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4
해탈문을 지나서 양지바른 언덕 위로 잘 정돈된 돌담길을 따라가면 고색창연한 아름드리 사각 돌기둥 위로 홍제루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서기 1761년(영조 37) 9월 그믐날 이곳을 찾은 이덕무의 글에, “큰 돌기둥 수십 개가 아직도 시내의 왼쪽에 나란히 있다.”라고 한 기록이 보이는데 바로 홍제루의 돌기둥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1911년에 제작된 진관사 실측도에 따르면 현재 홍제루가 있는 자리에는 지금보다 두 배 정도 큰 규모의 대방(大房)이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의 나가원과 비슷한 크기입니다. 대방(大房)이란 19C 이후 도성 인근의 원당 사찰에 등장하는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입니다. 하나의 건물 내에 불당, 강당, 식당, 누각 등을 갖춘 다용도 건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주로 왕실의 후원자라든지 양반 세도가들의 휴식과 풍류, 접대 및 공공의식 둥의 기능을 겸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진관사 대웅전은 1854년(철종 8년)에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고 대방은 1879년에 33칸 규모로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대방의 창건 시기는 대웅전 중창 이전과 이덕무가 진관사를 방문했던 1761년 이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홍제루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전이 보이고 왼쪽에 나가원, 그리고 오른쪽에 나한전과 동별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나가원은 1955년 북한산 소재 부황사(扶皇寺)에 있는 낡은 요사 한 채를 옮겨와 해체 신축한 것으로 현판은 탄허 스님의 글씨입니다. 진관사에는 나가원 동정각 등 탄허 스님의 글씨가 많이 보이는데 이는 1964년 이후 진관사를 재건한 최진관 스님과의 인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육칠십 년대 신축한 건물에는 탄허 스님의 글씨가, 그리고 최근에 지은 건물들에는 혜운 스님의 현판 글씨가 많은데 두 분의 글씨를 비교하며 감상하는 것도 진관사 여행의 한 묘미가 아닐까 합니다. 탄허 스님의 글씨는 흡사 거대한 용오름을 보는 듯 힘차고 활기가 넘쳐 거침이 없다면 혜운스님의 글씨는 다소곳한 여인의 춤사위를 보는 듯 그 선이 유려합니다.
대웅전 뒤 야트막한 동산에 올라가서 보니 진관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선유원 뒤 5층 석탑이 있는 곳은 수륙사가 있던 자리이고 홍제루 건너편 함월당 어름에는 독서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난 2010년 발굴조사에서 안타깝게도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독서당 얘기가 나왔으니 세조 때의 문신 홍일동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군요. 홍일동은 세종 때 이곳 진관사에서 글공부를 했던 사가독서(賜暇讀書)의 멤버는 아니지만 멤버 중 한 사람인 신숙주와 절친이었던 관계로 진관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됩니다. 먼저 사가독서란 세종이 집현전 학사 중 뛰어난 이들을 선발해 유급휴가를 주고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입니다. 성삼문의 「사가 수창」이라는 시에 보면 “정통 임술(1442)에 박팽년, 신숙주, 이개, 하위지, 이석형과 왕명으로 삼각산 진관사에서 독서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글 창제가 1443년인데 이들이 진관사에서 독서한 시기가 1442년이니, 때가 때인지라 집현전 학자들이 진관사에서 비밀리에 한글을 연구했다는 소문도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아 보입니다.
아무튼 이로부터 약 20년 후인 1463년(계미)에 사가독서 멤버 중 한 사람이었던 신숙주가 다시 진관사를 찾게 되는데, 오랜만에 본 진관사는 그 모습이 옛날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진관사 사기를 보면, 신숙주가 진관사를 다시 찾기 약 10년 전인 1452년(문종 2)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십여 년 만에 진관사를 찾은 신숙주의 마음은 결코 편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함께 독서했던 멤버들 대부분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 피비린내가 아직 채 가시지 않았을 때였으니까요. 무슨 생각으로 신숙주가 진관사를 다시 찾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날 신숙주와 함께 진관사 유람에 나섰던 인물이 바로 홍일동입니다. 먼저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등장하는 홍일동 관련 기록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공이 일찍이 진관사(津寬寺)에서 놀 때, 떡 한 그릇ㆍ국수 세 주발ㆍ밥 세 그릇ㆍ두부국 아홉 그릇을 먹었고, 산 밑에 이르러 또 삶은 닭 두 마리ㆍ생선국 세 그릇ㆍ어회 한 쟁반, 술 사십여 잔을 먹었더니 세조가 듣고 장하게 여겼다. 그러나, 보통 때에는 밥을 먹지 않고 쌀가루와 독한 술을 먹을 뿐이었다. 뒤에 홍주(洪州)에서 폭음하다가 죽으니 남들은 그의 창자가 썩어서 죽었는가 의심하였다. 《필원잡기》
소설 『홍길동전』은 실존인물 홍길동을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 실존인물 홍길동의 형이 바로 홍일동입니다. 세조 찬위를 도운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훈에 책록 되었고, 관직은 지중추(知中樞)에 이르렀습니다. 부친은 홍상직이고 형은 홍귀동인데, 홍귀동은 성종의 후궁인 숙의 홍씨의 친정아버지입니다. 홍일동은 흔히 대식가요 주당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성격이 호탕하고 시와 음악에도 뛰어난 가히 조선의 풍류 남아였다고나 할까요. 유작으로 효 팔음체 기 강중(傚八音體寄剛中)이라는 시가 있는데 다음 방문지인 삼천사 대지국사 터에서 소개하겠습니다.
