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의 역사

#84. 이유있는 합가와 의미있는 분가

by 풍선꽃언니

나는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서울에 근거를 둔 분들이었기에 지방살이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빠가 김해공항으로 발령이 났을 때 엄마와 결혼을 했고 엄마는 결혼과 동시에 김해로 내려가 살았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고도 8년간 우리 가족은 김해시 내동의 칼 아파트(사택)에 살았다.


93년도인가 일산 신도시 붐이 일어났다. 우리 가족도 김해 생활을 접고 일산의 한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갔다. 아빠와 엄마는 김포공항 발령이 지연되어하는 수없이 주말부부 생활을 2년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빠는 금요일 마지막 비행기로 올라와 월요일 새벽 비행기로 다시 내려가곤 했다. 엄마랑 다툼이 잦았다. 싸운 날은 일요일 오후 다섯 시 비행기로 내려갔다. 아빠가 빨리 내려가면 아빠한테 화낸 엄마가 미웠다. 그저 아빠가 놀아주는 게 좋아서 엄마 밉다고 투정 부리고 했었던 어린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엄마 억척에 우리 집도 전세를 벗어나 학교 근처에 <내 집 마련>이라는 것을 했다. 아빠도 그즈음 김포공항으로 발령이 나서 본격적으로 합가를 했고 온 가족이 함께 사는 동안 행복했다. 그 당시에 내가 초등학생이었다고 해도 엄마는 내 나이밖에 안되었을 때라고 생각하니 엄마는 참 어려서 아빠 만나 결혼했었구나 싶다. 새 소파에 버티칼. 이사 전의 우리 집에 나 혼자 덩그러니 들어가 이삿짐 차가 올 때까지 앉아있다가 옆으로 누워 스르르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집에서 중학교 때까지 살다 같은 단지 내에 한 번의 전세를 거쳐 고등학교 때부터 취업하고 나서 경찰공무원에 입문하기 전까지 십 년 정도 살던 진짜 우리 집에 이사했다.


당시에 엄마는 우리가 점점 크면서 큰집을 갈망했고 집값이 싸다는 이유로 분양받아 마련한 집이었다고는 하나 엄마는 살림살이를 새것으로 바꾸고 인테리어도 싹 해서 군더더기 없이 살림을 관리했다. 아빠 역시 이사날짜만 손꼽아 기다리는 엄마 보기가 기뻐서였던 건지 공사 중이던 우리 집에 자주 데려가 여기가 이제 우리 집이다, 하며 구경시켜주던 기억이 아득하다. 젊은 엄마와 젊은 아빠. 두 사람은 자수성가로 우릴 그렇게 키웠고 정작 두 사람은 아끼고 절약하느라 많이 참고 살았더랬다.


킨텍스가 새로운 택지지구로 개발이 되면서 뙤약볕에 우리 가족도 각자의 청약통장을 들고 줄을 섰다. 비록 최초 당첨자는 아니었지만 당시 비싸던 분양가로 소위 던지는 물량을 싼값에 넙죽 받아 같은 동 같은 라인에 부모님과 위아래층으로 내 집 마련을 했다. 수중에 돈이 없어 중도금이니 갚아나가느라고 정말 근검절약의 끝판을 보듯이 열심히 살았다.


입주를 3주 앞두고 엄마가 죽어버려 하루도 살아보지 못하고 세를 놓았다. 아빠와 합가해 현재의 집에 살고 있다.


가족의 이사와는 별개로 나의 이사는 또 그 나름대로 화려하다. 고등학생 시절 유학을 시작으로 남의 집살이를 두 가정(외국인)에서 했고 대학을 한국으로 와서는 반학 기 마다 기숙사와 월세 자취방을 전전했다. 이사를 네 번 정도 했던 것 같다. 마지막 살던 집은 인천 주안역 근처에 모텔을 개조해 만든 리빙텔이었는데 주인 할머니 내외분의 인심은 좋았으나 관리가 부실해 복도에선 희뿌연 담배연기가 가득했고 실내에선 오래된 에어컨 필터 냄새가 났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금융그룹 계열 증권회사에 합격하여 다녔다. 아침 이른 시간 출퇴근이 감당이 안돼 신길동에 18평짜리 전셋집을 얻었다. 비로소 사람 살만 한 집을 얻어 독립이라는 것을 했는데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한 2년 좀 못되게 살았을 때 이직하게 되어 집을 빼야 했는데 집주인의 이혼소송으로 건물 전체가 가압류되어있는 터라 전세기간 만기전까지는 전세금을 반환해 줄 수 없다고 했다. 한동안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


