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과를 먹은 남자

#41. 이별 후 폭풍에 시달리는 아빠

by 풍선꽃언니
집이 좋으면 뭐하냐
너네 엄마가 없는데

가족단합에 의미가 있다는 아빠의 의견으로 이사 갈 집의 입주청소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그게 오늘이다. 두 집 살림을 합치다 보니 집이 크고 입주 청소비도 평당 만원씩 적은 돈이 아니더랬다. 돈도 돈인데 남자 셋에 여자가 하난데 입주청소가 별거냐 싶어 청소도구 잔뜩 싸짊어 지고 이사 갈 집으로 출발!


엄마는 조현병이 악화된 죽기 전 3주 동안 이사가기를 간곡히 희망했다. 현재 집은 "불특정 한" 존재에 의해 감청, 도청 되고 있어 불안해 살 수가 없다고 했다. 가족들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경찰에 CCTV 등 기타 장비가 묻혀있는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해 집안 스캔을 한번 싹 하고 이상 없다는 확답을 받았지만 엄마는 집안의 반짝거리는 그 어떤 불빛에 대해서도 의심스러워했고 두려워했다.

비데의 불빛이 무서워 까만 전기 테이프로 램프를 가렸다

이사 갈 집은 일산 탄현동의 위브 더 제니스 아파트. 우리 가족은 스무 살 무렵부터 탄현동에 십 년 정도 살았다. 위브 더 제니스가 다 올라가고 미분양 사태로 <살아보고 구매>하라느니 <할인분양>이니 온갖 프로모션을 내걸 즈음까지가 이 아파트와 나의 인연인 줄 알았다. 당시 제니스는 새집에 주상복합이고 친정집 근처기도 해서 24평 전세를 알아봤었다. 결과적으로 우린 돈이 없었고 대출에도 무지한데다 내 직장(인천)과도 멀어 포기하고 인천 학익동 관사에 신혼집을 꾸몄다. 결혼한 지 6년 만에 아빠와 합가 하여 제니스라. 참 인생이란 모를 일이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두산에서 사활을 걸고 만들었구나, 확 느껴지는 고급자재며 구조며 마음에 쏙 들었다. 엄마가 떨어져 죽고 나니 가족들 모두 고층에 질려 이사 갈 집은 저층으로 골랐다. 녹음이 시야의 높이에 쭉 펼쳐져 안정감이 느껴졌다. 전세지만 사는 동안 엄마 잃은 우리 가족의 안식과 치유의 공간이 되길 바라며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하는 내내 화장실 타일이며 내장재며 좋다 좋다 하며 시끌 시끌 청소했지만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청소를 해도 화끈하게 했을 우리 엄마. 부엌이 넓은 이 집을 무척 좋아했겠지. 이런 생각들.

이게 탄현동에 있어서 그렇지 킨텍스에만 있어도 이십억은 너끈할 거다. (침묵) 집 좋으면 뭐하냐. 너네 엄마가 없는데.

먼저 엄마 얘기를 꺼낸 건 아빠였다. 자조 섞인 말투의 의미를 안다. 아빠는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엄마가 이사를 원할 때 지금 살고 있는 집 하자보수만 끝내 놓고 가자고 설득한 자신을 원망하는 중이다. 이렇게 이사할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이사할 걸. 그랬다면 아내가 살았을까. 하고.


남동생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한층 밝은 목소리로

"엄마는 갔고, 우리가 엄마 몫까지 잘 살면 돼요"

축 가라앉은 가족들의 가슴에 파이팅을 덧칠했다.


"침대는 이삿날 들어올 거야 아빠" ㅡ나

"침대가 좋으면 뭐하냐. 엄마가 없는데"


"안마의자는 이주 걸린대요. 매트도 같이"ㅡ남동생

"안마의자가 언제오든 오기만 하면되지 뭐"


엄마가 있었다면 화통하게 웃으며 침대 건 안마의자 건 "빨리 누워보고 싶구나" 했을 물건들은 더 이상 아빠를 기쁘게 해 주지 못했다. 남동생과 내입장에서는 뒤늦게 효도한다고 닭 쫓던 개가 된 심정이 들 수밖에.


스팀청소기가 역시 마루 청소에는 최고인 것 같다. 로하(동생네 강아지)가 배변훈련 완성되기 전에 여기저기 쉬야를 하는 통에 집주인한테 혼날까 봐 세입자의 예의로 큰맘 먹고 구입했단다. 큰집 청소하는데 힘들다고 아로마 액에 편백 스프레이까지 들고 와서 쌔빠지게 밀고 청소기는 우리 가족 쓰라고 기증을 했다. 기특한 녀석

냉장고 정리 중인 내가 사랑하는 남자 셋

배가 너무 고팠다. 하긴 열두 시부터 네시까지 락스칠에 창틀 청소에 이사 당장 들어올 집 청소를 했으니. 예상했던 것보다 일은 빨리 끝났지만 삔 발가락에 신경을 쓰느라 걸을 때마다 신경 쓰며 걸으니 금세 피곤해졌다. 킨텍스 근처에 돼지고기를 먹으러 갔다. <훔친 뒷고기>인가. 단지 내에서 제일 사람이 많은 고깃집. 기름진 구운 고기를 참 잘하는 것 같다.

니들은 너무 아끼지 말고 사람답게 살아라. 내가 엄마랑 둘이 아끼고 아껴가며 살아봤는데 돈 좀 써보려니까 엄마가 죽고 나니 모든 게 허무하네. 사람답게 사고 싶은 거 사고 쓰고 싶은 거 쓰고 애도 낳고 너무 아등바등하지 마라. 내가 나중에 너네 쪼끔 도와줄 수는 있을 것 같으니까.

남동생과 나 둘만 있는 자리에서 아빠는 아끼고 절약하며 그땐 먹고 산다고 했던 모든 것들에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엄마랑 재밌게 지낼 줄만 알았던 노후를 위해 자식들 손 안 벌리려고 실컷 달려왔는데 돈만 남고 엄마가 없어진 지금 모든 것이 재미가 없단다.


나는 아빠와 엄마가 서로 사랑했다는 것을 안다. 욕하고 싸운 날도 많았지만 근본적으로 내 부모님은 사랑과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천성이 그랬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곁에 있어서 오늘날까지 든든했다. 나에게 참 어른의 기준이 되어준 사람들이다. 그런 내 부모님이 자랑스럽다.


그런데 엄마가 죽고 날 달래느라 괜찮다, 나는 강해서 무너지지 않는다. 걱정 말라하던 아빠는 날로 약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식들 어깨에 기대지도 못한 채 혼자 활활 타는 불 구덩이 속에 독사과를 먹은 아빠가 타들어 가고 있다. 앞으로 아빠가 살아갈 날들이 아빠에게 있어서 무엇을 하든 엄마에 대한 짙은 그리움으로 반쪽짜리 행복만 누릴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사실 그건 아빠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아빠의 이별 후폭풍은 독하다.

사별이 어디 보통 이별이어야지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십오년된 추억의 커피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