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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Oct 13. 2017

삼천사지 출토 동종의 비밀

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5

동종. 높이 27.1㎝, 입지름 16.9㎝이며 1967년 11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내리 윤경민 씨 자택 증축과정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동종이다. 국립박물관 소장.

진관사를 나와 북한산 둘레길 제9구간 <마실길>로 접어듭니다. 진관사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가 사슴집이라는 음식점 앞에서 삼천사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와 만나 창릉천으로 흘러가는데 과거에는 이 하천을 기준으로 진관내리와 외리를 구분했다고 합니다. 즉 진관사를 등지고 하천 좌측, 지금의 한옥마을을 비롯한 기자촌, 하나고등학교가 있는 이말산 지역은 진관외리에 해당하고, 우측의 진관사, 삼천사 및 3호선 지축역 일대는 진관내리에 속했습니다.     


사슴집을 지나 원효 조경 삼거리에서 삼천사 쪽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얼마 전 이곳 돼지집이라는 음식점에 들렀을 때 주인 할머니로부터 들은 바로는, 지금의 원효 조경 자리가 예전 신혈사 터였으며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주춧돌을 비롯한 여러 석재들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진관내리 토박이로 누구보다 마을의 역사를 잘 알고 계실 할머니의 말마따나 신혈사가 지금의 원효 조경 자리에 있었던 게 사실이라면, 고려 현종의 왕사이자 현화사 주지를 역임한 대지국사 법경이 머물렀던 삼천사는 과연 어디에 위치했을까요? 현재의 삼천사 자리는 불과 사오십 년 전만 해도 마애불만 홀로 휑한 바람의 골짜기를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삼천사는 고려 때 삼천 명의 승려가 거주할 정도로 규모가 큰 절로 임진왜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도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기슭에는 옛 절터들이 남아 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케 합니다. 그 절터 중 한 곳에서 대지국사 법경의 탑비가 발견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몇 차례의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이때 나온 동종이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라고 합니다. 과연 사실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때는 1967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진관내리에 살던 윤경민 씨 집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청동 범종, 청동정병, 청동 대부 발(靑銅臺付鉢) 등의 불교 유물이 발견되었고 이는 매장문화재로 신고 되어 국고에 귀속되었습니다. 이때 발견된 동종은 크기가 약 27㎝ 정도로 당시 조사단의 표현을 빌면, “전체의 비례가 쾌적하고 종신(鐘身)의 곡선 흐름이 아름다운 완미 한 범종으로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것이다.”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종은 현재 ‘동종’이라는 이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물론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아닙니다.      


윤경민 씨 집 증축과정에서 나온 동종이 버젓이 삼천사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더구나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전시 중인 것으로 소개되고 있으니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 됐습니다. 다행히 윤경민 옹이 아직 생존해 있다고 하니 먼저 그 분부터 만나봐야겠습니다.     


삼천탐방지원센터를 지나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니 저 멀리 계곡 한 편에 운경민 옹이 운영하는 음식점 삼천장이 을씨년스럽게 서있습니다. 겨울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요즘에는 등산객들이 주로 구파발이나 연신내 쪽에서 뒤풀이들을 하기 때문에 장사가 예전만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를 건너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이 엄동설한에 웬 나그네냐는 듯한 표정의 주인아주머니가 빼꼼히 문을 열고 내다봅니다. 식사하러 온 게 아니고 50년 전의 동종 때문에 찾아왔다고 하니 그제서야 반갑게 윤경민 옹이 계신 내실로 안내해줍니다.     


삼천장에서 만난 윤경민 옹은 올해 팔순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한 모습입니다. 하마터면 영영 묻혀 버릴뻔한 동종의 발굴 비사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합니다. 처음 발견 당시에는 동종인 줄 모르고 무슨 투구인 줄 알았다는 얘기며, 지역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고 국립박물관에 직접 기증했다가 곤욕을 치른 일, 동종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금속탐지기를 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든 일 등등 한 번 풀어헤친 이야기보따리는 끝날 줄 모릅니다. 이야기 중간에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동종 사진을 보여주니 단박에 알아보고 1971년 당시 국립박물관장 명의로 된 매장문화재 국고 귀속 공문과 동종 카피 사진을 꺼내놓습니다. 주인아주머니가 내놓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계속해서 대지국사 탑비 발견 일화 등을 듣다 보니 어느덧 네 시가 훌쩍 지나고 말았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윤경민 옹 부부와 헤어져 대지국사 탑비 터를 향해 다시 길을 나섭니다. 삼천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이삼백 미터쯤 올라가자 너른 공터가 나오는데 족히 수백 년은 되었을법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꽤 규모가 큰 절의 입지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더 위로 올라가니 미타교 다리 못 미처 차도와 등산로가 만나는 지점 좌측으로 밧줄이 쳐진 공터가 보이는데, 곧 윤경민 옹이 말한 동종 출토지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이곳에 꽤 큰 규모의 집을 지었는데 무허가 건축물 일제정비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현재의 삼천장으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한 출토지 근처를 서성거리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봅니다. 성능(聖能)의 북한지(北漢誌)에, “진관사는 삼천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사되었다.”라고 한 기록이 있고 또 신혈사 터로 추정되는 곳이 근처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곳이 고려 때 진관사였을 가능성은 없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진관사는 무엇이란 말인가? 태조 이성계가 수륙사를 새로 조성하면서 이룩된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지는데 자세한 연구는 전문가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미타교를 지나 삼천사로 향합니다. 삼천사는 동국여지승람과 신경준의 삼각산기 등에는 ‘三川寺’로, 그리고 성능의 북한지와 이덕무의 유북한기 등에는 ‘三千寺’로 기록되어 있는데, 대지국사 탑비 터에서 출토된 비편을 통해 본래 이름이 ‘三川寺’였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북한산 계곡 중에 유난히 물이 많은 골짜기라서 삼천사(三川寺)라 했고, 三千寺는, 고려 때 이곳을 삼천승동(三千僧洞)으로 부른 데서 연유되었다고 합니다.      