경찰에 합격하고는 모 지방 소재 교육원으로 내려가 일 년을 보냈다. 전입신고해야 하는 자취생활은 아니었지만 지역이 워낙 생소한 지방이었다 보니 수도권 향수병에 빠져 한동안 우울했다. 적응할만하니 다시 인천으로 발령받아 올라왔고 그때 처음으로 배정받아 살았던 관사가 인천 중구 항동 소재의 <라이프 비취 맨숀>이었다. 정말 오래된 아파트. 인천과 역사를 함께했다는데 아침이면 부두로 출근하는 외국인 노동자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여름에는 바로 앞 어시장에서 풍기는 생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서민으로서 삶의 터전에서 진한 인간미를 느끼며 살았던 장소. 집은 비록 무서웠지만 그 집에 살았던 덕분에 월세였다면 한 천만원쯤 아낄 수 있었다. 이후에 갔던 곳은 결혼하고 남편과 함께 이사 다녔던 인천 학익동 신혼집과 송도의 한 오피스텔, 구월동의 롯데캐슬. 총 6년간 3번 이사를 했다. 한동안 마지막 이사이길 바라며, 이번에는 일산 탄현동에서 아빠와 합가를 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 이사라면 지긋지긋하다. 지금 와서야 살았던 동네마다 그 나름의 추억 타령을 하지만 상황에 맞춰 이사 다니는 동안 나는 멀쩡한 살림을 버리기도 했고, 구색 맞추느라 어디서 물건을 주워오기도 했다. 짐을 풀고 싸느라 내 집이라는 안식의 마음보다 적응에 따른 스트레스를 늘 안고 살았으니 이제 이사는 그만하고 싶다.


오늘은 인천 구월동 집으로 시어머니 내외가 이사하는 날이다. 시집이 형편이 어렵다는 것은 며느리에게는 참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르신들도 내 남편의 부모님이고 가족이라 남처럼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때문에 우리 부부는 아빠의 정서적 지원을 위해서는 합가를, 시집의 경제적 지원을 위해서는 구월동 집에 시 부모님을 모시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게 참 묘하게도 후련하다.


<이유있는 합가>

먼저 남편 얼굴을 볼 낯이 선다. 우리 집이 엄마의 죽음으로 엉망이 되었을 때 남편이 없었다면 일어설 수 없었을 것이고 토 한 마디 달지 않고 합가 해준 남편. 그 남편의 마음속에는 내 부모님 소중한 만큼이나 월세로 전전긍긍하는 자신의 부모님도 마음에 걸렸을 텐데 나는 세상은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미있는 분가>

남편의 호의에 꼭 보답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남편은 오늘 아침 시집 이사를 도우러 밝은 표정으로 나갔다. 우리가 쓰던 좋은 가구들이며 전자제품 일체도 서비스로 함께 드렸다. 시집에서는 살게 없이 몸만 들어오면 될 만큼 말끔히 정돈된 두 분 만의 공간이 생겼고 나와 동갑인 시동생은 이번 이사를 계기로 드디어 독립을 해서 신이 났다.


남편과 나는 장남과 장녀이다. 우리가 짊어지고 갈 몫은 우리만 잘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편하게 그 집안까지 둘러보아야 완전해진다. 엄마의 죽음으로 우리 부부는 거주지를 옮기고 우리가 살던 곳에 시부모님을 모시고 등등 생활의 변화는 컸지만 한 살이라도 젊은 우리가 하는 것이 연로한 부모님 고생보다야 아무렴 나을 테니.


오후 늦게나 남편이 돌아올 것 같다. 김치찌개 보글보글 끓이고 돼지고기 바싹 구워 상추랑 차려놓고 기다려야지. 오늘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종알종알 수다하고 싶다.


사랑하고 고맙소.

내 반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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