아무리 대식가라도 그렇지, 《필원잡기》의 내용이 너무 과장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신숙주의 「칠언 소시(七言小詩)」에도, “계미년 이백옥과 일암 선사가 진관동에 유람하여 옛 자취를 더듬어보자고 하여 홍일동, 김호생 등을 불러 진관사를 둘러보았다. 절은 모두 새롭게 바뀌어 옛 자취가 다 변하였으나 다만 문 앞의 고목만이 옛 모습 그대로였다. 다시 동구로 나오니 둥근 봉우리가 물가에 임해 있어 장막을 치고 함께 둘러앉아 활을 쏘고 시를 읊으며 하루를 즐거이 보냈다. 진관사 주지 성명(性明)이 떡, 국수, 두부, 밥을 장만하여 승도 수십 명을 이끌고 와서 접대하였다. 일동이 두부 일곱 사발과 밥, 국수, 어죽 여러 그릇을 비우고 술 여러 사발을 들이켜니 승도들이 모두 놀라 자빠졌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 과장된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예로부터 수륙제를 지내던 사찰이라 음식 맛이 좋아서 그랬을까요?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에도 진관사는 사찰 음식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다시 대웅전 뜨락으로 내려섭니다. 한동안 포근하던 겨울 날씨가 갑자기 영하로 떨어져서 인지 절집 마당엔 인적이 뚝 끊겼습니다. 홀로 명부전,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을 기웃거리다 문득 대웅전 현판 생각이 나서 다시 대웅전 앞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서두의 가을편지에서, “아무리 쓸어도 티끌 하나 없을 것 같은 절집 마당”이라는 표현을 쓴 것처럼 진관사는 오늘날 누가 봐도 깨끗하게 잘 정돈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인근에 매점, 술집 등이 자리 잡고 있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진관사는 1452년(문종 2)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있었고, 1463년(세조 9) 화재로 소실된 것을 1470년(성종 1) 벽운(碧雲)이 중건하였으며, 1854년(철종 5)과 1858년에 다시 대웅전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의 대웅전은 6·25 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65년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푸른 기와를 머리에 인 대웅전은 흡사 곱게 치장한 새색시의 모습처럼 단아해 보입니다. 현판 글씨는 조선 선조의 여덟 번째 아들인 의창군 이광(李珖)의 해서체 글씨인데, 화엄사 현판을 모각한 조계사의 대웅전 현판을 다시 모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래 진관사 대웅전에는 의창군의 글씨가 아닌 추사의 글씨가 걸려 있었습니다. 6·25 전쟁으로 대웅전이 불타면서 함께 사라져 버리기는 했지만 몇몇 일제강점기 때의 사진 자료 속에는 엄연히 추사의 현판 글씨가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10년 6월 기독교청년회의 제1회 하령회(여름수련회)가 진관사에서 열렸는데 당시에 찍은 기념사진에도 추사의 글씨는 또렷이 남아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울 봉은사와 양평 용문사 대웅전 현판은 추사의 진관사 현판을 모각한 것이라 하니 비록 불타버리기는 했어도 추사의 진관사 대웅전 현판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남아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사가 죽기 사흘 전에 썼다는 봉은사 「板殿(판전)」글씨는 추사체의 진수로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봉은사 판전 글씨와 진관사 현판은 너무나 흡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봉은사에서 진관사 현판을 모각해 간 것이겠지만요. 추사가 봉은사 판전 글씨를 쓴 것이 1856년의 일인데 그렇다면 진관사 대웅전 현판은 언제 썼던 것일까요? 1854년(철종 5)에 진관사 대웅전 중건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추사의 현판은 봉은사 「판전」 보다 조금 이른 시기인 1853년이나 54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앞에서 소개해 드렸던 ‘공입 진관사’ 시 역시 이 시기에 창작되었을 것이고요. 이 시기는 추사가 북청 유배에서 돌아와 과천 집에 머무를 때입니다.
2015년 12월 9일 자 불교신문에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있습니다. 기사의 취지인 즉, 당시 불교신문 모 논설위원이 봉은사 현판 글씨가 추사의 진관사 대웅전 현판 글씨를 모각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를 진관사 주지스님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추사의 글씨를 복원하겠노라고 약속했으며, 1년 후면 진관사에서 추사의 현판 글씨를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2017년 벽두에 찾은 진관사 대웅전 현판은 아직 옛날 그대로입니다. 궁금한 마음에 종무소에 들러 사실관계를 확인해보니 추사의 현판을 복원하는 것은 맞으나 정확한 일정은 말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절문을 나서는데 추사의 글씨를 보지 못한 서운함 때문인지 찬바람이 휙 하고 얼굴을 스칩니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고 하였으니 언젠가 되긴 되겠지 하고 생각하다가 또 가만 생각해보니 어린아이의 서툰 글씨처럼 천진난만하게 여겨지는 추사의 글씨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는 대웅전에 과연 어울리기는 한 것인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추사가 다시 살아 돌아와서도 여전히 옛날과 똑같은 필체를 구사할 것인지? 괜한 걱정 하나 늘려 담고 이웃 삼천사로 총총 발걸음을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