삼천사 석탑을 지나 미로처럼 좁은 등산로를 따라가니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보물 657호 삼천사 마애불이 보입니다. 좁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지 풍경소리가 유난히 큰데 신발 벗고 두 손 모아 공손히 마애불 전에 참배합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이 휑한 바람의 골짜기를 홀로 지키며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민초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소원을 이루어주었다고 하니 그 가없는 공덕에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집니다.    

삼천사 마애불. 높이 3.02m, 높이 2.6m로 1979년 5월 22일 보물 제657호로 지정되었다.

삼천사 마애불을 지나 부왕동 암문 방향으로 약 삼십여 분을 올라가자 마침내 대지국사 탑비 터 팻말이 보입니다. 등산로를 벗어나 화살표를 따라가니 여기저기 석물들이 흩어져 있고 이윽고 거대한 석축이 나타납니다. 석축 위로 올라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육중한 체구의 거북, 머리를 동쪽 방향으로 두고 위풍당당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곧 대지국사 탑비의 귀부(龜趺)입니다. 이 대지국사 탑비는 발견 당시 거북의 머리 부분만 살짝 땅위로 드러나 있었고 몸체는 대부분 흙 속에 묻혔으며, 더구나 몸체를 덮친 거대한 암석으로 인해 비석은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습니다. 일찍이 일제강점기 때인 1916년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이를 조사하려 했으나 폭우로 인해 실패하였고 그 이후 1964년 1월에서야 국립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최초의 학술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삼천사 대지국사 탑비 터. 비신은 산사태 때 흘러내린 바위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고 현재는 귀부와 이수 그리고 대지국사 법경의 부도비 기단석 등이 남아 있다.

1964년 1월 16일 동아일보는 5면 거의 전체를 할애하여 대지국사 비 발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1월 8일, 10일, 21일 등 세 차례에 걸친 조사를 통하여 74개의 비석 조각을 발굴하였으며 여기에 쓰인 514자의 글자를 통해 이 비석이 고려 현종 때 삼천사 주지로 개경 현화사 주지와 왕사를 역임한 대지국사 법경의 탑비임이 밝혀졌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한 독자의 제보를 받고 이를 국립박물관에 조사 의뢰해 대지국사 비를 발굴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나 삼천장 윤경민 옹의 증언은 약간 다릅니다. 


윤경민 옹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진관내리에 거주하던 승려 염창권이 산에 갔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이상해서 돌부리 주변을 파보니 거북이 머리 같은 게 나왔고, 이튿날 일꾼을 데리고 가서 주변을 파헤쳐보니 귀부가 나와서 이를 신문사에 제보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공식적인 대지국사 비 발굴 기록을 보면 동아일보 보도 전인 1963년 9월에 진홍섭, 정영호 교수 등이 이곳을 답사하여 지상에 노출된 귀부를 확인하였다고 하니 윤경민 옹의 증언대로 승려 염창권이 최초의 발견자는 아닌 듯합니다. 대신 염창권이 귀부 주변을 파헤치다가 비석의 파편을 발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입니다.     


수차례에 걸쳐 발굴 작업이 이루어진 대지국사 탑비 터는 현재 귀부와 이수(螭首) 부도 지대석만이 쓸쓸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본래는 귀부 좌측의 주불전을 중심으로 좌전과 우전 그리고 남행랑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만 겨우 남아 있을 뿐 옛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귀부 앞에 공손히 참배하고 나서 사방을 한 바퀴 돌아봅니다. 수 백 년의 세월을 땅속에 묻혀 있다가 겨우 지상으로 나온 거북은 또 다시 어디로 가려는지 황망히 동쪽 하늘을 향하고 있는데 저 멀리 산 아래는 벌써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립니다. 아직 깨우쳐야 할 중생이 많아서일까요? 거북은 피곤함도 잊은 채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만 같습니다. 나도 거북을 작별하고 스러져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총총 인간세상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문득 홍일동의 시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싸구려 술 한 잔에도 마음 즐겁고 匏飮信可樂

달팽이의 집이라도 거리낄 것 없으니 蝸室聊自適

죽으면 초목과 함께 썩고 말 것을 草木與同腐

무엇하러 한평생 허둥대며 살려하는가? 一生何役役


-홍일동의 시 ‘팔음체를 모방하여 강중에게 보내다’ 중에서 -              

삼천사 세존진신사리불탑. 오대산 월정사 8각9층탑(국보 제48호)과 인도 사르나트아쇼까 석주 4두 사자상을 원형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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