퇴원하라고 했다.


"너 집에 와도 돌봐줄 사람 없으니까 최대한 오래 입원해."


아니, 의사 선생님이 더 있으라고 바짓가랑이를 붙들어도 링거 뽑고 도망가고 싶은데 어떻게 오래 있으라는 건지. 엄마가 있었으면 끼니마다 죽이며 부식이며 챙겨주고 상태를 들여다 봐줬겠지만 지금은 너 밥줄 사람도 없고 징징거려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병원에서 최대한 오래 버티며 해결하라는 소리. 상황이 그럴 것이라는 것을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발화된 언어로 직접 들으니 어찌나 서럽던지.


이번에 코로나 확진되어 골골댈 때도 남편도 바빠서 날 집중적으로 챙겨주지 못했고 아빠도 그랬다. 나는 환자가 되어 자가격리 중인 휴직자 신분이라 하루 종일 자든지 말든지 의무가 짓누르는 부분이 없지만 다른 가족의 일상은 계속되어야 했다. 틈틈이 가사를 챙기긴 했지만 내 성에는 차지 않았다. 밥 먹은 설거지 거리는 식기세척기에 들어가야 할 때에 먹은 그대로의 민낯을 드러내며 설거지통에 담겨있었고 다용도실의 파는 며칠째 방치되어 시들시들 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루 두 번 강아지 약을 먹여야 하는데 꿀에 개서 안 먹겠다고 버둥거리는 아기를 잡아다 강제로 입에 떠 넣는 번거로움 역시 아무도 꾸준히 챙기지 않았다. 남편이 있어서 그나마 밥이라도 얻어먹었지 아빠랑 둘이 있었으면 격리기간을 어쨌을 뻔했을까.


아빠가 그렇다고 가사에 무심한 사람은 아니다. 아마 엄마랑 살 때부터 훈련된 역할이 있는 것 같다. 각종 쓰레기는 쌓이기가 무섭게 내다 버린다. 나는 지금까지 일 년을 이 아파트에 살았지만 음식물쓰레기를 어떻게 내 다 버리고 분리수거는 어디 가서 하는지 알지 못한다. 요리하다 부족한 재료 있으면 마트 가서 재빨리 사다 주고 바닥청소도 아빠가 다한다. 같은 시간에 강아지 산책도 다녀온다. 그런데 오직 주방일 만큼은 절대 손대지 않는 이상한 고정관념이 있다. 청소도 좋고 빨래도 좋다. 그런데 일단 사람이 잘 먹어야 할 것이 아닌가. 배고프다고 점심에 라면 + 초코파이 저녁에도 라면 + 초코파이 이러고 있으면 같이 사는 사람이 편하게 있으래야 있을 수가 없다. 배가 일단 채워졌으니 나가서 사 먹지도 않고 어쩌다 사 먹고 오면 그다음 끼니는 또 라면을 먹으니 속이 터질 노릇이다. 엄마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밥을 했던 이유도 엄마가 좋아서였다기보다는 아빠가 저러니 어쩔 수 없었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빠는 현재 내가 만지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상태다. 내가 주는 밥도 안 먹는다. 오늘은 남편이 출근했고 아빠랑 나랑 둘이 저녁을 해결해야 한다. 나는 오늘 아빠에게 밀키트 조리를 하도록 할 예정이다. 유통기한 얼마 안 남았다고 살살 구슬려서 다시 가스레인지 앞에 세우고 배가 고프면 라면을 집을게 아니라 냉장고를 뒤져 뭔가 꺼내 조리해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드려야겠다.


남편은 미주사업팀에서 근무하는 사람이고 언제 타국 발령이 날지 모른다. 가까운 시일일 수도 있고 몇 년 뒤가 될 수도 있다. 나이 칠십넘어 미국 같은 나라에 가서 적응하는 문제는 젊은 나와는 다를 것이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하기에 앞서 아빠는 우리가 미국에 가게 되면 같이 가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덮어놓고 싫다고. 친구도 없고 뭐하나 하려면 빨리빨리 되지도 않고 답답하다고. 그렇게 되면 혼자 살든지 할 텐데 지금 음식 해 먹는 습관이 안 들면 아빠는 라면만 먹다가 여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그 언젠가 닥칠지 모르는 별거를 위해서라도 가끔은 아빠가 좀 하라고, 귀찮게 굴어야 하는 것이 나의 몫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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