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재(四十九齋)

#36. 난 엄마가 그립다

by 풍선꽃언니
<삼국지>가 큰 도움이 됐다니까.
하도 여러 사람 젊은 나이에 죽으니까
사람이 죽는 게 두렵지가 않더라니까

넷플릭스에 보면 중국 드라마 <삼국지>가 있다. 무려 90화 즈음된다. 심지어 영화로 짧은 편도 있다. 남자들이나 좋아할 법한 전쟁 얘기에 전략 전술 타령 해대고 시끄럽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드라마(사견). 구월동 집에서 내가 당직근무로 집을 비운 날이나 돼야 남편은몰래 삼국지를 보곤 했다. 삼국지가 아빠에겐 심리상담센터보다 강력한 상실의 아픔 치유효과가 있었다고 하니 별일이다.

사랑과 미움, 충의와 간신, 신의와 배신, 은혜와 복수, 절의와 훼절 등 인간의 오욕칠정이 가감 없이 그려진 이 책(삼국지)에서 필자가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삶이 늘 공의로운 것도 아니고, 정의가 늘 이기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 혼탁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착하게만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살라"고 권고한다. <나관중 저 삼국지 머리말>

남편과 아빠는 특히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지략가 제갈량의 꾀에 감탄하곤 했다. 극 중 어진 정치가로서 모시던 유비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유선을 끝까지 보필하며 충절을 지키는 자로서 유비 관우 장비 등 유명한 인물들 중 가장 장수하다가 죽었다. 그의 나이 향년 53세였다.


수천 년의 세월의 후대에 그 이름을 남긴 이도 죽으면 한 낱 흙으로 돌아가는 판국에 극중 50대가 된 백발의 영웅들이 그렇게나 계속 죽고 향 피우고 읍소하니 죽음이 피할 수 없는 다 겪는 일임이 실감이 나서 위로가 된다는 논리다.


엄마가 죽은 지 벌써 49일이 지났다. 가족들은 엄마의 상실을 느끼면서도 슬픔의 감각에 익숙해져 더 이상 구슬피 울지 않는다. 대신 조이는 가슴을 안고 침묵하는 시간을 보내는 때가 많아졌다.


엄마의 제사상차림은 요리도 못하는 나와 엄마의 며느리가 매번 만들 능력도 안되고 들이는 시간에 비해 맛이 미안할 예정이라 좋은 업체를 통해 차렸다. 내가 직접 만들어야 하는데 딸이 돼서 엄마 제사상 하나 제대로 대접을 못하는 게 속이 상했다. 하지만, 다들 일하는 처지에 갈등 없이 차림 음식은 주문하기로 아빠가 그렇게 정리를 해주고 나니 서로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항상 밥을 집에 와서 먹었지
집에 오면 맛있게 차려줘서.
그걸 정말 생각하면 고마워

제사음식을 거두어 점심을 먹었다. 가족들은 서초동에서 제사 지내던 시절 얘기를 꺼냈다. 우리 집은 제사가 없어진 지 꽤 되었는데 집에서 향을 피우니 제법 옛날 기분이 났다. 제사 지내기도 전에 생밤 오도독 거리며 먹다가 들켜 혼났던 얘기며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갔다. 그러다 누군가 엄마는 뭘 좋아했지? 하고 물었다.

튀밥 붙은 엿 과자랑 약과, 나물..
육전이랑 다른 건 너네 싸준다고 한 거고..

아빠는 남편이니 우리보다 엄마에 대해서 더 잘 아는 거야 하고 핑계 대고 싶은데 속마음은 내가 이렇게나 엄말 몰랐구나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전에 대해서도 그렇다. 제사도 안 지내는데 먹지도 않는 전을 하루 종일 부치냐며 올 설에도 엄마를 타박했는데 우리 먹이고 싶어서 그랬었구나. 엄만 먹지도 않으면서 주방에 종일 서 있는 게 속상해서 타박만 했지 엄마 마음을 내가 참 몰랐다.


하나하나 엄마와의 일상적인 기억들이 희미해진다. 평범하게 넘어간 순간들이 어렴풋이 그랬었나? 헷갈린다. TV에서 어떤 연예인이 일상을 잘 기억하려면 그 일상 속에서도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데 엄마의 부재가 메워지며 희미해져 가는 과거의 시간들이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나는 딸이다 보니 엄마에게 정서적으로 의지를 많이 했었다. 집에 와서 하소연을 하면 엄마가 들어주는 게 좋았다. 가끔은 지나친 관심이 귀찮기도 했다. 하지만 대게 엄마는 내가 얘기하면 잊지 않고 잘 기억해주는 편이었다. <엄만, 네가 제일 중요해> 하며, 친정엄마는 딸의 영원한 빽이라더니 그런 말은 하지 말지, 무슨 빽이 말도 없이 이렇게 떠나.


엄마가 죽고 장례식장에서 어릴 때 친구들이 기억하는 엄마와의 에피소드들을 들었다. 우리 엄마라는 사람이 얼마나 삶에 열정적이고 내게 다정했는지 떠올려보게 된다.


"우리 고등학교 때 너네 엄마 너 새벽에 혼자 공부하는데 외롭다고 잠 안 자고 기다리셨다고 하던 거 생각난다"


"중학교 때 너네 집에 갔더니 너희 어머니가 중국펀드 하신다고 여기저기 알아보러 다니셨잖아. 그때 대단하다 싶었지"


우리 집엔 여자가 원체 드물다. 집안에 엄마랑 나 고모까지 셋뿐이고 위로 아래로 집안 자체에 자매 동지가 없다. 그래서 고모는 어릴 때부터 나만 보면 꼭 껴안으며 <넌 우리 집안의 유일한 꽃이야>하고 추켜세워주곤 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고추 내놓고 같이 노상 방뇨하던 사촌오빠들과 어울릴 수도 없었고 비비총 쏘며 마당을 뛰어다닐 수도 없었다. 누가 뭐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제외되었다. 사촌오빠들도 사춘기라 <여자아이>라는 게 의식이 되어 쑥스러웠다고 한다.


남동생이 있지만 깊은 교감이 있지는 않다. 남동생도 나도 타지살이를 일찍 시작해 집에서 서로 부대끼며 지대던 때는 내가 열일곱 살 즈음이 마지막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변에서는 내가 외동인 줄 알만큼 나는 나대로 엄마 사랑을 독점하며 자랐다. 남동생과 같이 보내는 시간 없이 자라다 보니 지금도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운 것은 좋지만 형제의 정이 가끔 그리울 때는 아쉽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동생은 남동생대로 엄마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그렇게 추억이 많은 줄 몰랐다)


나는 그나마 우리 집 남자들 중에서 아빠와 가장 가깝다. 오랜 사회생활의 연륜이나 사회 경제 등 이해득실에 관한 현실적인 정보를 공유하거나 하는 것들은 아빠와 실컷 나눌 수 있고 의지가 된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엄마와 나누던 말랑한 대화를 아빠와는 할 수없다. 여자들끼리만의 감정선에 공감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이 좀 답답하다. 그래서 난 엄마의 부재가 더 힘이 드나 보다.


엄마의 영혼은 49재를 기점으로 이승을 완전히 떠난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진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영혼이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을 거라 믿는다. 엄마의 몸짓 하나하나는 세월의 힘에 묻혀가더라도 엄마의 딸인 내 안에 있는 엄마의 따스함이 내가 살아가는 데는 든든하게 살아 있을 테니까.


우연히 49재 아침에 씻고 나오려다 걸려있는 수건에 걸려있는 메시지 <행복하세요>를 보았다. 너무 우는 내가 안타까운 엄마의 격려 아니었을까.

엄마, 나 행복하게 살게 지켜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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